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Lv.1154 「크루시아」
이진한의 예상대로 이 레어의 주인은 갓 성룡이 된 어린 드래곤이었다.
하지만 그 힘만으로도 충분히 이 안에 있는 이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하다. 실제로 압도적인 공포를 자아내는 드래곤 피어에 대부분 몸이 얼어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건 일부인가.’
슬쩍 몸을 낮춘 채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이는 저쪽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와 마도사 노인, 그리고 몇몇 실력자들.
이쪽은 일레이나와 스미스 포함 마스터들뿐이었다.
“내 뒤로 붙어.”
“…읏, 네.”
“드래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의 성장세가 가파르다고 할지라도 아직 드래곤 피어를 이겨내기엔 무리였다.
그래도 어깨를 살짝 떨었을 뿐 다른 이들과 같이 주저앉거나 혼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훌륭할 따름이었다.
“귀하께서는 누구시오.”
노인은 평정을 유지하려는 듯 차분히 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러자 크루시아는 기다랗게 찢어진 샛노란 동공으로 그를 바라보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이 레어에 들어왔느냐.”
“…으음.”
노인, 제국 마탑의 제3각 황실 마도사 월트만 슈헤너는 침음성을 내뱉었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 지난 백 년간 마나의 변동이 없는 주인 없는 레어라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것은 터무니없는 오판인 듯 자신을 이 레어의 주인이라 등장한 드래곤의 존재에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렇다 한들.’
월트만은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행한 이들은 제국에서도 수위에 드는 실력자들.
더욱이 그 주축은 검으로서 초월지경에 다다른 그랜드 소드 마스터이자 제국의 소수만 부여받는다는 영광스러운 마스터 나이트의 호칭을 거머쥔 레이넬 저거먼트가 있었다.
드래곤이란 이름은 부담스럽긴 하지만, 감당해낼 수 있을 터.
실제로 레이넬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할 수 있다는 의지를 표명해왔다.
“위대하신 존재를 뵙습니다.”
“위대하신 존재를 뵙습니다.”
월트만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극진한 예의를 표한다. 그와 동시에 리베라 제국의 일원들 역시 함께 무릎을 꿇으며 적의를 거뒀다.
“흠.”
레드 드래곤 크루시아는 응당 그래야 했다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그 뒤에 있던 용병들 역시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따라 엎드렸고, 이진한 역시 그 분위기를 따랐다.
“위대한 존재의 보금자리를 침범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저희는 이 광산을 발굴 중 내부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조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뿐입니다.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의 마법이 걸려 있기에 고대 유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 극진한 말투에 크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바로 직전 분노에 찬 적의는 온데간데없이 자신을 향한 존경에만 취해 있는 모습이다. 이진한은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인간에 대한 경험이 없는 어린 드래곤인가.’
적어도 2천 년이 지난, 마경에서 싸운 벨라시온 같은 녀석이었더라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 이 주위를 감싸는 마법을 준비했을 터.
이제 막 성룡이 된 크루시아는 때 묻지 않은 아이의 순수한 면모가 엿보였다.
‘통한다. 역시 어린 드래곤이로구나.’
윌트만 황실 마도사 역시 그것을 깨닫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희가 어찌하면 위대하신 존재의 화를 가라앉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음.”
그것까지 생각한 적은 없는 듯 크루시아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이내 머리를 맹렬하게 돌리는 듯 이리저리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놈들은 리베라 제국의 출신인가.”
“예. 만일 여기서 내보내 주신다면 제국의 이름으로 막대한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그것과 함께 이 자리의 있는 절반의 목숨으로 값을 치르도록 하지.”
“…그건.”
월트만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그 말에 수긍하며 자신들의 뒤쪽을 가리켰다.
“제물은 저쪽 인원들로 바치겠습니다.”
“…네놈!”
순식간에 당해버린 것을 깨달은 스미스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몸을 일으킬 찰나, 어느새 그 코앞까지 닥쳐간 크루시아가 샛노란 눈동자로 그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누가 일어나도 된다고 했지.”
“…큭!”
일생일대의 위기 가운데 스미스의 행동은 벼락과 같았다.
검 위에 서린 찬란한 오러 블레이드가 농밀한 궤적을 그리며 크루시아의 목을 베어 갈랐다.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의 기습이라면 아무리 드래곤일지라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크루시아는 코웃음을 치고는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턱.
“…!”
스미스의 검이 그의 손에 잡힌 채 더 나아가지 못했다.
강철도 찢어발기는 오러 블레이드란 이름이 무색하게도 그것은 고운 손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어리석다. 어리석을 따름이다. 네놈의 죄는 저 현명한 인간처럼 이 위대한 내게 조아리며 자신의 잘못을….”
푹─!
중간계의 절대자로서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쏟아내는 훈계는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
크루시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의 가슴 위로 삐죽 솟아오른 이 검은 무엇이란 말인가.
등 뒤에서 움직이는 기척은 느끼지 못했다.
‘환상? 감히 드래곤인 내게 현혹 마법을 걸었다고?’
쿨럭.
하지만 뒤이어 뱉어진 새빨간 선혈에 그는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검이 착각이 아닌 현실임을 깨달았다.
“인간을 무시한 죄는 크다, 오만한 드래곤이여.”
“…네, 놈.”
마스터 나이트(Master Knight).
리베라 제국의 기사 중 한계를 벗어난 이들만이 얻을 수 있는 칭호.
지금까지 그 이름을 거머쥔 자들은 극소수이며, 모두 초월지경에 다다른 강자라 알려져 있었다.
“죽어라. 죽어서 내 출세를 위한 자양분이 되어라.”
레이넬 저거먼트는 마스터 나이트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한 명이었다.
그 가운데 비록 갓 성룡이 된 어린 드래곤이나마 베어 쓰러뜨려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업적을 세운다면 마스터 나이트 중에서도 자신의 입지가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감히…!”
서걱─!
크루시아는 몸을 비틀며 저항했지만, 레이넬의 검은 무참히 그의 가슴을 찢고 목을 베어 갈랐다.
주위로 진득한 피가 흩뿌려지며 잘린 머리가 떨어져 내린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업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한 레이넬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었을 때, 이진한은 기가 찬 표정으로 혀를 차고는 자신의 일행을 끌어당겼다.
“멍청한 자식.”
쿠우우웅─!
인간의 육신이 기능을 잃자 폴리모프 마법이 풀리며 드래곤의 본체가 현현했다.
새빨간 비늘로 감싸인 커다란 거체.
마경에서 보았던 블랙 드래곤 벨라시온보다는 작았지만, 그래도 드래곤의 위용을 뽐내기에는 충분했다.
레드 드래곤 크루시아는 이제껏 보였던 것보다 더 큰 분노에 찬 모습으로 발밑에 자리한 인간들에게 소리쳤다.
-이 버러지 같은 인간 놈들! 한 놈도 남겨두지 않겠다!
내부의 기류가 그의 입안으로 몰려들며 심상치 않은 파동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월트만 마도사는 그것이 드래곤의 전유물인 브레스임을 깨닫고는 제국 측 인원과 함께 강력한 배리어를 펼쳤다.
레이넬은 그것을 베어버릴 심산인 듯 검을 날카롭게 세웠고, 오직 용병들만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허둥지둥할 참이었다.
파아아아아앗-!
지상을 향해 새빨간 화염이 쏟아져 내렸다.
흡사 용암과도 비슷한 그것들은 장내의 모든 것을 녹여내며 불태웠고, 한참 뒤에야 그 열기를 식히며 들끓는 지반을 만들어내었다.
“…끄으윽.”
여기저기서 신음이 토해져 나왔다.
단 브레스 한 방에 리베라 제국 측 인원 절반이 형체조차 남기지 못한 채 쓸려나갔다. 그래도 주축 전력들은 무사한바.
월트만은 수염 끝이 그을린 정도에 불과했고, 레이넬은 녹아내린 왼쪽 견갑을 풀어 헤쳤을 뿐이었다.
-…허.
크루시아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버러지 같은 인간 놈들에게 기습을 당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브레스로도 그것을 전부 쓸어버리지 못했다.
더욱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저 적의 가득한 눈을 보아라.
드래곤에 비하면 찰나에 살아가는 하루살이들이 감히 누구에게 이빨을 드러내는가.
쿵.
크루시아가 발을 내려찍자 허공 위로 십수 개의 마법진이 펼쳐졌다.
마법의 종주라 불리는 종족인 만큼 다채로운 종류의 마법의 향연.
레이넬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것들을 살폈다.
“과연. 한 번에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을 캐스팅. 하지만 전투 센스는 형편없기 그지없다.”
장내에서 저 드래곤에게 위협이 될만한 존재는 자신 하나.
그렇다면 이렇게 대단위 폭격을 가하는 것보다 일 점에 화력을 집중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투콰콰쾅!
레이넬은 땅을 박찼다.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지는 쉴 새 없는 마법의 폭격을 뛰어넘고 베어 가르며 크루시아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번에도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군.”
인간의 모습을 의태한 가운데 목을 베어도 그리 큰 타격이 없는 듯싶었지만, 드래곤의 본체로 돌아간 가운데 목이 베여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파아아앗!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가 눈부신 섬광을 뿜어내며 기다란 칼날을 만들어냈다.
크루시아 역시 검 위에 서린 그 기운을 경시하지 못하겠는지 잔뜩 경계심 서린 표정으로 자신에게 닥쳐온 레이넬을 바라보았다.
-하등한 인간 따위가!
흉흉한 발톱이 돋아난 거대한 앞발이 휘둘러져 내려왔다. 어찌나 막대한 질량인지 산이 쏟아진다고 느낄 정도로 흉악한 기운. 하지만 레이넬은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콰가가각!
레드 드래곤의 발톱과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검이 서로 맞부딪치며 한치의 밀림 없는 백중지세를 나타냈다.
‘살을 주고 뼈를 친다.’
휘리릭.
레이넬의 몸이 회전하며 발톱을 흘려낸다. 그대로 붉은 비늘이 뒤덮은 크루시아의 팔 위를 박차고 달리며 그 목을 향해 날카롭게 일 섬을 내질렀다.
-같잖구나.
크루시아 역시 그가 손해를 감수하고 공격해오리라는 것을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드래곤이 돼서 그것이 두렵다고 도망치는 것은 체면이 상하는 일.
그렇기에 그 역시 피하지 않은 채 자신의 팔 위를 달려오는 레이넬을 보며 다시금 브레스를 머금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그 숨통을 끊어주마!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 가운데 허우적거리게 해주리라.
크루시아는 그 분노를 담아 입을 쩍 벌렸다.
“자, 거기까지.”
“…!”
-…!
충돌 직전 둘은 귓가에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두 눈을 크게 떴다.
탁.
검은 머리의 남자가 제 머리 색과 닮은 로브의 끝자락을 흩날리며 그들 사이로 난입한 것이었다.
‘이 자는….’
용병 사이에 끼어있던 녀석이다. 기세가 별 볼 일 없어 그리 신경 쓰지 않았거늘, 무슨 용기로 이 싸움에 끼어들었다는 것인가.
꽈악.
이진한은 가볍게 말아 쥔 주먹을 휘둘렀다.
브레스를 뱉어내려 했던 크루시아는 한 명이나 둘이나 상관없었기에 전부 태워버리려 했지만, 별안간 제 머리를 강타한 묵직한 충격에 신음을 토해내며 입안에 그러모은 불꽃들을 흐트러뜨렸다.
쾅!
-…끄어억.
크루시아의 두 눈이 뒤집히며 일순간 혼절한다. 지척에서 검을 휘두르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레이넬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두 눈을 부릅떴다.
“너도 좀 조용히 있고.”
“…이런!”
직전까지 드래곤의 곁에 있었으면서 언제 이쪽의 품에 파고든 것일까.
귓가에서 느껴지는 숨결에 레이넬이 몸을 비틀었지만, 그 역시 가슴 위로 닿는 묵직한 충격에 피를 토해내며 나가떨어졌다.
탁탁.
“깔끔하네.”
순식간에 난동을 피우던 두 명을 제압해낸 이진한은 상쾌한 얼굴로 손을 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