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아니, 이분은….”
크루시아는 황급히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무리 미운 혈족이라 할지라도 같은 드래곤. 그러니 그녀가 얻어맞는 걸 보는 것은 저어됐으니 오해를 풀고자 했다.
“무례하군. 너는 자신보다 약자에게 예의를 차리는가?”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진한이 툭 내뱉은 말에 한숨을 내쉬며 슬쩍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하?”
나탈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와 반대로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히는 것이 꼭 재미있는 표적을 발견했을 때와 같았기에 크루시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이건 못 말리겠군.’
《지혜》의 검은 현자.
평소엔 힘을 감추고 있는지 드러난 기세는 그리 강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직접 싸워보니 그 강함은 규격을 벗어난 것.
파악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준으로는 그 역량을 가늠하지 못한 것이었다.
과거의 전생은 둘째치더라도 마룡 벨라시온이 그와 싸워 목숨을 잃었으니 적어도 2천 살 이상의 성룡과 맞먹는 강함을 자랑한다는 이야기였다.
“재미있는 말장난이네. 하지만 드래곤을 우롱한 대가는 그리 작지 않아.”
“…응?”
도중 크루시아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검은 현자 본인인 것은 몰라도 마룡 벨라시온을 쓰러뜨렸다는 이야기는 들었을 터.
설마 그걸 무언가의 요행으로 해낸 일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어림없는 소리.’
나탈리는 멍청했지만, 미련하지는 않았다.
벨라시온이 마룡이라 불리며 기행을 일삼긴 했으나, 그 강함은 진짜.
적어도 자신이나 그녀보다는 강한 힘을 지녔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어째서 도발을 이어가는가.
‘설마.’
크루시아는 짤막한 웃음을 토해냈다.
벽에 기대어 놓았던 창을 집어 드는 나탈리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진한 호승심.
매번 마룡의 행동거지에 대해서 투덜거리던 그녀였으니 벨라시온을 쓰러뜨리고 드래곤 슬레이어의 위명을 손에 넣은 그의 강함을 시험해보고 싶은 것이리라.
쉬이익!
창끝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찔러져 왔다.
남부 지역에서는 「나찰」의 나탈리라 불릴 만큼 쾌속하고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경지는, 그랜드 스피어 마스터인가.’
대현자의 눈이 순식간에 그 수준을 파악해냈다.
과연 드래곤임을 증명하듯 고작 천 살이 조금 넘은 성룡일 뿐인데 그 무술의 경지가 극에 다다라 있었다.
대현자 클래스 전용 스킬 「무신(武神)」
[클래스 변환]
「대현자」 → 「그랜드 스피어 마스터」
인벤토리에서 빠져나온 용아청성창이 손아귀에 쥐어진다. 「무신」의 영향으로 스피어 마스터의 경지는 순식간에 진일보했고, 이전에 겪어 보았던 익숙한 감각이 몸을 휘감았다.
쉬시시식-!
찔러 들어온 나탈리의 창끝이 무수히 분열하며 사각을 지워갔다.
이진한은 그 전부를 직시했고, 가볍게 상체를 비트는 것으로 모든 공격을 피해냈다.
“이것 봐라?”
나탈리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짙어졌다.
동시에 창끝의 기세가 변모한다. 과연 이것도 막아낼 수 있는지 보자는 모습이었지만, 이진한은 더 이상의 오만을 좌시하지 않았다.
휘리릭.
용아청성창의 푸른 창대가 나탈리의 창끝을 휘감았다. 그녀는 허튼짓이라는 듯 조소를 흘리며 제 창을 잡아당겼지만, 이진한은 그것을 순순히 놓아줄 기세가 아니었다.
“어엇?!”
“경지는 높은데, 실속이 없군.”
드래곤은 별다른 노력하지 않아도 원하는 분야의 정점에 도달할 힘을 지녔다.
그렇기에 그들은 쉽사리 얻을 수 있는 무술을 경시하는 영향이 짙었다. 물론 모든 드래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앞의 드래곤은 확실해 보였다.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의 결여는 치명적인 요소로 닥쳐오지. 너는 드래곤으로서 강할지는 모르겠지만, 무술 자체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초월자들보다 못하다.”
시간이 지나 몇천 년의 세월이 쌓이면 그러한 공백도 없을 정도로 강해지겠지만, 이제 막 성룡이 된 시점의 애송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팅, 탱탱!
두 자루의 창끝이 허공에서 치열하게 서로를 물어뜯는다. 기술과 기술의 얽힘.
얼핏 보면 백중지세를 이루고 있는 듯했으나, 나탈리 쪽은 예상치 못한 상대의 기세에 허를 찔려 크게 당황한 상태였다.
“기술은 정교하고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다. 완벽하게 이해하고 펼치는 듯싶으나, 그것뿐. 네게는 진심이 없다.”
“보자 보자 하니까…!”
연이은 혹평에 나탈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진한은 네까짓 게 화내면 어찌할 것이냐는 얼굴로 입가를 비틀었다.
“최소한 마경에서 나와 싸웠던 마룡은 날 죽이고자 하는 마음은 진심이었지. 강함을 자랑할 상대를 잘못 골랐다, 애송이 드래곤.”
캉!
이진한이 손목을 꺾자 나탈리의 창이 주인의 손아귀를 찢고 튕겨 나가 허공에 떠 올랐다.
“감히…!”
창술로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나탈리는 강한 마력을 발산했다.
드래곤인 본체로 돌아가 압도적인 힘으로 그를 깔아뭉갤 심산이었지만, 그것을 순순히 두고 볼 정도로 이진한은 무른 성격이 아니었다.
툭.
가볍게 땅을 박차는 것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이진한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흡!”
지척까지 이른 그의 모습에 나탈리는 황급히 자신의 앞으로 강력한 베리어를 만들어냈다.
아무리 그라 할지라도 단숨에 그것을 파괴하지 못하리라 생각한 것이었지만, 이진한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말했잖아.”
콰직-!
눈 깜짝할 사이에 휘둘러진 주먹이 베리어를 단숨에 산산 조각낸다. 자신이 전력을 다해 만들어낸 마법이 무참히 박살 나자 나탈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쉬아아악!
이진한의 주먹이 나탈리의 안면을 강타했다.
***
“쯧쯧, 그러니까 내가 그 성질머리 좀 고치라고 누누이 이야기했잖아.”
“…시끄러워.”
나탈리는 얼음주머니로 새빨갛게 부어오른 코를 문지르며 입술을 삐죽였다.
검은 현자의 계승자가 아니라 그 본인이었더라면 이렇게 함부로 덤비지 않았을 텐데.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말려주지 않은 크루시아가 얄미워지는 그녀였다.
“….”
나탈리는 슬쩍 고개를 들어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고대 영웅 중 한 명인 《지혜》의 검은 현자라니.
인간이 어찌 천여 년의 세월 동안 살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부터 그간 들려온 말도 안 되는 행적에 대한 이해까지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휘몰아쳤다.
아무리 드래곤일지라도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법.
그렇기에 그녀가 끙끙거리며 일련의 상황을 정리하던 중, 크루시아가 따라준 차를 마시던 이진한이 입을 열었다.
“나탈리라고 했나.”
“네, 넷! 레드 드래곤 나탈리라고 합니다! 크루시아하고는 50년 차이의 누나입니다!”
“드래곤끼리 누나 동생 관계가 어딨어. 그냥 같은 혈족인 거지.”
크루시아가 그 말에 팍 인상을 쓰며 반론했다.
하지만 나탈리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여전히 코를 문지르며 동생을 바라보았다.
“50년의 세월을 무시할 참이야? 인간으로 따지자면 한 생명이 나고 지는 긴 시간인데.”
“우린 드래곤이잖아.”
“어허, 또 누나한테 말대꾸야.”
“…말이 안 통하네.”
크루시아는 나탈리의 옆에 털썩 앉으며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워낙 안하무인에 고집불통인지라 성격이 이렇습니다. 그저 현자님께 죄송할 따름입니다.”
조금 전의 무례를 말한 것이었다.
그런 것 치고는 자신은 모른다는 듯 한쪽에 빠져 있었던 크루시아였지만, 이진한은 너그럽게 마음을 베풀어 그것은 꼬집어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아까 원탁이 뭐라고 했지?”
“아. 원탁은 영웅분들의 유지를 받들어서 생겨난 조직이에요. 처음엔 어디 국가나 조직의 입김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다가 어느새 대륙 최강자들 모임으로 변질됐죠. 사실 이게 맞지 않나 싶어요. 유지를 받들려면 힘이 있어야 하니까.”
나탈리 본인도 영웅을 동경해 그 안에 들어갔노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 회담에서 현자님 이야기가 나왔어요. 아, 저들은 당연히 계승자라고 알고 있어요. 처음엔 원탁에 영입할 후보로 주제를 꺼낸 건 줄 알았는데….”
“알았는데?”
“원탁의 일 좌를 차지하고 있는 검성을 대신해 그 제자인 다리우스가 모습을 드러내더군요.”
패력의 다리우스.
명실상부한 검성의 후계자로 그 강함은 동 나이대 검성을 뛰어넘었다고 알려진 강자.
그런 그가 검성의 명을 받아 원탁을 소집했고, 검은 현자의 계승자인 이진한을 원탁의 일원으로 영입하고자 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네.”
명백히 속셈이 뻔히 보이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원탁이란 설정은 ‘월드’에서는 없던 것. 그러니 이 세계 고유의 조직으로 생각해도 될 듯싶었다.
“속셈이 훤하죠. 솔직히 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어서 흔쾌히 응했어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고. 검성 그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직접 움직이는 일은 드물었으니까요.”
살아온 연도로 따지자면 검성보다 나탈리가 몇 배는 더 오래 살았지만, 이진한은 그런 시시콜콜한 점은 따지지 않았다.
“날 노리는 건가.”
“그런 거죠. 소탈한 척, 깨달은 척해도 그런 부류는 본질적으로 욕심이 많고 허영심이 가득해요. 제자인 검호가 죽고 그리 망신을 당했는데 당장이라도 현자님 사지를 찢어, 큼. 복수하고 싶겠죠.”
아마 조만간 접촉해오지 않을까 예상한다며 나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성이라.”
이진한은 뺨을 긁적였다.
작금 대륙의 최강자를 따지자면 아마 그라 할 수 있으리라.
리베라 제국 역시 초월지경에 오른 강자들이 많긴 했지만, 정상으로 우뚝 선 이는 없다. 반면에 오스칼 제국 측은 검성이란 이름이 휘어잡고 있으니 그 수준의 차이는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적어도 그 제자인 검호보다는 몇 배 더 강할 테지.’
초월지경 안에도 저마다 경지가 있다.
물론 구체적으로 세분된 것은 아니지만, 초입과 완숙의 차이는 하늘과 땅에 이를 터. 자신이 이전에 닥쳐온 마인들을 손쉽게 격살한 것을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검성 본인의 강함에 더해 마왕 같은 존재와 손을 잡았다면, 조금 끔찍해지는데.”
“예? 마왕? 검성이 왜 마왕과 손을 잡습니까?”
나탈리는 전혀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반해 이진한으로부터 어느 정도 이야기를 전해 들은 크루시아가 그녀에게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오스칼 황실 뒤에 마족이 암약하고 있다고?”
“그래. 실제로 죽었다고 알려진 황녀가 현자님과 함께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게 사실이면….”
“무시할 수 없는 일이지.”
동대륙의 패자인 오스칼 제국이 마족의 손아귀에 넘어갔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파국이 생길 터. 최악의 상황에는 큰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 건에 대해서는 자세히 이야기를 듣고 싶소.”
“….”
느긋이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이진한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슬쩍 소파 뒤로 고개를 돌리자, 저 끝으로부터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노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기척은 느끼지 못했는데.’
과연 고룡이라는 것인가.
두 눈으로 직시하고 있음에도 그 강함을 어림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오랜만이오, 영웅이여. 천년의 세월은 인간에게 있어서 긴 시간이었을 테지만, 이쪽의 이름은 잊지 않았을 터이지. 그래도 재회를 맞이해 다시 한번 소개하자면….”
노인은 눌러쓴 중절모를 벗고 새하얗게 물든 머리로 이진한 앞에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골드 일족의 아이슬란이라 하오.”
Lv.6824 「아이슬란」
가히 세계관 최강자라 할 수 있는 존재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