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
크루시아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질 않았다.
자신은 그저 성룡이 된 기념으로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유희 생활을 하러 인간 세상으로 나갔을 뿐이었다.
인간 따위는 드래곤보다 하등한 종족으로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구축한 문화와 삶은 천년 가까이 레어에 갇혀 살았던 크루시아에게 있어 정말로 눈부시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천천히 그리고 느긋이 그것들을 즐기고자 몇십 년 동안 용병의 몸으로 대륙을 주유했고, 마침내 어느 한 가문의 막내아들로 슬쩍 들어가 두근두근 첫 유희 생활을 시작하려던 찰나.
레어를 지키고 있던 가디언들이 알려온 다급한 소식은 정말로 예상 밖의 것이었다.
‘감히 인간들이 내 레어에 들어와?’
머리에 열이 뻗쳤지만, 이곳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제법 흥미로운 전개였다.
자신의 레어에 침입한 인간들을 맞이하는 위대한 종족. 이것 역시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상황이 아닌가.
그들이 고분고분하게 자신에게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린다면 대충 절반 정도만 죽이고 재화를 손에 쥐여준 다음 풀어주리라.
그리한다면 인간 세상에서 자신의 너그러운 관용과 위대함이 널리 퍼지며 찬양받을 터.
실제로 중간까지는 예상대로 흘러갔다.
크루시아는 무릎을 꿇으며 잘못을 뉘우치는 이들을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기에 계획대로 절반만 죽이고 재화를 준 뒤 돌려보내려 했지만, 거나하게 뒤통수를 맞으리라는 것은 상정조차 하지 않은 일이었다.
-전부 쳐 죽여주겠다!
크루시아는 분노했다.
감히 인간 따위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그는 유희 생활을 하며 모든 인간이 자신의 생각처럼 하등한 종족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 있는 놈들은 죽어 마땅했다.
인간 중에 초월지경에 들어 종의 한계를 벗어난 강자가 있었지만, 태생부터가 절대자의 종족인 자신이 질 리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상황은 대체 무엇일까.
-…놈!
머리를 얻어맞아 잠시간 정신이 혼미해졌던 크루시아는 두 눈이 새빨간 광망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인간 주제에 감히 위대한 종족인 드래곤을 공격하다니. 그 불경한 죄 사지를 찢어 단죄해야 함이 마땅했다.
쿵.
하지만 이번엔 발바닥에 밟혀 바닥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컥!
“잠깐만 있어봐라. 저쪽만 정리하고 상대해줄 테니까.”
딱!
이진한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허망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인원 대다수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광범위 수면 마법의 발동.
대마도사 경지에 이른 그의 마법을 견뎌낼 저항력을 지닌 존재는 마스터 나이트 레이넬 저거먼트와 제3각 황실 마도사 월트만 슈헤너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레이넬은 부러진 갈비뼈를 부여잡으며 일그러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루시아를 무력화시킨 이진한은 벌써 그 지척에 다가간 직후. 레이넬이 흠칫하며 몸을 뒤로 내빼려 했지만, 이진한의 손이 더 빨랐다.
짜악-!
시원할 정도로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와 동시에 레이넬의 몸이 튕겨 나가 바닥을 구른 끝에 널브러졌다.
가볍게 손목을 한 바퀴 돌려 풀어준 이진한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 정도는 가볍네.”
레이넬의 수준은 검호보다 한 수 낮은 정도.
이제 이 정도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따름이었다.
“흐, 흑발 흑안. 호베르투 마탑주에게 들은 적 있소. 드래곤 슬레이어로 검은 현자의 계승자를….”
툭.
주저리주저리 말을 이어가던 월트만은 가볍게 내질러진 주먹에 턱을 얻어맞고 순식간에 의식을 잃었다.
“리베라 제국이 개입한 건가요.”
“설마 여기까지 손을 뻗어올 줄은.”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가 함께 리베라 제국의 일원들을 살폈고, 미르엘은 다른 쪽에 쓰러진 용병들이 끓어오르는 용암에 다치지 않게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그 가운데 겨우 정신을 차린 크루시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가늘어진 눈으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들은 적 있다. 마룡 벨라시온을 쓰러뜨리고 영웅 중 《지혜》의 검은 현자를 계승했다 자처하는 이가 있다고.
“흠.”
이진한은 턱을 쓰다듬으며 크루시아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검은 현자의 계승자임을 알게 되었으니 뭔가 태도가 바뀌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시뻘건 불꽃과 함께 일렁거리는 적의는 그대로였다.
‘뭐로 쓰러뜨릴까.’
갓 성룡이 된 드래곤 따위는 초월지경에 오르기 전에도 솔로 레이드로 쓰러뜨릴 수 있었다.
지금은 대마도사와 용사 클래스에 도달했고, 바포메트와의 계약으로 인한 「악마화」도 있으며, 대현자 클래스의 전용 스킬인 「무신」도 있다.
-어리석구나! 영웅의 계승자라면 응당 위대한 존재인 이 몸에 예의를 취해야 함이 옳은 법! 그 불경은 대가를 치를 것이다!
“어디서 나보다 어린 게 따박따박 말대꾸야.”
-…뭐라?
“내가 《지혜》의 검은 현자 본인이다.”
이진한의 등 뒤로 한 쌍의 검은 날개가 펄럭였다.
이카루스의 로브가 지닌 특성인 「이카루스의 날개」. 검은 현자의 상징과도 같은 그것은 시커먼 깃털을 흩날리며 그를 하늘 위로 띄워 올렸다.
동시에 이진한의 손으로 마룡 벨라시온을 죽이고 찬탈한 드래곤 하트로 만들어진 「블랙 다이아몬드」가 쥐어졌다.
-검은 현자 본인이라고?
크루시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허공에 휘몰아치는 마력의 대류는 예사 인간의 것과 다르다. 인간을 벗어난, 초월자 중에서도 정점에 다다른 강함.
드래곤인 자신조차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러한 경지였다.
크루시아는 과거를 회상했다.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헤츨링 때의 기억으로, 그저 멀리서 지켜보았을 따름이었다.
수많은 드래곤이, 수많은 강자가 찢겨 나갔을 때도 멈추어 서지 않고 앞으로 나가아가던 일곱 영웅의 모습을.
나약한 인간의 육신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기운을 보이며 그 어느 불꽃보다 찬란히 타오르는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리고 지금.
크루시아는 자신 앞에 선 남자의 몸에도 그와 같은 불꽃이 깃들어 있음을 분명히 보았다.
-영웅을 뵙습니다!
그는 곧바로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은 채 극진한 예의를 표했다.
“…뭐?”
곧바로 크루시아의 몸을 찢어발겨 자신의 경험치로 삼으려던 이진한은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마법의 발동을 멈칫했다.
그 모습을 보고 한 줄기 희망을 품은 크루시아는 다급한 목소리로 그에게 외쳤다.
-저, 정말로 검은 현자이시라면 동맹을 떠올려 주십시오! 영웅과 드래곤은 악신과의 싸움을 위해 동맹을 맺은 관계가 아닙니까!
“….”
뭔 개소리인가.
머리가 골치 아파지기 전에 녀석을 죽여 없애려던 이진한은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인간 세상에서의 천년은 긴 세월이었다.
그렇기에 유적지나 유산 같은 희미한 것들에 의존해 자신과 동료들의 기록을 찾아 헤매지 않았는가.
하지만 만년을 살아가는 장수 종인 드래곤이라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 터.
물론 천년이란 세월은 그들에게도 긴 시간일 테지만, 적어도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존재가 있으리라.
어디서부터 게임이고, 어디서부터 현실이었는지.
정말로 자신을 비롯한 동료들이 전부 이곳으로 넘어와 고대 악신을 쓰러뜨린 것인지.
자신의 기억이 없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그 단서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진한은 머리를 처박은 크루시아의 앞으로 다가가 멈춰 섰다.
“올려다보기 목 아프니까 일단 폴리모프 좀 해봐라.”
-옙.
웅웅웅.
크루시아의 몸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곧 그는 이전에 보였던 붉은 머리의 미남자로 변해 이진한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인간에게 무릎을 꿇다니 그만한 치욕이 없다 여겼겠지만, 그 상대가 영웅 중 한 명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와 비슷한 나이의 드래곤에게 있어 영웅은 신이었고, 우상이었으니까.
인간의 삶, 유희를 동경하는 것도 다 그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천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살아있지?’
크루시아는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인간의 수명은 보통 100년 내외.
가끔 종의 한계를 초월해 그것의 몇 배는 더 사는 이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천년 정도 살아갈 정도라면 반신의 경지에 올라 천계로 올라갔을 터.
그 수는 기나긴 대륙 역사를 보아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며, 영웅 중에서도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분명 먼 발치에서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레드 일족의 크루시아입니다.”
“…레드 일족의 크루시아.”
이진한은 입안으로 그 이름을 굴려보았다.
하지만 기억에 있는 이름도 아니었고, 크루시아란 이름도 익숙지 않았다.
“일단 이야기를 좀 들어볼까.”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레어로 안내하라는 시선에 크루시아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목숨은 부지하게 된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은 덤이었다.
***
쪼르륵.
화려한 응접실 가운데 크루시아는 마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집사처럼 기품 있는 모습으로 정중히 홍차를 따랐다.
“…우와.”
“역시 드래곤의 레어군요.”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는 그 화려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진한도 비슷한 심경이었다. 그간 마르딘 공작가, 제국 마탑, 베르하임 왕성 등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곳을 거쳐 갔지만, 이토록 화려하게 치장된 공간은 처음이었다.
“….”
미르엘 역시 긴장한 표정을 짓던 와중 크루시아가 따라준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엄청 맛있네요. 이렇게 향이 좋은 홍차는 처음이에요.”
“당연하지. 대륙 서쪽의 끄트머리 케델 산맥에 나는 잎을 가져온 것이다. 가히 대륙 최고의 찻잎이라 할 수 있지.”
크루시아는 알아봐 주어서 기쁜 듯 씩 웃어왔다.
지금 모습은 영락없이 순수한 모양새.
이전까지 날 서린 적의를 드러내던 레드 드래곤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크루시아. 너는 옛날에 날 본적이 있다고 했지.”
“예. 당시 저는 헤츨링이라 멀리서 있긴 했지만, 영웅분들을 전부 본 적이 있습니다.”
「불멸」의 팔라딘
「영원」의 대마도사
「안식」의 사제
「창조」의 정령사
「정의」의 검사
「불굴」의 광전사
「지혜」의 현자
그 각각의 모습이 자신의 기억 속에 똑똑히 각인되어 있었다.
눈앞의 검은 현자 역시 차림새나 분위기가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같은 사람임이 분명했다.
“다른 드래곤들도 다 그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힘들었던 싸움이었으니까요.”
하늘이 멸망으로 뒤덮인 때였다.
중간계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하늘을 위시하던 드래곤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했고, 인간을 비롯한 무수한 존재들은 죽음이란 현실을 직면했다.
그렇기에 종족 가리지 않고 서로 힘을 합쳤고, 세상을 멸망시키려던 악신과 싸우기 위한 원정대를 꾸렸다.
“저도 그 원정대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아직 나이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 한이었죠.”
크루시아는 분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신화로 불릴 일면을 장식한 원정이다. 하다못해 지금처럼 성룡이었더라면 어떻게든 그 말석에 들 수 있었을 텐데.
그 이야기를 들으며 홍차를 마신 이진한은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때의 기록들을 볼 수 있을까.”
그 목소리의 끝이 살짝 떨렸던 건 착각이 아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