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두둑.
이진한은 찌뿌둥한 몸을 풀어주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엘레오노라는 자리를 떠난 후 곧바로 다른 이들에게 그가 일어났다고 이야기를 전한 듯 인기척들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똑똑.
-베르너 님.
“들어와.”
익숙한 목소리에 이진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방문이 천천히 열리며 미르엘이 들어왔다.
그녀 역시 엘레오노라처럼 대련을 끝내고 씻고 온 참인 듯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으으, 일어나셨나요.”
그 뒤를 이어 초췌한 몰골의 일레이나가 어기적거리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전에 한 번 놀려서 그런지 방에 들어오기 전 클린 마법을 사용한 듯했지만, 그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가 깃들어 있다. 그녀는 곧바로 조금 전까지 이진한이 누워 있던 침상에 쓰러져 내리며 움직임을 멈췄다.
“다 죽어가네.”
“이쪽에 희귀한 재료가 많았나 봐요. 이런 기회가 아니면 못한다면서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연구에 몰두하더라고요.”
“하긴. 드래곤의 레어니까.”
이진한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흐트러진 일레이나의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묶어주며 미르엘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녀와의 대련에서 얻은 성과는 있었어?”
“…하하.”
문 뒤쪽에서 기척을 숨기고 있던 나탈리가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이진한이 잠에 빠져 있던 사이 크루시아와 함께 레어로 온 그녀는 현자의 동료에 대해 깊은 관심이 생겼다.
처음엔 조금 실망했다.
설마 얼굴만 보고 데리고 다니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한 명 한 명 말을 섞고 가볍게 손속을 겨뤄보니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다들 숨길 수 없는 원석이다. 현자님이 동료로 삼을 만 하구나.’
나탈리는 드래곤인 만큼 마법이나 무투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지녔다. 그렇기에 인간인 그들보다 월등한 강함을 품고 있었기에 나름대로 호의를 베풀고자 가볍게 가르침을 내려주었다.
열에 셋 정도만 알아들으면 다행이리라.
하지만 현자님이 이때까지 어떻게 굴린 것인지 그녀들 전부 이미 비슷한 수준의 경지와는 차원이 다른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원래라면 적당히 시간을 보내면서 현자님이 정신을 되찾을 때까지 심심풀이를 해소하려는 마음이었지만, 스펀지처럼 자신의 가르침을 쑥쑥 흡수하는 모양새에 무심코 진심이 되었다.
특히 빛을 베어낼 정도로 날카로운 실력을 지닌 이 미르엘이란 인간은 보기 드문 무재(武才)를 지녔기에 요 며칠간 자신의 오의를 가감 없이 전수해주었다.
“덕분에 많이 얻었습니다. 이전보다 한층 더 나아진 것 같아요.”
“다행이네.”
미르엘이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대답하자 이진한은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가 보기에도 미르엘의 기세는 한층 더 성숙해져 있었다.
이전에 손속을 섞었을 때를 보아 무술을 허투루 익히지 않은 것.
강자와의 대련은 언제나 반길 만한 것이었으니, 이러한 만남은 미르엘에게 있어 기연과도 같은 것이리라.
“그나저나 놀랐어요. 나찰(羅刹)의 나탈리라 함은 동부 지방에서 유명한 용병인데, 설마 드래곤이실 줄은.”
“말 편히 하라니까. 현자님의 동료면 나에게도 존중받아야 마땅한 위치니.”
“…하지만.”
나탈리의 말에 미르엘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베르너 님이면 모를까 자신은 아직 마스터에도 오르지 못한 애송이다. 그런 가운데 현자의 파티원이란 이유만으로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것일까.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 친해졌으면 이제 친구인 거지.”
“친구?”
“그래. 레드 일족인 나탈리의 이름으로 인정할게. 우리는 이제부터 친구다. 세간에서는 ‘깐부’라고 하던가?”
“그게 뭐야.”
미르엘은 쿡쿡 웃음을 흘렸다.
평소의 근엄한 모습과는 달리 그 나이대 여자들과 비슷한 풋풋한 분위기였기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이진한이었다.
“앗, 저 빼고 벌써 이야기 중이셨나요!”
그때, 다과를 가지고 온 엘레오노라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엘레오노라 님.”
“마침 배고팠는데.”
이진한은 씩 웃으며 자신 앞에 차려진 다과를 먹었다.
가벼운 과일이나 디저트 종류였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허기를 달래기엔 제격이었다.
“참, 크루시아는?”
이진한은 멜론을 닮은 초록색 과육을 먹으며 고개를 들었다.
레어에 이들 말고는 다른 인기척이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 둥지의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는 것일 터.
“유희 중인 곳으로 돌아갔어요. 그냥 뛰쳐나온 거라 수습하고 온다네요. 연락 넣을까요? 현자님께서 깨어나셨다고.”
“됐어. 미안하니까.”
이진한은 드래곤의 삶에 있어서 유희가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크루시아는 갓 성룡이 된 나이.
이제 막 시작한 유희일 터라 그 의미는 더욱 클 테니 방해하는 것은 미안할 따름이었다.
“됐으니까 나중에 천천히 와도 괜찮다고 전해줘. …그래서, 너는?”
이진한은 나탈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째서 이때까지 레어에 머물고 있는가. 혹시 아이슬란의 전언이라도 지닌 것이 아닌가 싶어 묻자, 나탈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어차피 용병으로 돌아다니고 있어서 괜찮아요.”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지닌 나탈리는 사뭇 매력적으로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현자에게 큰 흥미가 있었다.
당장 영웅은 드래곤 사이에서도 동경의 대상으로 중간계의 수호자에 못지않은 업적을 세웠다며 칭송받는 존재였다.
이진한의 존재는 나탈리에게 있어 살아있는 전설과도 같은 것. 헤츨링 때부터 누누이 보아온 그 업적은 쉬이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현자님만 괜찮으시다면….”
나탈리의 입술이 열리며 고혹스러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옆에 있던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며 긴장했고,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누워 있던 일레이나 역시 어깨를 흠칫 떨 정도였다.
드래곤, 강자.
그 두 개만 하더라도 자신들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다. 더불어 여성이라는 점과 외모까지 화려하기 그지없으니 더 없이 강력한 경쟁 상되가 될 것이 분명했다.
“파티에 합류해도 될까요? 마침 용병으로 활동하고 있어서 고용되었다면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할걸요. …원탁의 내용도 빼 올 수 있는 이중 첩자 노릇도 할 수 있고요.”
드래곤 정도 되는 존재가 당신을 위해 이중 첩자 노릇까지 하겠다.
그러니 파티원으로 받아달라.
드래곤에게는 굴욕적인 상황이었지만, 그 대상이 검은 현자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다.
“거절하지.”
하지만 이진한은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찰나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
나탈리는 설마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듯 살짝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어째서요? 저 현자님보단 못하겠지만, 그래도 여러 쓸모가 많아요!”
“아니, 귀찮아. 여기서 더 파티원을 늘리는 건 무의미하니까.”
냉정한 계산에서 도출한 결과였다.
아이슬란의 말과 행동으로 추측했을 때, 유사시 드래곤들은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으로 보였다.
더욱이 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동맹 관계라고 하지 않았나. 그가 보인 호의에는 한 점 사심이 없었으니 의심할 여지는 없을 터.
그렇다면 필요할 때 손을 잡고 공동의 적과 싸우면 되는 일이지, 불필요한 혹을 주렁주렁 달고 다닐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키우는 맛이 없잖아.’
일레이나는 《영원》의 계보를.
엘레오노라는 현자의 스타일을.
미르엘은 그 본인에게 알려주진 않았지만, 《정의》의 성장 방식을 착실하게 익혀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드래곤, 나탈리는 이미 완성된 경지다.
자신에게 합류한다고 할지라도 그녀들처럼 성장 치의 폭이 크지 않으리라.
물론 데리고 다닌다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이미 파티의 결속력이 단단해진 지금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 군요.’
나탈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이진한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심드렁한 기색에 자신이 억만금을 가져다 바쳐도 그 결정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물론, 그 대쪽같은 감성이 오히려 좋았기에 그녀가 품은 흥미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혹시 아이슬란이 남긴 말은 없어?”
“아, 아이슬란 님은 현자님께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찾으러 떠나셨어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대략적인 견적이 나오면 저에게 연락을 주신대요.”
그러니까 나를 파티에 넣어달라.
최후의 통첩.
하지만 이진한은 씩 웃으며 품 안에 있던 연락용 수정구를 넘겨주었다.
“사용법 알지? 아이슬란이 오면 연락은 부탁한다.”
“…네.”
무참히 침몰한 나탈리였다.
***
파티 합류에 거절당한 나탈리는 원탁 쪽의 동향을 파악해오겠다며 레어를 떠나갔다.
아마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 파티에 합류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이진한의 생각은 이미 굳어진 지 오래.
굳이 그녀를 파티원으로 합류시키는 것보단, 아웃소싱의 개념으로 이렇게 부려 먹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 같았다.
“…왜 그녀를 파티원으로 들이지 않으셨나요?”
“맞습니다. 드래곤이면 도움이 될 텐데.”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괜히 기분이 좋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이진한 역시 그것을 눈치채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가만히 있더니 왜 그래. 영입했으면 좋겠어?”
“아니요. 절대. 저는 딱 이 멤버로 움직이는 게 좋아요.”
이진한 옆에서 누워 허공에 발을 까딱이고 있던 일레이나가 씩 웃으며 말해왔다.
“그러면 대충 이야기는 끝났고, 이제 진짜로 할 일을 해야지.”
“할 일요?”
“영원의 결정. 레어 어딘가에 있는 그걸 찾아야지. 애초에 그것이 목적이었으니.”
사실상 이제 중요도가 떨어져 버린 듯했으나, 여유가 있을 때 모아두면 손해는 아닐 터.
그렇기에 이진한은 레어 곳곳을 돌아다니며 영원의 결정이 있을 법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냥 결정 형태로 있진 않을 거야. 미들턴 때를 생각하면 어디 아티팩트나 구조물에 박혀 있을 가능성이 크겠네.”
엘레오노라의 목걸이, 그리고 아이돈의 스태프.
둘을 생각하자면 제법 설득력이 있는 추리였다.
이윽고 그들은 보물 창고로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
이진한은 내부에 걸려 있는 보안 마법을 가볍게 해제하고는 대현자의 눈으로 천천히 주위를 훑으면서 발을 내디뎠다.
“확실히 드래곤은 드래곤이네요. 제국 비고에서 봤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이에요.”
“그렇지? 나중에 돈이 부족하면 자본으로 끌어다 쓰기에는 딱 좋겠어.”
강탈이 아닌 대출의 개념이다.
물론 언제 갚는다고는 하지 않았다.
[영원의 결정 → 수집률: 2.5%]
[세 번째 조각의 위치가 탐지되었습니다.]
◎ 발타자르의 나이프(에픽)
소유주: 크루시아
“…찾았다.”
대현자의 눈이 반응한 건 보물 창고 한쪽 벽면에 걸려 있던 검은 나이프였다.
나이프 자체에는 별 능력이 없는 예술품. 조각은 그 손잡이 쪽 장식에 박혀 있었다.
파각.
가볍게 땅에 내리침으로 부수자 조각이 떨어져 나왔다.
이전 미들턴에서 아이돈에게 빼앗은 스태프에게 들어 있던 것보다 엄지손가락만큼 더 큰 것으로 손에 닿자 스르르 사라지며 흡수되었다.
[영원의 결정 → 수집률: 6.2%]
“오.”
나름 잭팟이었는지 수집률이 이전보다 두 배는 더 상승했다.
이 정도 되는 수준만 흡수하면 금방 찾을 터.
길드 아레나에 의뢰했고, 드래곤들도 찾아준다고 했으니 지금보단 더 빨리 모을 수 있지 않을까.
‘…지구로 돌아갈 생각은.’
아직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