◈ 140.
관측병의 외침에 배 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을 때, 돌연 하늘이 새카맣게 뒤덮였다.
“오. 갑자기 튀어나왔네.”
이진한은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곤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위쪽에서부터 날아온 것일까, 날개를 펄럭이며 이곳을 향해 닥쳐오는 와이번이 적어도 수십 마리는 되어 보였다.
“전투 준비!”
“제길, 더럽게 많네. 승객들은 선실 안으로 피하쇼! 까딱하다 낚아 채여 잡혀가면 구할 도리가 없으니!”
그리 드문 일은 아닌 듯 선원들은 각자 작살이나 활 따위를 들고 다니며 밖에 나와 있는 승객들에게 대피를 종용했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지켜보자. 힘들다 싶으면 그때 가서 도와줘도 괜찮아.”
이 배에도 자체적으로 호위가 있었다.
강으로 이어진 운하라서 따로 배를 운용하는 해적 같은 건 없지만, 간간이 몬스터나 마물이 출몰해 습격해온다곤 했었다.
이진한은 엘레오노라는 선원의 인도에 따라 공용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두 분 다 별일 없으십니까.”
얼마 뒤, 소식을 듣고 뛰쳐나온 것인지 무장한 상태의 미르엘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응. 아직 위에서 맴돌기만 하고 공격해오진 않았어. 그보다, 일레이나는?”
“아직 많이 피곤한가 봅니다. 깨워도 미동조차 하지 않길래 내버려 두었습니다.”
“연구하느라 고생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네.”
마법사는 애초에 체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일레이나는 미용 측면에서 꾸준하게 건강 관리를 했지만, 마법사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기절하다시피 잠에 빠져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리라.
“그럼 일레이나는 쉬게 내버려 두고, 이 인원으로 해볼까.”
“…엘레오노라 님은 몰라도 제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군요.”
이진한의 말에 미르엘이 뺨을 긁적였다.
타당한 의견이었다. 엘레오노라의 경우 마법으로 날아드는 와이번을 원거리에서 요격할 수 있지만, 검사인 미르엘은 팔이 짧았다.
와이번이 몬스터라곤 하나 지능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거리만 주지 않는다면 미르엘이 자신들에게 닿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터.
쉬이이익─ 쿵!
그때 배 위로 부닥치는 둔중한 충격에 선체가 흔들렸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이진한이 고개를 들자, 와이번 떼가 각자 바위나 나무 따위를 들고 와 배 위에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쏴! 접근하지 못하게 방해해!”
“제길,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까지 많은 적은 없는데!”
“지원은? 곧 있으면 가도라 왕국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 왕실로 가는 물자가 있으니 지원이 올 터인데…!”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외부는 꽤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와이번 습격은 종종 있는 일이지만,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닥쳐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인지 모두의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가득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베르너 님의 영향일까요?”
이진한이 어깨를 떨구며 옅게 한숨을 내쉬자 엘레오노라가 살짝 놀리듯 미소를 지어왔다.
“모르겠네. 아니면 승객 중에 원인이 있을 수도 있고.”
그의 눈이 뒤쪽에 있던 사람들을 향했다.
대부분 이 상황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듯 겁에 질린 표정으로 밖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가운데 와이번을 조종하거나 모종의 원인을 불러일으킬 흉수가 있을 가능성도 없진 않아 보였다.
“으악, 으아악!”
결국 화살을 쏘아대던 선원 하나가 그 날카로운 발톱에 어깨를 잡혔다.
주위에 있던 동료들이 그 발에 밧줄을 걸어 필사적으로 당겼지만, 부질없이 딸려갈 뿐이었다.
“일단 도와주러 갈게요.”
타다닷!
보다 못한 엘레오노라가 땅을 박차며 앞으로 나아갔다.
곧 바람의 칼날이 허공에서 휘몰아치며 날카롭게 쏘아졌고, 민감한 감각으로 그것을 파악한 와이번은 먹잇감을 놓으며 칼날을 피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러면 저도….”
“그 전에 이거 받아.”
휙.
이진한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망토를 미르엘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가 착용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형태의 것으로 찰나 동안 허공에서 운신할 수 있는 부유 마법이 걸린 망토였다.
“몇 초 정도는 허공에 떠 올라 있을 수 있을 거야.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차고 넘칩니다.”
미르엘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이곤 곧바로 땅을 박찼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속도감으로 질풍처럼 쇄도한 그녀는 곧 다시금 선체에 그림자를 드리운 와이번의 앞으로 닥쳐갔다.
“흡-!”
눈부신 오러가 그녀의 검에 휘몰아쳤다.
마스터 직전에 다다른 농밀한 빛이 허공에 기다란 궤적을 그리자 몸이 반절로 쪼개진 와이번이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수면 위로 떨어져 내렸다.
“조금만 더 있으면 마스터 찍겠네.”
일행 중 가장 성장세가 두드러지는 그녀였다.
조금만 더 자극을 준다면 마스터에 이르는 벽에 다다를 터.
사실 검사 클래스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마스터에 이르면 여러 제약이 풀려 지금까지 해주지 못한 것들을 해줄 수 있기에 이전보다 더 뚜렷한 성장세를 만들어줄 수 있으리라.
“그러면.”
이진한도 활을 꺼내 들었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분전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와이번의 수가 너무 많기에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아직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방금처럼 저 날카로운 발톱에 낚아채이기라도 한다면 금세 목숨을 잃고 말 터.
이왕 나섰으니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드러나지 않게 한 손을 보탤 생각이었다.
퍽! 퍽!
화살 한 방에 하나씩.
날개를 맞춰 치명적인 상황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주며 활약한다. 그러던 차 이진한은 귓가에서 들려오는 이질적인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지원인가.”
이쪽 배와 비교하자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은 작은 크기였지만, 몇 배는 더 빠른 속도고 다가온 배에서 몇 명의 인원이 허공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모두 정령의 기운을 농밀하게 풍기는 것을 보니 가도라 왕국의 정령 기사단이 지원 온 듯했다.
쉬아아악!
거센 불길이 와이번들 가운데 일어났다.
마법이 일으킨 것과는 사뭇 다른 순수한 불꽃의 색.
그것에 지원군이 당도했음을 눈치챈 선원들이 화색을 띠며 외쳤다.
“지원이다!”
“정령 기사단이 왔다!”
최소 중급 이상의 정령들이 허공을 노니며 배 위를 공격하는 와이번들을 막아냈다.
이진한은 활을 집어넣은 채 여유로이 그 광경을 구경하다, 마지막으로 배 위에 착지하는 한 인영과 눈을 마주쳤다.
“….”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로브 자락이 바람에 펄럭거리며 일순간 그 얼굴이 드러났다.
이진한은 자신의 망막에 맺히는 푸른 머리카락과 익숙하디익숙한 동글동글한 눈망울에 두 눈을 크게 뜨며 제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임을 멈춰 섰다.
“…?”
정작 상대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끝으로 몸을 돌려 다른 동료들에게 합류했을 뿐이었다.
파지지직─!
시퍼런 전격을 품은 뇌운의 정령, 라이키리(雷切)가 전장을 휩쓸며 한 번에 일곱 마리에 달하는 와이번을 격추했다.
푸른 머리카락, 동글동글한 눈망울, 그리고 뇌운의 정령 라이키리까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선명한 그 특징에 이진한이 얼어붙어 있을 찰나, 눈부신 활약 끝에 와이번 무리를 격퇴한 엘레오노라가 밝은 미소로 그에게 다가왔다.
“어떤가요? 마법의 운용이 이전보다 한층 더 능숙해지지 않았어요?”
“…그래, 그러네.”
“…?”
자신이 생각해도 눈부신 발전이었기에 칭찬을 요구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엘레오노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자, 이진한의 시선이 정령 기사단원 중 한 명에게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는 얼굴이라도 있나요?”
“…아니겠지.”
설마 그녀일까.
풍기는 기세나 대현자의 눈이 탐색한 정보로 보아 본래의 《창조》와 비교하기엔 턱도 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 뚜렷한 외모와 정령의 특징은 얼마 전 자신의 잊힌 기억에서 본 이리아, 진하율과 소름이 돋을 정도로 똑 닮은 것이었다.
정령 기사단원들은 선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이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왔다.
“저희는 가도라 왕국의 정령 기사단입니다. 이 배는 본 왕실로 향하는 귀중한 물품들이 다수 적재하고 있던 차. 기사단의 부단장으로서 귀하들의 조력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니에요. 겸사겸사 도운 거니까요.”
이진한의 상태가 살짝 이상하다는 것을 파악한 엘레오노라가 먼저 앞으로 나서서 그 인사를 받았다.
“아닙니다. 이곳까지 오신 것을 보니 목적지는 본국이시겠지요. 머지않아 도착하니 충분히 사례하겠습니다.”
“감사히 받을게요.”
이렇게까지 말해오는 데 거절하는 것 역시 예의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엘레오노라는 옷자락의 양 끝을 가볍게 잡고 들어 올리는 것을 끝으로 의사를 표했다.
“…? 저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러던 차 정령 기사는 여전히 침묵한 채 자신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던 이진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 아니에요. 조금 전의 싸움으로 조금 충격을 받으셨….”
“이름.”
엘레오노라가 황급히 말을 둘러대기 전, 이진한은 깊은 회한이 서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름을 알고 싶다.”
“….”
기사는 그 물음에 잠시 이진한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결정했는지 손을 들어 머리를 덮고 있던 로브의 후드를 내리고는 동글동글한 눈망울로 그의 모습을 담았다.
“가도라 왕국 정령 기사단의 부단장.”
물빛을 품은 듯한 푸른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빛을 뿜어냈다.
“이리아 렝케라 합니다.”
이름과 외모가 기억 속의 그녀와 똑 닮은 여인이었다.
***
“…저 사람, 왜 그래요?”
느지막한 저녁에 일어난 일레이나는 가볍게 식사하던 중 방구석에 놓인 소파를 가리켰다.
“….”
소파에 누운 이진한은 하염없이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령 기사단 부단장 이리아 렝케와의 만남 이후 이진한은 쭉 이와 같은 상태.
미르엘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몇 시간째 저러고 계십니다. 아까 물어보니 생각할 게 있으시다던데.”
“이상한 일도 있네.”
일레이나는 어차피 별 심각한 일은 아닐 거로 생각하며 식사를 재개했다.
그러던 차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엘레오노라가 툭 하고 말을 내뱉었다.
“아마 그 정령 기사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정령 기사?”
“낮에 있었던 일은 알죠?”
“네. 와이번들이 습격해왔다면서요. 도중에 가도라 왕국의 정령 기사단이 지원을 왔고.”
“그중에 이리아 렝케라는 기사가 있었어요. 직급은 부단장이고, 상급 정령을 능숙하게 다루는 게 예사롭지 않은 실력자로 보이더라고요.”
“뭐, 한눈에 반하기라도 했나?”
잠시간 이진한의 눈치를 보고 있던 엘레오노라가 살짝 머뭇거리더니 이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베르너 님의 연인이셨던 《창조》의 정령사와 많이 닮았다는 모양이에요. 외모도, 이름도.”
“푸흡!”
일레이나는 먹던 스튜를 뿜어냈다.
엘레오노라는 이미 그럴 거라고 예상한 듯 자신 앞에 가볍게 실드를 만들어냄으로써 그것을 막아냈다.
“…《창조》와 연인이었다고?”
“네. 레어에서 베르너 님께 직접 들었어요.”
“나는 처음 듣는 소리인데. 미르엘, 당신은 들은 적 있어?”
“저도 처음 듣습니다.”
“애초에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
일레이나가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엘레오노라는 뭐가 문제냐는 듯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