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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39화 (139/210)

◈ 139.

【974:23:15】

이전에 흡수한 것보다 더 퍼센티지가 높아서 그런 것인지 300시간의 유예가 늘었다.

최소 기준선인 1천 시간에 도달하기까지는 아주 조금이 남았다.

막상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딱히 보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기념비적인 수치가 아닌가.

‘고인물 아니랄까 봐 이상한 거에 집착하네.’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털레털레 저었다.

정보 길드 아레나에 말해 놓았고, 아이슬란이나 다른 드래곤들 역시 도와준다고 했으니 이전보다는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러면….”

“그러면?”

“각자 괜찮아 보이는 거 적당히 챙겨.”

드래곤의 보물 창고인 만큼 좋아 보이는 아티팩트나 무기들이 많다. 엘레오노라의 말 대로라면 제국의 비고보다 더 휘황찬란하다니 챙겨갈 것은 챙겨가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그, 그래도 될까요?”

일레이나가 살짝 찔린다는 기색으로 물어왔다.

이곳에 머물며 크루시아에게 받은 연구 재료나 재화가 적지 않다. 그 와중에 보물 창고까지 털어간다면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이 든 것이었다.

“상관 없어. 애초에 다 죽이고 빼앗으려 했던 것들인데. 녀석도 대충 예상했겠지. 그리고 전부 가져가는 것도 아니잖아.”

돈이야 어차피 많았다.

소모품이나 희귀 재료들, 그리고 아티팩트 같은 것 몇 종류만 챙겨가도 충분할 터.

이진한이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엘레오노라는 과감하게 발걸음을 내디디며 수북이 쌓인 보물 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아니면 언제 드래곤 레어를 털어보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저도 모르겠네요, 이제.”

미르엘의 말에 일레이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엘레오노라를 따라 쓸만해 보이는 것들을 물색해나갔다.

이진한은 광석 위주로 챙겼다. 어차피 그 레벨대 아티팩트나 무구 중에는 눈에 차는 것이 없었기에 차라리 새로운 검을 제작할 준비를 하는 것이 나아 보였다.

“으음, 좋아보이는 건 꽤 있는데 베르너 님이 만들어주신 장비보다 못해 보이네요.”

미르엘이 애매하단 표정으로 말했다.

검으로는 프로스트나, 무구로서는 이진한이 만들어준 마법 갑주보다 전부 성능이 떨어졌다.

엘레오노라와 일레이나 역시 마찬가지인 표정이었기에 이진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너무 눈을 높혀 놨나보네. 하긴 지금 착용하고 있는 것만 해도 동레벨 장비 보단 몇 배는 성능이 좋을 테니까.”

그래도 이왕 좋은 기회가 왔으니 천천히 둘러보라며 좀 더 시간을 주었다.

그렇게 얼마 뒤, 그녀들은 다시 이진한에게로 되돌아와 각자 선택한 결과물들을 내밀었다.

“일레이나는 목걸이와 최상급 마나석, 엘레오노라는 반장갑, 미르엘은 벨트인가.”

“이 목걸이에 마법 각인을 새기면 좋겠죠?”

“어. 원하는 마법 있으면 말해. 내가 새겨줄 테니까.”

“정말요?”

“그럼 내가 거짓말하겠어.”

“사실 해줄 걸 알고 선택한 거예요.”

일레이나가 씩 웃으며 목걸이를 매만졌다.

황금색 수실과 보랏빛 자수정으로 장식된 그 목걸이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의 것인 것처럼 잘 어울렸다.

“저는 창을 다룰 때 필요해서요. 손에 땀이 나면 창대가 미끄러지더라고요.”

“성능은, 괜찮네. 유사시에는 주먹으로 후려쳐도 바위 정도는 가볍게 부수겠어.”

“격투술도 배워야 할까 봐요.”

달칵.

그 옆으로 미르엘은 자신이 가져온 벨트를 허리춤에 착용했다.

“이전에 쓰던 것이 낡아서 골라봤습니다. 파우치 쪽에 공간 마법이 걸려 있어 짐을 보관하기에 좋군요.”

“그러게. 나랑 떨어지게 될 경우도 있으니까.”

이진한은 인벤토리를,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는 아공간을 보유하고 있어 번거롭게 짐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지만 기사인 미르엘은 아공간 마법이 걸린 배낭이나 주머니가 있다고 해도 번거로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파우치에 아공간 마법이 걸린 벨트는 그런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이 정도면 괜찮네.”

그 외에 잡다한 것들을 챙긴 그들은 후련한 얼굴로 보물 창고를 나왔다.

이진한은 곧바로 크루시아에게 남기는 편지와 통신용 아티팩트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일행을 바라보았다.

“곧바로 떠날 생각인데 괜찮지?”

“저희야 이 며칠 동안 푹 쉬었는데, 당신은 괜찮나요?”

“어. 나도 계속 잠만 잤으니까.”

일레이나의 물음에 이진한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사흘을 낭비해버렸다.

물론 시간의 유예는 넘쳐난다. 그리 급히 움직일 일은 없지만, 과거 기억 속에서 본 진하율의 모습이 계속해서 눈에 아른거렸다.

‘만약 그녀라면.’

홀로 천 년 뒤에 남게 될 자신에게 무엇을 남기지 않았을까.

헛된 상상이 될 것이 유력했지만, 그런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 한구석에 맴돌아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그러면 다음 목적지는 어디인가요?”

“다음은….”

엘레오노라의 물음에 이진한은 대답을 살짝 망설였다.

원래는 대륙 남부 쪽으로 내려가 《불굴》의 광전사, 나카무라 유이치의 흔적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곳에 자리한 해상 왕국은 유이치가 세운 것이라 하니 베르하임 왕국 때처럼 그의 유산이나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진하율의 기억을 보고는 마음이 바뀌었다.

“…서부로 간다. 가도라 왕국에 있는 《창조》의 흔적을 찾으러 갈 거다.”

“그렇군요.”

일레이나와 미르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와 《창조》가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엘레오로나는 입을 닫았다.

사실 그녀는 다른 둘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다.

개인사이기도 했고, 괜히 그런 이야기를 꺼내 신경 쓰이게 만들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왠지 기분이 조금 그렇네.’

엘레오노라는 가슴 언저리를 문질렀다.

씁쓸한, 어딘지 모를 그리움이 묻어 나오는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살짝 질투심이 이는 듯했다.

자신은, 자신들은 그 바로 앞에 있는데, 그의 눈은 더 멀리, 혹은 더 옛날을 향하고 있었다.

가끔 이쪽을 의식하는 모습을 보면 여성으로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닌 듯했지만, 아직 그런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할 만큼 사이가 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럼, 곧바로 출발하자. 크루시아한테도 전언을 남겨두었으니 괜찮겠지.”

이진한은 외투를 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엘레오노라가 샐쭉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것은 눈치채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

부우우─.

뱃고동 소리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뺨을 스쳐 지나갔다.

이진한은 뱃머리 난간에 기대 선두가 날카롭게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소리를 음미했다.

“시원하네요.”

“그렇네.”

엘레오노라가 흩날리는 머릿결을 누르며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바람의 방향을 따라 그냥 내버려 뒀지만, 아무래도 신경에 거슬리는 듯 끈을 하나 꺼내 머리를 질끈 묶고는 가볍게 등 뒤로 넘겼다.

“머리카락이 긴 것도 성가시네요. 자르는 것도 생각해봐야겠어요.”

“왜. 묶은 것도 잘 어울리는데.”

“…그래요?”

오랜만에 듣는 칭찬에 엘레오노라는 손가락으로 난간을 꾹꾹 누르며 미소를 지었다.

둘은 잠시간 침묵한 채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가도라 왕국은 《창조》가 터를 잡은 만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정령의 개체 수가 많은 곳으로 유명했다.

그 때문에 특정 기간에는 텔레포트의 사용이 제한되었는데, 하필 지금이 그 시기와 겹쳐 다른 수단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국가 단위를 잇는 대운하가 잘 발달 되어 있어 배편을 구했고,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며 항로를 따라 나아가는 중이었다.

“운하라 그런지 멀미가 덜하네요. 예전에 바다를 경유한 항해를 했을 때는 어지러웠는데.”

“그래? 나는 배 타보는 게 처음이라서.”

“배를 처음 타보세요?”

“어. 강을 넘으려고 조각배나 단 돛배 같은 건 타본 적이 있는데, 이런 본격적인 배는 처음이야.”

현실에 있을 때도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가면 비행기를 타고 갔지 배를 타고 간 적은 없었다.

그 흔하디흔한 유람선도 타본 적이 없었기에 이런 커다란 배를 타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신기하네요.”

“뭐가?”

“베르너 님이 처음이라고 하셔서요.”

“천 년이란 세월을 전부 산 건 아니니까.”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드래곤도 아니고 설마 그 시간을 전부 살았겠는가. 이 세계로 넘어와 배를 탄 적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때의 기억이 없으니 없는 것으로 쳤다.

“미르엘이랑 일레이나는?”

“미르엘은 방에서 가볍게 훈련 중이고, 일레이나는 자고 있어요. 아무래도 며칠간 밤샘한 게 힘들었었나 봐요.”

“하루 더 쉬고 올 걸 그랬나?”

“괜찮아요. 잠은 이동하면서도 잘 수 있으니까요.”

“하하, 매정하네.”

이진한은 작게 하품을 내뱉었다.

계속 같은 풍경을 보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 살짝 졸려왔다.

그렇기에 자신 역시 한숨 더 잘까 싶었지만, 아까보다 조금 더 거리를 좁혀 온 엘레오노라가 슬쩍 이쪽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리야 님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응?”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그렇기에 이진한이 두 눈을 깜빡거리자, 엘레오노라는 변명하듯 허둥지둥 말을 쏟아냈다.

“아뇨, 딱히 의식하는 건 아니고 개인적인 호기심이에요.”

“상관없기는 한데….”

그는 난간에 기대 옛 기억을 꺼냈다.

활발한 아이였다.

최상위 랭커 파티에서 처음 만났고, 서로 합이 잘 맞지 않아 티격태격 싸우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 같은 대학 출신에,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오프 모임을 했고, 제법 친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딱히 이성으로 의식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워낙 털털한 성격이었던지라 남자 친구 대하듯 허물없이 대했으니.

그러던 와중 어느 술자리에서 뜬금없이 다른 길드원한테 고백받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꾀여 넘어간 것 같은데.’

이진한은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진하율의 철벽은 파티에서도 알아주는 것이었다.

애초에 어느 게임이든 여성 유저라면 정신 못 차리고 집적거리는 놈들이 있기 마련이다. 진하율은 게임 감각처럼 귀신같이 그런 녀석들을 알아차렸고, 애초에 원천을 차단해버렸다.

그런 그녀가 고백을 받았다며 진지하게 상담을 해왔고, 왠지 친구를 빼앗기는 것 같아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들은 자신은 술기운에….

‘내가 고백을 했던가?’

진하율은 분명 자신이 술자리에서 고백했다며 말해왔다.

그 탓에 얼떨결에 사귀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정말로 고백한 것인지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았다.

뭐, 그래도 그럭저럭 풋풋하게 만나긴 했으나, 결국 성격 차이로 헤어졌다.

“그래도 재밌었지. 워낙 친했으니 말이야.”

“…그렇군요.”

엘레오노라 역시 그 광경이 머릿속에 그려지는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그러면….”

직후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뺨을 붉히며 고개를 들었다.

손가락을 비비 꼬고,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 찰나 저 위쪽, 망루에서 누군가 크게 소리쳐왔다.

“와이번! 와이번 때가 나타났다! 모두 전투 준비!”

“가고일?”

“…아.”

느닷없는 와이번 무리의 습격이 닥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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