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37화 (137/210)

◈ 137.

비루한 행색.

어리숙한 움직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거리를 돌아다니며 NPC에게 슬쩍 말을 붙이는 것이 영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운 기억이네.’

아이슬란이 펼친 마법의 영향일까.

이진한은 아직 초보 티를 벗지 못한 ‘월드’의 자신을 바라보며 새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벌써 몇 년 전의 풍경이었다.

익숙하디익숙한 초보자 마을.

그리고 그 한가운데를 헤매는 자신.

가상 현실이라는 것이 모두 신기할 때였기에 게임 공략보다 주위의 모습을 구경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 가운데 옛날의 자신이 어두운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저런 곳이 있었나 싶었지만, 뒤이어 강도로 보이는 이들이 소리를 죽이며 자신의 뒤를 덮쳐 왔다.

위험하다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그저 과거의 기억을 보는 것일 뿐 지금의 자신이 어찌할 수 있겠는가.

‘월드’ 내에서 죽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그저 아픈 경험을 했다며 쓴웃음을….

쉬아아악!

과거의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몸놀림을 보였다.

등과 머리를 향해 쏟아지는 공격들을 가벼운 몸놀림으로 피해냈고, 손에 쥔 짧은 단검으로 강도들의 급소를 찔러 단번에 절명시켰다.

‘…무슨.’

이진한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제자리에서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이런 기억은 없었다. 혹시 고렙 때 초보자 코스프레를 하며 놀았던 건가 싶었지만, 복장에서 묻어 나오는 어설픔은 그때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해치웠어?”

“어. 전부. 설마 이쪽에도 초보자 사냥꾼이 있을 줄이야.”

골목 끄트머리에서 한 여성이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었다.

푸른 머리카락의 여성에 동글동글한 눈망울.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얼굴이었기에 이진한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했다.

같은 고대 영웅 중 한 명인 《창조》 정령사.

‘월드’의 닉네임으론 이리아, 현실의 이름은 진하율.

자신의 전 여자 친구였다.

‘아니, 시팔 이게 뭔?’

둘은 강도들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돈이 될 법한 것들을 챙기더니 이내 어색하게 서로를 어깨를 맞대며 골목길을 떠났다.

이진한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뚝 서서 사라져가는 그들의 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이 처음 진하율과 만난 것은 대충 800레벨 선이 되어 최전선 공략대에 합류했을 무렵이었을 터다.

이런 일은 없었을뿐더러, 풋풋한 기류도 없이 저런 어색한 사이는….

‘잠깐만.’

이진한은 이전까지의 전제를 되살펴 보았다.

단순히 눈을 떴을 때 관에서 일어난 상태였기에 로그인 직후 그 상태 그대로 이 세계에 전이된 줄 알았다.

하지만 게임 캐릭터의 스펙 그대로 이 세계에 온 것이 아니라면?

거적때기 같은 복장과 원래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허접한 무기까지.

작금 상황에 대한 개연성이 조금씩 갖춰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미 한 번 헤어졌다가 다시 함께하게 되었기에 저 사이에 흐르는 어색함 역시 설명할 수 있으리라.

‘운도 지지리 없지.’

다른 이들도 많을 터인데 하필 헤어진 전 여친과 짝이 되어 이 세계에 오다니.

정말 빌어먹을 정도로 운이 나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진한은 황급히 골목을 나서서 저 멀리 떠나간 자신과 진하율을 뒤따라갔다.

아이슬란의 마법으로부터 비롯된 기억의 해금. 천 년 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두두둑─.

하지만 그 직후 하늘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비유나 무언가를 위한 묘사가 아닌 정말로 하늘에 균열이 일어나 조각조각 부서져 내린 것이었다.

공간이 뒤틀리고 의식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감각이 메아리친다. 이윽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을 때는 소파 위에 누워 있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돌아온 건가.”

전신이 식은땀에 흠뻑 젖었다.

아직 눈앞에는 저 옛날의 풍경이 생생히 기억났다. 더 볼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거기서 기억이 끝난 것을 보니 아이슬란이 마법을 거두어들인 듯싶었다.

“후우.”

머리를 쓸어 올리자 땀이 우수수 흘러내린다. 그러자 옆에 있던 크루시아가 황급히 클린 마법을 걸어주며 이물질을 제거해주었다.

“무언가 알아낸 것은?”

“…잠시.”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을 뻗고 있던 아이슬란은 심각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두 눈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보니 분명 무언가를 알아낸 듯싶었다. 이진한이 재촉하는 듯 시선을 보내자 그는 생각을 정리한 듯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아주 강력한 금제가 걸려 있더군. 나조차도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네.”

“강력한 금제가?”

“그렇네. 혹시 자네는 무의식중에 있을 때 무언가 본 것이 있나?”

“…있어. 아주 짤막한 장면이지만, 이 세계에 넘어왔을 당시의 기억을 보았다. 《창조》와 함께였지.”

“그런가. 내 마법이 찰나 동안 금제를 뒤흔든 모양이로군.”

“더 할 순 없는 건가? 조금만 더 하면 뭘 알아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이진한은 작은 희망을 담아 아이슬란을 바라보았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그리웠던 얼굴을 보아 기분이 술렁거렸다.

하다못해 다시 한번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준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런 기대와는 달리 아이슬란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자네 손을 보게.”

“손? …아.”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손만이 아니었다. 마치 강적과 싸우기 위해 악마화를 비롯한 한계 돌파의 스킬들을 사용했을 때와 같이 몸에 막중한 부담이 쌓여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로 거슬러 오르는 것이네. 하물며 그것이 천 년 전의 것이니 자네에게 쌓이는 부담이 가볍지는 않을 터이지.”

“…죽기 직전까지만 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이진한은 인벤토리를 뒤적거렸다.

이런저런 후유증 정도는 어렵지 않게 치료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슬란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나는 괜찮네. 만 년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가는 드래곤에게 있어서 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것은 그리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니. 하지만 자네는 초월지경에 올랐다 할지라도 그 정신의 용적 한계는 인간이네. 반신(半神)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더 하는 것은 무리야. 잘못하다간 정말로 백치가 될 수도 있어.”

“…끙.”

따로 무슨 방법이 없는 것인가.

이진한은 얼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내 여러모로 방법을 갈구해보겠네. 과거의 기록을 살펴본다면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자네 몸에 무리가 없이 기억을 살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

“그런가. 감사를 표하지.”

어찌 되었든 자신을 도와준다고 하니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크루시아. 그를 네 레어로 데려가 쉬게 하려무나. 몸에 막중한 부담이 쌓여 있을 테니 최소 이틀은 푹 쉬게 하는 것이 좋겠군.”

“알겠습니다.”

크루시아는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아이슬란을 바라보았다.

그는 원래 매사에 느긋하고 대화를 즐겨 하는 성격을 지녔다.

그렇기에 조금 더 대화를 나누지 않을까 싶었지만, 단호히 축객령을 내리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베르너의 상태가 좋지 않은 듯싶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다시 올게요, 할아버지!”

크루시아는 그 잠깐 사이 잠에 빠져 들은 이진한을 둘러업고는 자신의 레어로 이동했다.

나탈리 역시 손을 흔들며 그 뒤를 따랐고, 레어는 이내 적막에 잠겼다.

“…음.”

아이슬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에게 말하기를 금제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했지만,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무려 천여 년 만에 한 거짓말.

아이슬란 정도 되는 존재의 말은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격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쉽사리 남을 비방하거나 거짓된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아이슬란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꼰 채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시선은 벽을 고정해 있었지만, 그의 눈은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

금제 쪽의 이야기는 정말이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의 기억을 봉인했으며, 그때의 일을 잊히기를 원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금제나, 금제가 걸린 원인 따위가 아니었다.

그 ‘존재’가 어째서 그러한 짓을 했느냐는 것.

또각또각.

상념에 빠져 있던 아이슬란은 문득 귀를 스치는 날카로운 굽 소리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은.”

저 멀리, 레어의 입구로부터 초대받지 않는 손님이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

“앗, 어, 어어, 어, 언제부터 깨어있으셨어요?”

“…?”

잠에서 깨어난 이진한은 바로 지척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두 눈을 떴다.

“윽.”

몸살이라도 걸린 듯 몸이 무겁기 짝이 없었다.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킨 뒤 목과 어깨를 돌리자 뿌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원한 감각이 몰려들었다.

“아, 모, 목마르시죠. 물 드실래요?”

“고마워.”

침대 옆에 앉아 있던 것은 엘레오노라였다.

이진한은 그녀가 내밀은 컵을 받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시원한 물이 목을 타고 흘러 넘어감에 따라 두루뭉술했던 정신이 각성했다.

“후우.”

【675:14:35】

마지막 기억은 아이슬란의 레어에서 그의 마법으로 자신의 기억을 탐색했던 것이었다.

그 직후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인데 이틀이란 시간이 지나 있었다.

“다른 애들은?”

“아, 일레이나는 연공실에 틀어박혀서 연구 중이고 미르엘은 나탈리 님과 대련하고 있어요.”

자신도 막 수련을 끝내고 씻은 참이라며 엘레오노라는 목에 걸린 수건을 가리켰다.

“불러올까요?”

“됐어. 별일 아니고.”

“별일 아니라니. 기절하신 채 돌아오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엘레오노라는 샐쭉한 표정으로 그를 타박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들었어?”

“네. 크루시아 님께서 말씀해주셨어요. 봉인된 기억을 탐색하려 하시다가 몸에 무리가 가셨다면서요.”

“응. 그때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힘드네.”

이진한은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들이켰다.

가볍게 탐색한 것으로도 이 정도인데 거기서 더 이어나갔더라면 정말로 위험해졌을 것 같았다.

‘아이슬란에게 감사를 해야겠군.’

고룡인 만큼 자기 자신도 파악하지 못한 몸의 부담을 눈치챈 것일 터.

“저기….”

“응? 왜?”

엘레오노라가 머뭇거리며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 표정을 지어왔다.

단숨에 포션을 비워낸 이진한이 빈 병을 내려놓으며 묻자, 그녀는 살짝 망설이면서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이리아라는 분은 누구신가요? 다른 이름도 나온 것 같았는데 그건 알아듣질 못해서.”

“…아.”

그 말과 동시에 또다시 이전의 기억들이 물밀듯 물려왔다.

이틀이나 지났지만, 아직 그 기억의 잔여는 시야 한구석에 남아 그의 가슴을 아련하게 만들어주었다.

“내 동료인 《창조》다. 그녀의 이름이 이리아였지.”

“…《창조》의 정령사, 이리아 님인가요.”

엘레오노라의 반응이 사뭇 이상했다.

이전이었더라면 동경하던 고대 영웅의 이야기에 두 눈을 반짝거리며 달려들었겠지만, 그 표정에는 아직 뭔가를 묻고 싶어 하던 기색이 가득했다.

“무슨 관계냐고?”

“…네. 그냥, 궁금해서요.”

“그냥 평범한 연인 사이였어.”

“평범한, 그렇군요.”

엘레오노라는 조용히 그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뭘 하고 있던 거야? 당황한 목소리였는데.”

“읏, 앗! 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올게요! 베르너 님이 깨어나셨다고!”

살짝 궁금해진 그가 가볍게 질문을 던지자 엘레오노라의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자리를 박차고 떠나갔다.

“…어? 어어. 부탁해.”

이진한으로서는 심히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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