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왔군. 자네들이 마지막이다.”
이진한 일행이 용병 길드에 도착했을 때, 무뚝뚝한 목소리의 누군가가 그들을 맞아주었다.
“부길드장인 파르함이다. 이번 광산 방어 퀘스트의 8차 원정대는 내가 맡게 되었다. 편의상 앞으로 리더라 부르도록.”
파르함은 눈 사이를 가로지르는 기다란 흉터가 인상적인 민 머리의 거한이었다. 차가운 눈으로 길드에 자리한 용병들을 바라보더니 외투를 걸치며 문가로 나섰다.
“곧바로 출발한다.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아 보이니 도착한 즉시 교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다들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하도록.”
얼핏 차가운 분위기 같지만, 구구절절 설명해주는 것을 보니 나름대로 책임감은 있는 듯해 보였다.
이진한은 원정대의 제일 후미에서 자신과 함께하게 된 용병들의 면면을 살폈다.
“…흠.”
“어떤가요? 실력을 숨긴 이가 있나요?”
“네가 느끼기엔 어때 보여?”
미르엘이 슬쩍 물어오기에 알 수 있겠냐는 듯 반문하자 그녀는 미간을 모으며 용병들을 바라보았다.
“인원은 마흔셋. 그중 서른은 별 볼 일 없는 자고 남은 열셋 중에서도 넷은 저보다 하수. 일곱이 비슷한 수준이고 셋은 읽히지 않네요.”
“얼추 맞췄네. 너희들은?”
“저도 미르엘이랑 비슷해요.”
“셋에 둘은 마스터. 하나는, 잘 모르겠어요.”
엘레오노라는 미르엘과 같은 의견을 내었고, 일레이나는 과연 경지답게 조금 더 자세하게 파악한 듯싶었다.
“신경 써야 할 것은 마스터 둘. 일레이나 네가 파악하지 못한 녀석도 같은 마스터다.”
“…그런데 잘 가늠이 안 되네요. 기운이 희미하게 느껴져서.”
“아마 어쌔신이겠지. 되도록 저놈 옆엔 다가가지 마.”
어쌔신 류의 클래스는 자신의 기운과 기도를 숨기는 데 특화되어 있다. 마도사로서 마나에 민감한 그녀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소드 마스터 둘에 마스터 어쌔신 하나.’
광산 출발을 위해 각기 마차에 나는 중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다른 용병들의 수준을 생각해 보면 평범한 전력은 아니다. 당장 자신들을 제외하고는 마스터 한 명만 있다면 전부 쓰러뜨릴 수 있을 테니.
유리아처럼 대현자의 눈이 그들의 신분 내력을 파악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녀가 특수한 경우였는 듯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하하, 베르너 공이라고. 이거 잘 부탁합니다.”
운이 나쁘게도 탑승 끄트머리에서 일행과 갈려버렸다. 그렇기에 하는 수 없이 다른 마차에 오름과 동시에 그 옆으로 다가오는 남자가 있었다.
“너는?”
“나르마치 출신인 스미스라 하오. 같은 마차에 탄 것도 우연인데 통성명이나 합시다.”
“…베르너라 한다. 베르하임에서 왔지.”
“어이쿠. 어쩐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멓다 싶더니 블랙 워커셨구만. 말 걸기 잘했어. 나도 영웅 중에서는 검은 현자님을 제일 좋아한다오. 마음만은 블랙 워커야. 하하하.”
나르치마의 스미스.
이름부터 수상한 티가 풀풀 나는 녀석이다.
이쪽에 접근한 건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이는 일. 이진한은 피식 웃으며 다리를 꼬고는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용병을 할 실력은 아닌 것 같은데.”
“피차 마찬가지 아니오? 그러니 서로 부딪치지 않게 통성명이나 하려 했던 것이지. 혹시 나중에 내가 위험해지면 대화를 나눈 정이라도 생각해 한 번만 도와주시오.”
윙크까지 해오는 것이 사뭇 뻔뻔한 모양새다.
하지만 이진한은 차라리 그것이 기꺼웠기에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광산 쪽의 상황은 알고 있나? 마지막에 오는 바람에 자세한 건 듣지 못했는데.”
“아까 부길드장, 아차 리더라고 했지. 파르함 리더가 말했던 대로 그리 상황이 좋지 못한 모양이오. 명목은 도적 때의 습격이라고 했지만, 광산을 차지하기 위한 두 왕국의 싸움이지 않소.”
“그렇지.”
“며칠 전까지는 그래도 소규모 전투로 진행됐는데 오늘 새벽에 쾅 부딪힌 모양이오. 그래서 이렇게 급히 인원을 충원한 것이지.”
윗사람의 욕심에 여럿 죽어 나간다며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제법 거친 임무가 될 것 같은데, 너는 왜 이 임무를 맡았지?”
“아하하, 아마 베르너 공이랑 같은 이유일 것이오. 보수가 짭짤하지 않소. 설령 목숨 수당이라 할지라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이진한은 스미스가 자신을 노리는 어쌔신이라는 생각은 접었다.
굳이 표적에게 접근하는 리스크를 질 이유가 없었고, 결정적으로 실력이 한참 모자랐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데.’
뭐 전설급 아이템을 지니고 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다르겠지만, 단검이니 독이니 하는 것들로 백날 찔러봐도 유의미한 타격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의뢰한 이도 그리 멍청한 이는 아니겠지. 그러니 스미스에겐 뭔가 다른 목적이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이 좀 안 되게 이동했을까, 마차는 곧 목적지에 도달했다.
“덕분에 시간 잘 죽였군. 그러면 이전에 말한 대로 나중에 잘 부탁하세.”
“이쪽이야말로 그러지.”
이곳까지 오며 제법 친해졌기에 마차에서 내리며 살갑게 대꾸해주자 막 그에게 다가오던 일레이나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신기하단 표정으로 물었다.
“별일이네요?”
“뭐가? 내가 다른 사람이랑 살갑게 군 게 그리 놀랄 일이야?”
“아니요. 여자면 모르겠는데 남자랑 그러니까 그렇죠.”
“…뭐?”
“전혀 자각이 없다는 얼굴이네요. 베르하임 국왕 정도 되는 사람 빼면 거의 다 벌레 취급했으면서.”
“음.”
가슴을 찌르는 날카로운 말에 이진한은 턱을 쓰다듬었다.
자신이 그랬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그럴 만한 상황이니 그랬을 따름이다. 하지만 일레이나는 원래 자신은 모르는 거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간단한 일례로 비교해볼까요?”
“…해봐.”
“칼리파 기억하죠? 마탑의 마도사. 저랑 동문인 그 남자요.”
“응.”
“그 사람은 일단 얼굴부터 뭉개고 시작했잖아요. 머리채 질질 잡고 끌고 올라왔다고 그러던데.”
“그랬지.”
“반면에 신성 왕국에서 온 이단심문관 유리아는요?”
“유리아? 왜?”
“제국에서의 모든 발단은 그녀 때문이잖아요. 당신 행동 방식에 따르면 일단 그 얼굴에도 주먹 꽂고 시작해야죠.”
“아니 무슨 말을….”
“맞습니다. 저도 사실 지켜보는 내내 조마조마했습니다.”
옆에서 잠자코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미르엘 역시 진심으로 걱정했었다는 듯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조금 그런 면모가 있으시긴 하죠. 그래도 저는 좋아해요.”
엘레오노라는 괜찮다는 듯 두 주먹을 불끈 쥐어 격려해왔다.
“내가 호랑이 새끼들을 키웠네.”
그 광경들을 모두 한눈에 담은 이진한은 옅은 한숨과 함께 쓴웃음을 짓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광산은 처음부터 미스릴 광산이 아니었다.
반절은 석탄을 캐내는 탄광이었고 반절은 철광석을 비롯해 질 좋은 금속의 원석을 캐낼 수 있는 광산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진한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현실에서도 광산을 간 적이 없는데 게임 속에서만 벌써 몇 번째인지.
‘월드’에 있을 때도 광산 관련 퀘스트를 몇 개 깬 적이 있었다.
“저 광산은 처음이에요. 뭔가 으스스한 분위기네요.”
엘레오노라는 말과 달리 두 눈을 반짝이며 색다른 풍경을 즐겼다.
미르엘은 주위를 경계하며 그 곁을 지켰고, 일레이나는 이진한 옆에 착 달라붙어 따라왔을 따름이었다.
“사실 난 광산 별로 안 좋아해.”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어. 처음으로 죽은 게 광산이었거든.”
“…죽어요?”
“아.”
이진한은 실언했음을 깨달았다.
죽는다는 것은 ‘월드’에서의 이야기.
현실이 된 지금 가운데서 할 법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서둘러 둘러대려 했지만, 일레이나는 소문이 진짜였냐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봐왔다.
“고대 영웅들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게 사실이었군요.”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
“예. 무슨 반신이니 뭐니 해서 목숨이 여벌이라는 그런 식으로 된 기록이 있었어요. 무언가의 비유라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었다니.”
“…불사(不死)는 아니야. 그냥 죽음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몇 가지 있는 거지.”
“그거로도 대단한데요. 하나만 알 수 있다면 억만금을 쥐여 줄 사람이 수두룩할 텐데.”
“하긴.”
돈이 있고 힘이 있어도 시간이 없는 이들이 어디 한 둘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쉬이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알려준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자신만이 알고 있을 셈이었다.
“모두 정렬한다.”
그때 파르함이 용병들을 불러 모았다.
한 명도 빠짐없이 도착한 것을 확인한 그는 이내 미간을 좁히더니 자신의 부관을 향해 물었다.
“요넬, 이쪽 책임자가 맞으러 나온다고 하지 않았나?”
“분명히 그랬습니다. 바빠서 늦는 걸 수도 있지만, 이상하군요. 외부를 지키는 경비도 있을 텐데.”
모두 어디에 간 것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광산의 분위기에 파르함은 잠시 고민하다가 원정대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상 사태다. 지금부터 우리는 광산이 적들에게 점령당했다고 생각하며 움직인다.”
“…제길 똥 밟았군.”
생각보다 심각해진 듯한 상태에 용병들의 얼굴이 굳었다.
“인원을 나눈다. 요넬 네가 원정대의 절반과 함께 광산 주변을 수색하도록. 나는 안쪽으로 향하겠다.”
“알겠습니다.”
파르함은 원정대의 인원을 반으로 나누었다.
이진한 일행은 광산 내부 탐사 쪽으로, 우연히도 스미스를 비롯해 다른 두 마스터 역시 같은 파티로 배정되었다.
“이거, 운이 좋군. 자네와 같은 쪽으로 가다니.”
광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스미스는 반기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선두에서 앞으로 걸어가던 파르함은 그를 보며 날카로운 얼굴로 일갈했다.
“조용히. 잡담은 금지한다.”
“…윽.”
엄한 분위기에 그는 쥐 죽은 듯 입을 닫는다. 그러곤 어깨를 으쓱이며 원래 있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이쪽은 탄광인가.’
이진한은 원정대의 뒤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가며 내부를 살폈다.
발밑에는 캐낸 석탄을 운반하기 위한 레일이 설치되어 있다. 벽으로는 어둠을 밝히는 마력 램프들이 균일한 간격을 세우고 나열되어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광산이라길래 살짝 건조하면서 추워질 줄 알았는데 제법 습하네요.”
광산에 처음 들어오는 엘레오노라는 내부의 분위기가 익숙지 않은 것인지 팔꿈치를 문지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초입 부분만 그래. 안쪽으로 들어가면 공기가 텁텁해질걸?”
“탄광으로 보입니다. 불 마법을 사용하긴 힘들겠군요.”
미르엘의 말에 일레이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일단 보조로 갈게요. 이런 폐쇄된 공간에서 마법은 그리 좋지 않으니.”
“엘레오노라는 바람 마법이 메인이니 문제없지? 그럼 이번에도 미르엘이랑 함께 둘이 해보자.”
“맡겨주세요.”
“문제없습니다.”
원정대의 후미에 있는 덕분에 이야기를 나눠도 파르함의 귀에 들리진 않는 듯싶었다. 그렇기에 이진한이 지시를 내리자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알겠다는 뜻으로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게 성장시키기 위해선 경험치를 몰아줘야 하는 법.
어차피 잡몹으로는 자신이나 일레이나에게 유의미한 수치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자, 그럼 가보자. 어떤 놈들이 있을지.”
이진한은 슬슬 멀어지기 시작한 원정대를 쫓아 부지런히 발걸음을 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