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28화 (128/210)

◈ 128.

“우으.”

텔레포트 게이트 앞.

벌써 몇 번째 여정이었지만, 이 찌뿌둥한 감각만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엘레오노라는 한껏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었다. 그 옆으로 일레이나는 난간에 몸을 기대며 밑으로 보이는 도시의 전경을 구경하며 담뱃대를 씹었다.

“어수선하네.”

“분쟁 중인 도시니까요. 어쩔 수 없죠.”

이진한은 게이트를 지키던 병사에게 신분증을 제시해 일행의 신원까지 확인받는 중이었다.

흘깃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일레이나는 저 보라는 듯 손을 뻗으며 도시 전반을 가리켰다.

“조금 투박한 분위기지 않아요?”

“확실히. 베르하임 왕국의 건물들이 세련된 느낌이다보니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네요.”

“남부 지역이라 햇볕도 더 뜨거운 것 같습니다.”

미르엘이 살짝 눈을 찌푸리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혹한의 동토로 뒤덮인 북부 출신인 그녀에게 있어 이 뜨거운 햇살은 익숙지 않다. 그렇기에 가볍게 마나를 풀어내 새하얀 피부 위로 둘러 호신기를 펼쳤다.

“오. 여기는 또 다른 분위기이네.”

그 직후 신원확인을 끝낸 이진한이 그녀들 사이로 다가와 난간에 섰다.

가고마일 광산이 자리한 니헤임 왕국은 남부 지역의 국가였다. 땅 전반이 척박한 사막이었고, 그 덕분에 생활이나 문화 양식은 이집트에서 볼 수 있을 법한 것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바람에도 모래가 섞여 있나. 진짜로 여행 온 기분이네.”

“이쪽 사막은 유명한 관광지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굳이 가보고 싶지는 않군요.”

더운 건 질색이라는 듯 미르엘은 얼굴을 찌푸렸다.

곧 그들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내려가 도시로 진입했다.

일레이나의 말대로 베르하임 왕국보다는 투박한 모양이 강하다. 사각형의 각진 건물들이 곳곳에 늘어서 있으며, 뜨거운 햇빛을 가리기 위한 천막이 머리 위에 늘어서 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네요.”

“오히려 활발한데요? 상인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어요.”

“돗자리만 펴도 돈을 쓸어모을 것 같습니다.”

분쟁 중이라 분위기가 그리 좋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도시는 활발한 기색이 잔뜩 풍겼다.

용병과 군인으로 보이는 이들 뿐만이 아니라 상점을 비롯해 좌판까지 펼쳐 놓은 채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가득하다. 서로 목에 핏대를 올리며 호객행위를 하느라 빽빽 소리 질렀고, 그들에게도 다가와 끈덕지게 달라붙느라 귀찮을 지경이었다.

“음. 괜찮은 것 같은데.”

그러던 중 이진한은 호기심에 니헤임 왕국의 전통 의상을 구입했다.

히잡을 닮은 그것은 머리에 뒤집어쓰는 것으로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침투하는 것을 막고 햇볕을 가려준다. 마법으로 보호를 받는 그로선 굳이 쓸 필요가 없었지만, 왜인지 마음이 동해 자신뿐만 아니라 그녀들에게도 하나씩 사주었다.

“어, 어울리나요?”

“잘 어울리십니다.”

“보라색이 없는 게 아쉽네요. 머리 색과 맞추고 싶었는데.”

엘레오노라와 미르엘, 그리고 일레이나 역시 그것을 뒤집어쓴 채 머리를 매만졌다. 이진한은 그것을 보고 작게 웃어준 뒤 자신들을 향해 인식 저해 마법을 펼쳤다.

“한 걸음마다 붙잡혔다간 날이 저물때까지 이 거리를 못 빠져나갈 테니.”

“잘 생각하셨어요. 은근슬쩍 팔이나 어깨를 만져 오려 한다니까요?”

일레이나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에 사람이 붐비는 만큼 몸이 닿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고의로 만져오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다. 인파에 불가항력으로 밀리는 척하며 거리를 좁혀온 이들이 벌써 여럿.

소매치기도 있었고 그녀의 말대로 몸을 만지려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그들 모두 예외 없이 턱이나 머리를 얻어맞고 곳곳에 있는 골목에 몸을 눕혔을 따름이었다.

끼이익.

인식 저해 마법 덕분에 이전보다 수월히 앞으로 나아간 그들은 머지않아 용병 길드에 도착했다.

도시의 분위기인 만큼 내부의 분위기도 투박하기 그지없다. 미들턴 쪽은 애들 장난이었는지 저마다 한 성질 할 것 같은 용병들이 내부에 자리해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용병 등록을 하러 오셨나요?”

“광산 방어 임무에 지원하고 싶다. 인원은 총 네 명이다.”

용병 길드지만, 정석대로 여자 접객원이 카운터에서 맞아주었다.

베르하임 국왕이 건네준 신분증은 문제없이 통과되었고 그들은 곧바로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더럽게 비싸네. 이런 수준의 방이 금화 단위라니.”

이진한은 툴툴거리며 인벤토리를 닫았다.

낸 가격에 조금만 더 보탠다면 리베라 제국에서 묶었던 최고급 숙소인 「하기스의 편안함」에서 작은 방 하나 정도는 빌릴 수 있을 정도다.

도시 전체에 사람이 몰려 값이 천정부지로 솟아 어쩔 수 없다곤 하지만, 터무니 없는 가격임은 틀림 없었따.

“그간 번 돈도 거의 다 토해내셨으니 앞으로 열심히 돌아다니셔야겠네요.”

방에 짐을 풀고 숙소에 딸린 식당에서 식사 중 일레이나가 옅게 미소 지으며 말하자 다른 이들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다 토해내다니?”

“베르하임 왕국에서 이천만 골드를 내어놓으셨잖아요. 여기까지 오면서 사용한 것도 있고, 얼추 들어맞지 않나요?”

“아,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했더니.”

이진한은 그녀들의 어림짐작에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탁자 중간으로 수북한 보석과 재화가 떨어져 내리며 산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계산해보아도 천문학적인 값어치였지만, 그마저도 인벤토리에 들어있는 것을 생각하면 일부에 불과한 규모였다.

“보다시피 그리 궁하진 않아. 오히려 차고 넘칠 정도지.”

“…그런데 왜 이때까지 돈에 집착했어요? 큰돈을 요구하면서 굳이 안 해도 될 일에 발을 내디디길래 뭔가 그런 쪽으로 사정이 있는가 싶었는데.”

일레이나가 기막히단 표정으로 물어왔다.

“다다익선이란 말이 있지. 그리고 돈은 최소한의 기준선일 뿐이야. 내 위치에 맞는 액수만큼 받아야 상대도 무시하지 않으니.”

값어치를 책정하기 위함이었지 딱히 돈 자체에 집착하진 않는다. 그저 호구처럼 봉사하기 싫기에 그들의 막대한 재화를 대가로 건 것이었다.

“맞습니다. 베르너 님은 그런 부분으로 초탈하신 모습을 자주 보이시니까요.”

“맞아. 누굴 수전노로 보고 있어.”

미르엘의 지원 사격에 이진한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벌이라는 듯 손을 뻗어 일레이나의 미간에 꿀밤을 놔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이마를 감싸 쥐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윽, 그러면 나중에 제가 마탑주가 되어도 필요 없는 거죠?”

“싫은데. 그간 네게 들인 시간과 정성을 생각해야지. 기둥 뿌리 몇 개 정도는 뽑아갈 거니까 지금부터 각오해둬라.”

“아하하하.”

엘레오노라가 웃음을 터트린다. 그 직후 문득 떠올랐는지 흥미가 동한 눈동자로 이진한을 바라봐왔다.

“베르너 님. 나중에 할 일을 다 끝내시면 뭘 하실 거예요?”

“다 끝내면….”

당연히 현실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나?

가벼운 질문이었지만, 이진한은 금세 진지해진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는 당연히 현실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했지만, 여기까지 오니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나 굳이 현실로 돌아가야 하나?’

매일 술이나 먹고 게임이나 하던 삶이다.

물론 친구들이나 그리운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어차피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일가친척이랑은 사이도 그리 좋지 않다. 오히려 게임만 하던 자신이 사라져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겠지.

현실에 있는 것이라곤 유산으로 물려받은 상가 건물 두 채와 달마다 들어오는 월세 정도다.

이 세상에선?

고대 영웅 《지혜》의 검은 현자.

어지간한 강자도 가볍게 찜쪄먹을 압도적인 힘.

평생 떵떵거리고 살아도 다 쓰지 못할 막대한 재화.

그리고 현실에선 바라보지 못할 정도의 아름다운 여성들까지.

비교하는 것이 우스울 정도의 격차다. 잠시간 정신이 혼미해진 이진한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에 헛웃음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국가라도 하나 세울까?”

“그거 좋네요! 오스칼 제국 쪽은 어떠세요? 어차피 황실은 마족에게 잡아먹혔으니까 싹 다 밀어버리고 베르너 님 이름으로 새로 세우는 거죠.”

그로서는 가벼이 내뱉은 농담이었지만, 엘레오노라는 진심이 담긴 표정으로 두 눈을 반짝이며 손을 잡아 왔다.

‘그들한테 쌓인 게 많은 것 같네.’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국가를 세운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다. 나라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것은 압도적인 무력뿐이 아닐 터.

행정이나 정치, 그 이외의 여러 분야에서도 방대한 지식이 필요했다.

그걸 자신이 할 수 있을까?

‘…잠깐만. 굳이 내가 다 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

인재들이야 차고 넘쳤다.

대현자의 눈이 있으니 적당히 스테이터스를 판별해 요소요소에 알맞게 배치하면 된다. 만약 오스칼 제국을 집어삼킨다면 엘레오노라를 앞으로 내세워 명분을 휘어잡으면 될 터.

마족과 손잡은 윗대가리들만 쳐낸다면 솜사탕처럼 손쉽게 먹어치울 수 있지 않을까.

“…진짜로 해볼 만할 것 같은데.”

“그렇죠?!”

이진한이 진지하게 ‘오스칼 부수기’를 고민하기 시작하자 일레이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남들이 그런 공상을 늘어놓으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일축했을 텐데 당신이 그러니까 묘하게 현실적이어서 조금 무서워요.”

“왜 그래, 황실 수석 마도사 씨.”

“…수석 마도사?”

일순간 일레이나의 눈동자가 떨렸다.

나중에 이터널 학파의 마탑을 물려받기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사탕처럼 달콤하게 들리는 이야기였다.

저 남자가 황제, 그리고 자신이 그 밑에서 제국 내의 모든 마법사를 총괄하는 자리에 오른다면….

‘마탑주가 뭐야. 그냥 완전 마법사의 신이나 다름없는 권력일 텐데.’

수많은 유력자가 자신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예의를 표하는 풍경을 상상하니 광대가 승천했다.

“…중증이군요. 지금 당장 오스칼 제국을 공격하러 가자고 하면 선봉대로 나설 것 같습니다.”

미르엘이 쓴웃음을 지으며 행복한 망상에 젖어 있는 일레이나를 바라보았다.

툭툭.

그러던 찰나 식당에 들어온 한 남자가 그들이 있는 테이블까지 다가왔다.

“베르하임 왕국 출신 용병이신 베르너 님 외 세분이 맞으십니까?”

“맞는데, 길드에서 왔나?”

“예. 소집령이 떨어졌습니다.”

“알겠다. 바로 준비해서 가지.”

“예. 삼십 분 안쪽까지 길드로 오시면 됩니다. 그럼 이만.”

딱 식사가 끝날 때 온 소집령이었다.

이진한은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매무새를 정돈하며 일행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일찍 나가게 될 줄은 몰랐네.”

“생각보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듯합니다.”

미르엘이 떠나간 남자를 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예비 인원이 있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방금 용병 등록을 마친 자신들까지 소집했다는 것은 광산에서 거친 싸움이 일어나 대규모 인력 충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자, 그럼 가보자. 겸사겸사 미스릴도 얻으면 좋겠네.”

밖으로 걸어 나가며 외투를 걸친 이진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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