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34화 (134/210)

◈ 134.

“기록이라.”

크루시아는 뺨을 긁적였다.

“드래곤은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기억 속에 보존하죠.”

절대 기억.

드래곤이 가진 축복이자 저주, 그들은 허락된 일만 년의 삶이 끝날 때까지 망각의 은혜가 작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깊은 수마에 빠지는 일이 잦았고, 일부는 스스로 기억을 봉인해 시간에 짓눌리는 일을 피했다.

“헌데 어째서 그때의 일을 찾으시는 겁니까?”

크루시아는 그것이 못내 궁금했다.

정말로 눈앞의 남자가 검은 현자 본인이라면 굳이 기록을 찾을 필요 없이 자신의 기억을 되뇌면 되는 일 아닌가.

그 물음에 이진한은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제 미간을 툭툭 건드렸다.

“기억이 없다.”

“…예?”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깨어 있던 게 아니거든.”

근원의 마탑에서 깨어난 직후 있었던 일들을 간략히 설명했다.

물론 게임이나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를 뺀 담백한 여정에 관해서였다.

마족과 결탁한 제국 황실, 마경의 도시를 습격한 마룡….

“흐음.”

이제 막 유희 생활을 즐기려던 크루시아에게도 제법 흥미가 동하는 이야기였다.

더욱이 동족인 마룡은 둘째치고 암암리에 움직이는 마계 교단이나 악마 같은 이야기는 드래곤으로서도 좌시할 수 문제.

쉬이 생각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제 선에서 판단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이진한은 당연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이라곤 하지만, 갓 성룡이 된 그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러니 다른 드래곤과의 연결 창구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다른 드래곤과 만날 수 있나? 적어도 삼천 년 이상 살아온 존재면 좋겠는데.”

“글쎄요. 아직 회합 시기는 멀었고, 대다수가 주무시고 계시는 시기라.”

잠시간 곰곰이 인원을 헤아리던 크루시아는 문득 누군가를 떠올렸는지 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분 계십니다. 「지혜로운 아이슬란」이라 불리는 드래곤이십니다.”

“지혜로운 아이슬란.”

“6천 살이 넘으신 고룡이십니다. 천 년 전 악신과 싸울 당시에도 최전선에 있으셨던 분이니 당시 이야기를 자세히 들으실 수 있겠죠.”

“좋아. 그분께 연락 부탁한다.”

“예.”

“…그 전에.”

이진한은 붙잡은 인간들을 처리할 생각이었다.

전부 죽여 입을 막는 것이 깔끔하나, 리베라 제국 측이 얽힌 이상 어떤 식으로든 추가 조사가 나올 가능성이 컸다.

용병들은 적당한 재화를 손에 쥐여 주고 기억을 조작해서 밖으로 내보낸 뒤, 그는 철저하게 속박당해 있는 리베라 제국 측 인원과 마주했다.

“너희는 누굴 섬기지?”

“…저희는 오로지 황제 폐하만을 따릅니다.”

제국 마탑 제3각 황실 마도사인 월트만 슈헤너가 초췌한 표정으로 말했다.

레이넬 저거먼트는 아직 얻어맞은 부상에서 전부 회복하지 못한 것인지 힘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동조해올 뿐이었다.

“그러면 이곳의 공략도 황제가 명령한 것인가.”

“…아무리 현자의 계승자라 할지라도 폐하를 허물없이 부르는 것은.”

월트만이 살짝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옆에 있던 크루시아가 두 눈을 부라렸다.

그들은 드래곤의 레어를 무단으로 들어온 침입자다. 당장 목숨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처지에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지 보자는 분위기였다.

툭.

옆에 있던 레이넬이 월트만의 어깨를 툭 쳤다.

당장 드래곤의 분노가 자신들뿐만 아니라 제국에까지 돌아갈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겠는가. 그러니 그런 것은 그냥 넘어가자는 신호였다.

“…폐하께서는 이런 일 하나하나에 관심을 쏟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제국을 위해 움직인 것입니다.”

“표면상으로는 그러겠지. 하지만 지금 제국의 권력 구도는 삼파전으로 예민한 상태였었나. 드래곤의 레어를 공략했다는 전공을 가져가면 여러 곳에서 너희들을 크게 반길 텐데.”

당연한 이야기였다.

작은 사건 하나만으로 여론이 휙휙 바뀔 상황에서 드래곤 레어를 공략했다는 전공이 퍼진다면 큰 명성을 얻을 터.

각 진영에서 기를 쓰고 그들을 영입하려 들 것이 틀림없었다.

“…계승자께서는 3황자 전하와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월트만 마도사?”

“레이넬 경. 우리도 슬슬 거취를 정해야 할 시기가 아니오. 잘 생각해보시오. 어떤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셔야 제국이 강성해질지.”

“으음….”

레이넬 저거먼트는 침음성을 흘리며 입을 닫았다.

‘딱히 3황자 편을 들라는 건 아니었는데.’

이진한으로서는 그냥 알아서 처신 잘하라고 경고한 것인데 3황자의 편이 든 상황이 되었다.

하나 더 알 수 있었던 것은 3황자 측의 여론이었다. 월트만이나 레이넬 역시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니 개인적인 능력과 인품 면에서는 3황자가 차기 황제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것일 터.

세력 싸움이 치열한 와중 이곳에서 던진 조약돌이 큰 여파를 몰고 올 수도 있을 듯했다.

“누구에게서 들었지? 내가 3황자 측과 인연이 있다는 것을.”

“호베르투 마탑주가 제게 손을 잡자고 은밀히 이야기해올 때 함께 들었습니다.”

“마탑주가.”

이진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주까지 나선 일이라면 그가 도와주어도 괜찮은 것일 터.

“모쪼록 현명한 선택 기대하지.”

그의 말에 월트만과 레이넬은 서로 시선을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돌아가는 즉시 3황자 전하를 지지하겠습니다.”

“저도 함께하지요.”

“다행이로군. 더 시체를 치울 필요는 없게 되었으니.”

씩 웃으며 내뱉어진 말에 둘의 몸이 흠칫 떨렸다.

여기서 조금 더 생각해보겠다거나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으면 닥쳐왔을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진 것이었다.

“드래곤과의 이야기는 끝났다. 너희는 무사히 풀려날 것이고, 그래. 적당한 재화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들고 돌아가. 이 정도라면 드래곤 레어를 공략한 보상으로 부족하진 않겠지.”

이진한은 크루시아에게 눈짓했다.

“…?”

그는 자신에게 향해진 시선에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그 적당한 재화라는 것도 자신이 주어야 할까.

‘그럼 내가 주리?’

하지만 이진한이 눈을 부라리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공간을 열고는 대충 막대한 재화를 그들 앞에 우수수 쏟아내었다.

“…하루 준다. 다 챙겨서 떠나라.”

“예, 예!”

크루시아는 이진한에게 얻어맞았을 때보다 더 가슴이 쓰라렸다.

***

리베라 제국 원정대가 막대한 재화를 챙겨 들뜬 분위기로 레어를 나섰다.

적지 않은 희생이 있긴 했지만, 얻은 것을 생각하자면 압도적으로 이득일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크루시아는 잠시간 축 늘어진 기색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쪽에서 대답이 왔습니다. 먼저 가서 기다리라는군요.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가겠답니다.”

“그런가.”

「지혜로운 아이슬란」쪽에서 답신이 돌아오자 이진한은 일행을 바라보았다.

고룡의 강함은 자신이 판단할 수 있는 기준선을 벗어났다. 오히려 그렇기에 여러 제약을 안고 있어 마룡이나 크루시아처럼 섣불리 싸움을 걸어오지 못하겠지만, 혹시나 하는 경우를 대비해 혼자만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다들 잘 먹고 잘 쉬고 있어.”

“알겠어요. 아쉽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어쩔 수 없죠.”

일레이나는 하나도 아쉽지 않은 표정으로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피부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하얗고 반질반질해진 것은 기분 탓은 아닐 터.

그 증거로 엘레오노라와 미르엘 역시 이전보다 더 화사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

“…내 영약.”

“어차피 너한테 쓸모없는 거잖아.”

이진한은 크루시아의 창고를 모두 털었다.

어차피 돈이야 넘쳐나니 그것들은 잠시 이곳에 보관한다는 생각으로 내버려 두었고, 영약이나 희귀 원석들에 집중했다.

이제 막 쑥쑥 성장하기 시작한 일행에게 그 막대한 영약은 좋은 영양제가 될 것이다. 레어 답게 연무장도 있고 시설도 좋으니 며칠 정도는 머물러도 문제없어 보였다.

‘희귀 광물도 싹쓸이했으니까.’

크루시아가 모은 것이라면 죄책감이 조금 들었겠지만, 그 역시 물려받은 것이라니 망설임 없이 전부 인벤토리에 쓸어 담았다.

이 정도라면 새로운 검을 만들 수 있을 터.

“나중에 형이 더 좋은 거로 갚아줄게.”

“…더 좋은 거로 말입니까.”

그는 솔깃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진한은 이미 새로이 만들 검을 구상하느라 가볍게 흘려넘기며 입맛을 다셨다.

현재 사용할 수 있는 검은 몇 자루씩이나 있었다.

마검 그라나다, 신도 무라마사, 그리고 용살검과 일반 상태에서 사용하는 무난한 검까지.

듀란달은 여전히 고치지 못한 상태다. 그건 유리아 쪽을 통해 성국과 연락을 취했으니 조만간 답변이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일단 새로운 검은 이다음에 생각하고.”

“예.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이진한의 시선을 받은 크루시아는 곧장 장거리용 텔레포트 마법의 술식을 구축했다.

인간은 불가능하지만, 용언 마법을 사용하는 드래곤들에게는 손쉬운 일.

이진한은 그 틈을 노려 대현자의 눈으로 그 술식을 해석하려 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단시간에 용언 마법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웠다.

슈우욱─.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할 때와 같은 익숙한 감각. 빛이 사라지고 재정립되는 세상 너머로 펼쳐진 공간은 이전과 다른 풍경을 띄고 있었다.

“어? 크루시아?”

아이슬란의 레어 안쪽, 선객이 있었다.

주황색 머리의 활발한 분위기를 가진 여인으로 그들이 텔레포트를 끝내고 모습을 드러내자 살짝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보내왔다.

“…나탈리. 네가 어째서 여기 있지? 분명 유희 중이었을 텐데.”

크루시아의 얼굴이 낭패로 물들었다.

그조차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는 듯 황급히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이진한의 몸을 가렸다.

“네가, 라니. 언니라고 불러야지. 그리고 유희 중인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내 쪽은 잠시 용무가 있어서 들렸을 뿐이야.”

그녀의 시선이 슬쩍 크루시아 뒤편으로 향했다.

“…블랙 일족? 아니, 내 기억에 없는 얼굴인데. 설마 새로 태어난 헤츨링?”

“아, 이쪽은 검은 현….”

크루시아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이진한을 소개하려 했다.

하지만 그 말이 이어지기보다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탈리가 그들의 코앞까지 닥쳐왔다.

“아! 검은 현자의 계승자! 나도 알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이진한의 곳곳을 자세히 훑어본다. 크루시아는 사색이 된 표정으로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이진한은 괜찮다는 듯 시선을 보내며 피식 웃었다.

“베르너다.”

“헤에. 재밌는 손님을 데려왔네. 그렇지 않아도 원탁에서 나온 이야기 때문에 여기에 온 거거든.”

“원탁?”

“어머, 영웅의 계승자면서 그것도 몰라? 인간계 최강자 연합. 워낙 폐쇄적인 조직이라 들어가는 데 꽤 고생했어. 1대에 거쳐 2대를 계승해서 겨우 들어갔으니까. 그런데….”

이진한을 바라보는 나탈리의 두 눈이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한낱 인간 주제에 위대한 존재를 보고 예의를 취하지 않는 건가. 동생의 손님이라 너그럽게 봐주려 했지만, 도를 넘어서네. 고대 영웅의 계승자라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