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Lv.6824 「아이슬란」
‘월드’에서도 저 정도 존재는 흔치 않았다.
기세는 고요한 것이 깊은 바다를 보는 것 같았지만, 이진한은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저 정도 존재는 인과에 묶여 있어 마룡이나 이 애송이 드래곤들처럼 활개 치고 다닐 수 없다.
더욱이 수식어가 지혜로운 이라니 경거망동은 하지 않을 터.
“…놀랍군. 정말로 천 년 전과 변함이 없어. 나는 여전히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고 있소.”
아이슬란은 무엇을 말하려 했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지 않는 것인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드래곤은 절대 기억 능력을 지닌 존재.
그렇기에 《지혜》의 검은 현자 이름 역시 기억하고 있다. 단지 입으로 내뱉으면 될 뿐인 일이지만, 어째서인지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나오지 않았다.
“왜 그러지?”
“…부끄러운 말이지만, 당신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소. 나 정도의 존재에게 그러한 제약을 가할 정도면 필시 예사롭지 않은 제약이 걸려 있다는 것인데.”
“이름?”
왜 이름을 내뱉을 수 없다는 것인가.
그 말에 이진한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원래 닉네임은 성기사이즈킹.
베르너로 변경한 것은 마경에서 마룡과 싸우기 직전의 일이었다.
만일 자신이 정말로 천 년 전에 이곳에 와서 악신을 쓰러뜨린 것이라면 아이슬란은 그때의 닉네임을 알고 있다는 것일 터.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이진한은 황급히 고뇌하는 아이슬란에게 말했다.
“내 이름은 베르너다!”
“…베르너. 확실히 그 울림은 당신의 영혼과 닮아있소. 하지만 예전엔 그 이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이름은 버렸다. 애초에 이방인으로서 이곳에 머무를 때 사용하던 거짓된 이름이었으니.”
“그렇군. 당신들은 다른 세계에서 왔었지.”
“…다른 세계?”
그 말에 흥미를 드러낸 것은 지금껏 잠자코 있던 크루시아였다.
영웅과 고룡, 과거 악신을 쓰러뜨리는데 함께 손을 잡았던 신화의 재회였다.
선망 어린 시선으로 둘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서도 쉽사리 지나칠 수 없는 요소. 아이슬란은 그런 크루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나, 나를 비롯한 당시의 고룡들은 영웅들에게 직접 들었지. 자신들이 원래 이곳 아르테니아의 주민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세계에서 왔음을.”
그 말에 이진한은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렇다는 건 정말로 천 년 전에 자신들이 모종의 이유로 ‘월드’에서 그 형태와 똑 닮은 이 세계에 왔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그때의 기억이 없다. 눈을 뜨니 내 탑의 안이었어. 마지막 기억은 원래 세계에서 눈을 감았고, 일어나니 이쪽이었다는 것이다.”
게임의 안인 줄 알았던 세계가 현실이 되었다.
이보다 더 황당한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
“놀랍기 짝이 없군. 어느 순간 영웅들은 모두 자취를 감췄지. 우리는 그들이 원래 세계로 돌아갔으리라 생각했거늘.”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이슬란이 고개를 들어 그 황금색 눈동자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혹시 당신 혼자 남기로 한 것이 아니오?”
“나 혼자?”
“그렇소. 후세를 위해. 악신과 같이 이 세계를 위협할 미증유의 위기가 올 것을 위한 안배. 영웅 중에 당신이 홀로 남아 그것을 대비한 것이라면….”
내가 미쳤나.
이진한은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오려던 욕지거리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자신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위해 천 년 동안 관에서 썩어가며 버티는 고생을 굳이 자처할 위인이 아니었다.
동료 중 「안식」이나 「정의」 같이 착해 빠진 녀석들이라면 모를까, 악신을 쓰러뜨린 후 어느 정도 이 세계에서 즐기다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을 했으리라.
“후세를 위한 안배….”
나탈리는 숨길 수 없는 선망이 서린 눈빛으로 이진한을 바라봐왔다.
“…당신 정도의 존재라면 스스로 시간을 봉인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오. 필시 어떤 식으로든 그 업보를 감당해야 할 터인데.”
황금빛 광망에 번뜩이는 이지가 스쳤다.
과연 고룡이라 그런 것인지 지식의 수준이 터무니없다.
이때까지의 말을 곱씹으며 한숨을 내쉬던 이진한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맞아. 업보가 작지 않지. 지금도 그것을 감당하고 있다.”
“혹시 본인이 도울 것이 있소? 우리 일족에게 있어 영웅은 구세의 구원자. 무엇을 원하든 성심껏 돕겠소.”
가장 필요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고룡의 드래곤 하트였다.
벨라시온이나 이 풋내기 드래곤들의 것과 달리 고룡의 심장은 부르는 것이 값인 보물.
아마 서버 최강급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이진한은 잠깐 욕심이 생겼으나, 그런 것 하나 때문에 드래곤과 척질 수는 없었기에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영원의 결정이란 게 필요하다.”
이진한은 차선을 택했다.
‘월드’에서는 없었던 신묘한 기운이 서린 보랏빛 보석을 설명하며 혹시 그것을 구할 수 있을지 그들에게 물었다.
“크루시아의 레어를 찾은 것도 이곳에 결정이 있다는 걸 탐지했기 때문이지.”
“…제 레어에 말입니까?”
“그래. 원래 목적은 결정을 얻는 거였는데 생각 이상으로 일이 꼬여버렸네.”
설마 광산 안에 레어가 있고, 리베라 제국을 비롯한 제국과 여러 왕국이 그것을 두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고 있는 것도 예상치 못했다.
“영원의 결정이라. 본인도 처음 듣는 것이로군.”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나도 이 몇 달 동안 두 조각밖에 찾지 못했으니.”
쉽게 찾을 수 있다면 아레나 정보 길드 쪽에 의뢰해 수색했을 터다. 하지만 황실의 보물, 마왕 숭배 교단의 교주가 지닌 스태프, 드래곤 레어에 있는 것을 어떻게 찾아내는가.
“그리고 또 하나. 방금 떠 오른 것인데.”
“무엇이오.”
이진한은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사라진 기억을 되살릴 방법이 없을까.”
천 년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자신을 비롯해 다른 유저들이 이 세계에 넘어온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고, 그 결말은 어떻게 되었는지.
자신은 어째서 홀로 마탑에 봉인되어 있던 것인지 심히 궁금할 따름이었다.
“…여기를 나서면 다른 이들의 자취가 끊긴 곳을 조사해봐야겠군. 나처럼 봉인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
“그건 이쪽에서도 한 번 알아보겠소. 대륙 각지에 퍼져 있는 가디언들을 움직이면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터지. …그리고 기억이라.”
아이슬란은 잠시간 턱을 괸 채 오른손으로 허공을 주물렀다.
몇 가지 술식이 그 위로 떠 오른다. 대현자의 눈으로도 알아볼 수 없는, 아마 더 고대의 것일 보이는 마법들로 대부분 저주의 해금과 관련된 것으로 보였다.
“원래의 이름을 지우고 기억을 없앨 정도라면 아주 강력한 봉인이었겠지. 당시 영웅들의 힘은 드래곤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었소. 그러니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겠지.”
이윽고 오망성의 술식이 손 위로 떠 올랐다.
아이슬란은 해도 괜찮겠냐는 듯 시선을 보냈고, 잠시 고민하던 이진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죽기야 하겠냐.’
어지간한 상처는 회복할 수 있으니 문제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힘을 풀자, 아이슬란은 신중한 기색을 보이며 이진한의 머리로 손을 얹었다.
“잘못하다간 정신이 파괴되어 백치가 될 수 있네만, 당신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지.”
“…뭐?”
그런 위험이 있으면 먼저 말해줘야 할 것이 아닌가.
드래곤이, 그것도 고룡이 펼치는 마법이었기에 철석같이 믿은 이진한은 배신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지만, 그 직후 닥쳐온 미친 듯한 고통에 참을 수 없는 신음을 토해냈다.
“끄윽, 끄으으으으아!”
“…아이슬란 님. 이거 괜찮은 겁니까? 감전당한 것처럼 경련하고 있는데요.”
전신을 비틀며 몸부림을 치는 그 모습에 크루시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당연한 일이다. 전격 마법을 머리에 직접 퍼부었으니 아무리 그라 할지라도 버텨내겠느냐.”
“예?”
무려 고룡이 직접 몸에 대고 펼치는 마법이다. 아무리 이진한이 초월지경에 올라 막대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아무런 방어 수단 없이 견뎌내기는 힘든 일이었다.
“내 예상으로는 이건 정신 깊숙이 걸려 있는 봉인과 금제다. 자아가 깨어 있는 동안은 접근조차 하지 못하겠지. 뭐, 그리 걱정하지 말아라. 내 소싯적 악마 숭배자들을 상대하며 숱하게 해보았으니.”
“…그 숭배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정신이 파괴되어 백치가 될 수도 있다고. 열에 아홉은 전부 백치가 되었느니라.”
“그럼 한 명은….”
“죽었지.”
크루시아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그는 검은 현자를 죽이기라도 하려는 것인가.
‘혹시 예전에 뭔가 쌓인 원한이 있으셨나.’
드래곤은 절대 기억 능력을 지닌 만큼 은혜도 원한도 절대 잊지 않는다. 천 년 전이면 드래곤에게 있어서도 긴 세월이었지만, 쌓인 원한이 식을 정도는 아닐 터.
“뭐, 걱정하지 말거라. 그 영웅이다. 악신의 공격도 버텨내었던 몸인데 정신이 그리 나약하겠느냐.”
그저 주위나 잘 지키라는 말을 끝으로 아이슬란은 두 눈을 감았다.
슈우우욱!
정신에 걸린 금제를 해제하기 위해선 그가 직접 기억을 거슬러 올라 금제와 관련된 트리거를 촉발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건 직전의 기억인가.”
익숙한 레어의 안.
자신이 발버둥 치는 베르너의 머리를 붙잡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슬란은 잠시간 그 모습을 지켜보다 천천히 시간을 조작했고, 모든 풍경이 점차 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레어를 떠나 크루시아의 레어로 되돌아가며 그의 동료로 보이는 세 명의 여인이 추가로 등장했다.
하나 같이 경국지색의 미녀들.
어딜 가서 흔히 볼 수 있는 외모는 아니었기에 아이슬란은 깊은 흥미를 보였다.
“과연. 영웅은 호색이라 했지.”
태엽이 더 감긴다. 크루시아와의 대화가 역순으로 재생되며 그와 싸우던 광경까지 갔고, 레어를 털기 위해 이곳까지 닥쳐온 리베라 제국의 원정대와 격돌하는 상황이 나왔다.
“흠.”
아이슬란은 멈추지 않고 그것을 끊임없이 역재생시켰다.
이야기로 들었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직접 살피는 것은 흥미롭기 짝이 없다.
중간중간 악마 맥스웰이나 메피스토같이 쉬이 흘려넘길 수 없는 존재와의 조우, 베르하임 왕국 밑에 있는 보관소, 북쪽 숲의 마녀와 같이 아이슬란조차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이 어찌나 찬란한 여정인지.
과거의 업적을 떼어 놓더라도 영웅 혹은 용사라 불리기에 충분하기 짝이 없었다.
“…크흠.”
물론 중간중간 나오는 남사스러운 장면들은 예의상 슬쩍 시선을 피해주었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그것이 끝에 다다랐다.
근원의 마탑.
검은 현자의 계승자들이 세웠다는 봉인된 성지였다.
“…과연. 그녀와는 저렇게 만난 것인가.”
이윽고 엘레오노라 황녀와 그 기사가 마탑을 떠나고 베르너의 몸이 다시 관에 누워 뚜껑이 닫혔을 때.
“…!”
아이슬란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