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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31화 (131/210)

◈ 131.

‘심 봤다.’

무언가 숨기고 있는 건 알았거늘 설마 드래곤 레어가 있었다니.

이진한은 씰룩이는 입꼬리를 겨우 잠재우며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드래곤 레어? 그게 무슨.”

“다모라 왕국과 니헤임 왕국이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싸움이 확대되는 것을 막았겠나. 미스릴 광맥 따위는 허울 좋은 핑계일 뿐이지.”

요넬은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 자신 역시 길드의 나름대로 간부급에 속했으나, 드래곤 레어 같은 이야기는 단 하나도 듣지 못했다.

부길드장인 파르함 역시 단칼에 목이 잘린 것을 보니 모르고 있던 것이 분명하다. 즉, 저 노인의 말과 같이 왕국 측에서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 분명해 보였다.

“영광인 줄 알게. 살아생전에 드래곤 레어를 볼 수 있었던 사람이 몇몇이나 되겠는가.”

“재앙이 닥쳐올 것이오. 드래곤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겠소?”

“말하지 않았느냐. 주인이 없는 텅 빈 레어라고. 우리가 그런 것도 조사하지 않고 움직였을 줄 아느냐.”

“…우리?”

요넬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노인의 말에 이상한 점이 많았다. 마치 자신들이 두 왕국과 관련이 없는 자라고 말하는 듯하지 않은가.

“뭐, 잠자코 지켜보거라.”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끼릭, 끼릭.

결계를 해제하는 아티팩트 수십 개가 연결되어 그 위력을 증폭한다. 그것을 전부 합하더라도 《영원》이 만든 「봉파자」보다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 문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래도 저걸로는 부족할 텐데.’

명색이 드래곤의 마법이다. 노인은 아티팩트와 자신의 힘을 자신하고 있는 듯했으나, 이진한이 보기에 고작해야 3할 정도의 결계만을 해체할 수 있어 보였다.

대현자의 눈이 문을 뒤덮은 수호 결계의 술식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

초월 마법도 아니고 거의 수십 년 정도 지난 마법의 술식 정도야 순식간에 해석을 끝마쳤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슬쩍 손을 밑으로 내리며 가볍게 마나를 끌어올렸다. 증폭된 아티팩트들의 통제는 노인이 쥐고 있다. 즉, 그것만 중간에서 몰래 가로챈다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에 충분하다는 소리일 터.

웅웅웅─!

“음?!”

갑작스럽게 해제 술식이 변형되기 시작하자 노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입니까.”

“…운이 좋은 듯하군. 첫 단추를 잘 꿰맨 것 같네.”

그 옆에 있던 남자가 묻자 노인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문을 가리키자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굵은 사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적인 봉인은 해제했다. 나머지는 자네의 몫이네.”

“알겠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볍게 검을 뽑아 들었다.

단순한 발검일진대 그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미르엘은 물론이고 원정대에 속해 있던 숨은 실력자들이 살짝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파앗─!

찬란한 비취색 오러 블레이드가 검 끝을 타고 피어오른다. 그 선명한 색은 소드 마스터로서도 완숙에 올랐다는 증거.

쉽사리 생각할 적은 아닌 듯해 보였다.

‘아니.’

그 가운데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의 경지는 고작 소드 마스터가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기운을 숨기고 있지만, 최소 미들턴에서 싸웠던 검호와 비슷한 초월지경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

저쪽 파티의 주 전력은 저 남자인 듯해 보였다.

‘드래곤이 있을 가능성도 생각한 것인가.’

그랬다면 이해가 가는 전력이다. 초월지경에 오른 검사라면 갓 성룡에 오른 드래곤 정도는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으니 말이었다.

서걱─.

단숨에 굵은 쇠사슬과 함께 커다란 문이 썰려 나갔다. 큰 소음과 함께 그 조각들이 떨어져 나갔을 때, 사람들은 사뭇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그 너머의 공간을 바라보았다.

“…그렇군. 순순히 들여보낼 줄 생각은 없다 이건가.”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문 너머의 공간은 여전히 칙칙한 어둠으로 물든 기나긴 길이었다.

“이동한다. 그 이전에.”

노인이 눈짓하자 괴한들이 검을 들고 속박당한 원정대를 향했다.

“야, 약속과는 다르지 않소!”

선두에 있던 요넬이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치자 노인은 무슨 이야기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죽이려는 것이 아니네. 오히려 풀어주려는 것이지.”

“…무슨?”

“대신 선두에 서줘야겠어.”

“이런 씹….”

원정대 가운데 욕지거리가 나왔다.

드래곤 레어로 들어가는 길이다. 환영받지 않는 손님이니 필시 그 길목에는 험난한 함정이 설치되어 있을 터.

어찌 되었든 죽으라는 것은 마찬가지였나.

“그러면 좀 더 편한 방법이 있네만.”

노인이 씩 웃자, 그 뒤로 잘 벼린 검을 든 병사들이 진득한 살기를 드러내었다.

“…무슨 수가 있겠는가. 일단 해보세.”

스미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요넬을 말린다. 그 얼굴은 머지않아 닥쳐올 위험에 대한 두려움으로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찌푸린 눈만은 날카롭게 주위를 훑으며 먹잇감을 물색하는 중이었다.

스미스뿐만이 아니었다. 실력을 숨긴 다른 둘 역시 가라앉은 표정으로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 미적거릴 시간은 없네. 서두르도록 하지.”

노인이 스태프를 까딱거리자 요넬은 깊은 한숨을 내쉬곤 하다못해 자신이 선두에 서기 위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실 거예요?”

슬쩍 옆으로 붙어온 일레이나가 물었다.

이진한은 주위에 있는 병사들을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일단 따라간다. …그리고 이 뒤에 아주 멀리서 쫓아오는 무리가 있어.”

“또요?”

이제 막 광산 입구에 들어섰으니 저기 있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조차 느끼지 못했을 거리다.

배신에 배신이 판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황. 그는 이것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제법 궁금해졌다.

‘레어 쪽도 그리 큰 문제는 없어 보이고.’

갑자기 몇천 년을 산 고룡이 등장하면 정말로 죽을 각오를 해야겠지만, 문에 걸려 있던 봉인의 수준이나 이 안쪽의 규모를 보아 성룡이 된 지 얼마 안 된 드래곤의 레어 같았다.

그 정도라면 자신이 나설 필요도 없이 저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사력을 다해 싸워줄 터.

끝에서 유유자적하게 어부지리를 취하면 되는 일이었다.

“…마법사들 색적 마법으로 계속 안쪽을 탐색해주시오. 전위는 저를 선두로 천천히 나아가도록 하겠소.”

요넬은 무거운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괴한들이 등 뒤에서 검으로 찌르며 나아가라는 상황에 선택지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여기서 얼마나 살아갈 수 있을까.’

길드를 나설 때까지 이리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

텅 빈 길 가운데 발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빛 한 점 없는 공간인지라 마도구와 마법에만 의지한 채 앞으로 나아가는 상황.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머리털이 쭈뼛 서며 보이지 않는 공포가 원정대를 휘감았다.

“…저건.”

다행히 얼마간 앞으로 나아올 때까지 이렇다 할 함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길이 끝나는 구역, 어딘가로 향하는 문 앞으로 각각 창과 검을 든 기사 형태의 석상 두 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뒤에 펼쳐질 일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걸음 속도가 느려졌을 찰나, 원정대 가운데 누군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먼저 공격하면 되지 않을까?”

“뒤쪽에서도 여차하면 가세한다고 했다. 괜히 나서지 말고 안전하게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임시로 리더를 맡은 요넬이 고개를 끄덕이자 전위는 활시위에 화살을 걸었고, 마법사들은 색적 마법을 멈추고 각자의 속성을 지닌 원거리 마법을 준비했다.

“발사.”

쐐애애액-!

화살을 비롯해 온갖 마법들이 석상을 강타했다.

어지간한 크기의 바위도 단번에 부술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 가운데 석상의 모습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상태였다.

“…별것 아니었나 보군. 그러면 이대로 저 문, 컥!”

요넬은 돌연 자신의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손길에 혀를 씹었다. 무슨 짓이냐며 쌍심지를 켤 찰나, 목 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바람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서걱!

바로 옆에 있던 용병이 피를 흩뿌리며 단말마도 내뱉지 못한 채 절명했다.

그 등을 꿰뚫고 삐죽 솟아 올라있는 것은 조금 전까지 석상이 들고 있던 창과 매우 흡사한 형태였다.

“빌어먹을!”

“모두 조심해! 속도가 예사롭지 않…!”

큰소리로 외치며 원정대에게 경고하던 용병의 목이 단숨에 날아갔다.

이진한은 잡아당겼던 요넬의 뒷덜미를 놓고는 자신의 옆에 있던 일레이나를 끌어당겨 그 허리춤을 베어가던 검을 피하게 했다.

“읏, 고마워요.”

“가디언인가. 적어도 마스터 급이네. 방심하지 마.”

그는 슬쩍 뒤쪽을 바라보았다.

가디언의 출현에도 노인을 비롯한 병사들은 나설 기미가 없다. 마치 가디언의 손을 빌려 자신들을 여기서 모조리 죽이려는 듯 태평한 표정이었다.

“…쯧.”

이진한의 귓가로 스미스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용병들로 이루어진 원정대의 전력으로는 가디언들의 공격을 막아내기 힘들었다. 지금도 시시각각 썰려가며 피를 흩뿌리는 와중 앞으로 나선다면 자신이 모종의 이유를 지닌 채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여기 있는 모두에게 들키게 되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질 않다. 여기까지인가.’

스미스의 두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결심을 다진 듯 입술이 오므려졌고, 이내 날카로운 소리가 장내로 울려 퍼졌다.

“…무슨?”

귀청을 찢을 듯한 그 소음에 바로 옆에 있던 용병이 눈살을 찌푸렸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대체 무슨 짓인가.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반대편에 있었던 두 용병이 눈부신 오러 블레이드를 피워올린 채 가디언들에게 달려들었다.

‘애초에 셋이 같은 편이었는가.’

이진한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들을 살필 찰나, 그 시선을 눈치챈 스미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검을 다잡았다.

“…이미 알고 있었군. 조금만 참으세. 가디언들을 쓰러뜨리고 저들도 곧 정리할 참이니.”

스미스는 천천히 노인을 비롯한 괴한들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만한 전력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리베라 제국뿐이겠지.”

“그걸 알면서 여기까지 온 것인가.”

“자신이 있으니까.”

“우습기 짝이 없구나. 고만고만한 왕국 몇 개가 뭉쳐서 열강이라 불리니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걸 테지.”

노인은 스미스의 기개가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소드 마스터가 수십이 모인다고 할지라도 초월지경에 오른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쪽은 애초에 드래곤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편성한 공략대, 전력의 궤가 달랐다.

“네놈들의 움직임은 애초부터 예상하였다. 이곳으로 온 것이 우리뿐이라고 생각하는가.”

“…!”

그 말에 노인은 등 뒤를 바라보았다.

뒤쪽으로부터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황급히 남자를 바라보자 그도 느끼지 못했다는 듯 살짝 고개를 저었다.

“제국이라고 언제까지 제국은 아니지. 오늘로써 섣불리 타국의 일에 개입한 것을 후회….”

툭, 데구르르.

스미스의 말을 끊고 저 어둠 속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바닥을 굴러왔다.

리베라 제국의 인원들은 그것이 밖을 지키고 있던 동료들의 머리인 줄로 알았지만, 그보다 먼저 스미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안티넬 경?”

저벅.

그 직후 이질적인 발걸음 소리가 장내에 가득 울려 퍼짐과 동시에 막대한 압력이 공기를 휘어잡았다.

“…이건.”

노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이만한 인수를 단번에 휘어잡다니. 그 힘을 가늠할 수 없는 강자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 역시 얼굴을 굳히며 검 자루 위로 손을 가져갔다.

“이 버러지 같은 인간 놈들. 감히 내 레어에 침입하다니.”

어둠 가운데 새빨간 장발의 미남자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분노를 토해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그 홍옥의 눈동자는 명백히 인간의 것을 벗어난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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