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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27화 (127/210)

◈ 127.

어둠으로 뒤덮인 기나긴 통로 가운데 단조로운 발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남자는 권태로운 표정과 함께 앞으로 나아갔고, 이내 커다란 철문과 마주했다.

끼이익.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스스로 열리며 안쪽으로 그를 인도한다. 벽에 걸린 횃불이 일렁거리며 푸른 빛을 비추자 남자는 철문 너머의 공간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각쟁이들은 여전하군.”

널찍한 공간으로 가운데가 텅 빈 원형 탁자가 놓여 있다. 그 주위를 따라 놓인 열두 자리에 앉아 있는 인원은 방금 들어온 남자를 포함해 고작 넷뿐이었다.

“드래곤의 습격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멀쩡한가.”

“이곳은 용케 피해갔나 봐. 아무렴 지하 깊숙한 곳에 있으니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눈치채지 못했겠지.”

일 좌를 차지하고 있던 여인이 담뱃대를 가볍게 털어내며 조소를 흘렸다.

「원탁(圓卓)」

동서 두 대륙을 대표하는 ‘진짜’ 강자들의 회합이었다.

큰 세력의 뒷배나 보유한 재화는 둘째로, 일신에 지닌 무력만을 압도적인 기준으로 세워 나열한 대륙 최강의 십이인.

역설적으로 그들 대부분 큰 세력이나 국가를 이끌고 있었다.

“정직한 사람들만 손해를 보는 모임이란 말이야.”

검은 일색으로 치장한 여인이 입에서 새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한 보랏빛 머리카락, 의복과 반대되는 새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미녀의 이름은 레이첼 프라하리슈.

「발푸르기스의 마녀」라 불리는 대마도사였다.

“프라하리슈 공께서 이해하시오. 하루 이틀이 아니지 않소.”

기다란 머리를 단정히 묶어 뒤로 넘긴 미남자가 두 눈을 감은 채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 검객으로, 그 검 앞에 선다면 상대 역시 맹인이 되어버린다는 뜻을 담아 「무광(無光)」이라 칭송받는 칼슈아 리히테나워였다.

“….”

연녹색 머리카락을 지닌 미녀가 담담한 눈빛으로 장내를 응시했다.

대수림의 주인이자 하이 엘프로 정령왕과 계약을 맺은 정령사, 가니온. 그녀는 은연중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고귀한 하이 엘프께서 자리하셨다니. 놀랄 일이로군. 내 기억으로는 오 년 전부터 원탁에 불참하신 걸로 아는데.”

방금 철문을 넘어 장내로 들어온 남성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물었다.

잿빛 머리카락이 위로 삐죽삐죽 솟아올라 있는 그는 어쌔신 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일컬어지는 「불가사리」 조니악이었다.

그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가니온에게 슬쩍 추파를 던졌다. 실력에 충분히 자신이 있었고, 자신 정도라면 그녀 정도의 여인을 반려로 얻을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

하지만 가니온은 일언반구도 대응하지 않았다.

마치 하찮은 벌레가 윙윙거리고 있는 것처럼 일절 신경 쓰지 않을 따름이었다.

“감히….”

“그만 좀 해. 그 같잖은 성욕은 다른 곳 가서 풀고, 조금 더 생산적인 이야기나 하자 제발.”

보다 못한 「발푸르기스의 마녀」 레이첼 프라하리슈가 핀잔을 주었다.

조니악은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며 어깨를 으쓱이면서도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끝까지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이것도 나름 생산적인 행동인데 말이야. 그렇지 않나?”

“….”

레이첼이 경멸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조니악은 여유로운 태도로 그것을 즐기며 웃음을 토해냈다.

“그래서, 모임을 소집한 건 누구지? 정기 모임까지 이제 두 달도 남지 않았는데 어지간히 급한 안건인가 봐.”

원탁의 회합은 일 년마다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다.

올해 정기 회합까지는 고작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 3년에 한 번씩 생기는 소집 권한으로 회합을 열다니.

조니악은 무슨 일 때문에 그런 것인지 궁금했지만, 평소 볼 수 없었던 하이 엘프가 자리한 것으로 보아 그녀가 이 회합의 주최자라고 예상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더 기다려보지요. 아직 약속된 시각까지는 조금 남아있지 않습니까. 다른 분들도 슬슬 도착하시고 있고요.”

「무광(無光)」의 칼슈아 리히테나워가 문가를 바라보며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왔다.

눈이 보이지 않는 주제에 무언가를 보는 것이 웃기지만, 그만큼 존재를 파악하는 기감이 발달했다는 사실은 유명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의 말대로 두 명의 인원이 저 너머의 통로를 넘어서 이곳에 도달했다.

“흠.”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터질듯한 근육을 지닌 거한이었다.

상체는 훤히 드러냈으면서 머리엔 정체 모를 짐승의 머리 가죽을 모자처럼 쓰고 있다.

태초의 반신(半神)이자 영웅 헤라클레스의 핏줄을 이어받은 에우리스테우스였다.

“안녕하세요!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네요!”

등에 한 자루의 창을 맨 채 발랄한 분위기로 좌중에 인사를 건넨 여인은 가장 최근에 원탁에 들어온 신예, 나찰(羅刹) 나탈리 데이머였다.

“어머, 사이 좋아 보이네? 함께 오고 말이야.”

“입구에서 만났거든요.”

원탁의 절반이 채워졌다.

그렇게 얼마가 더 지났을까, 참석자는 이것으로 끝인 듯해 보였기에 반절의 인원으로 회합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누가 회합을 여신 거예요?”

나탈리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발푸르기스의 마녀」

「무광」

「불가사리」

「대수림의 하이엘프」

「헤라클래스의 계승자」

그리고 「나찰」인 자신까지.

이 화려한 면면을 불러 모을 필요가 있는 의제는 무엇일까.

“난 아니야.”

“소인도 아니오.”

“나도 아니다. 막내, 너도 아닌 듯해 보이고 그쪽 덩치도 아닌 것 같으니 답은 한 명뿐인 것 같은데.”

대수림의 하이 엘프에게로 이목이 쏠렸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가니온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아니에요.”

“…참나, 주최자가 아직도 오지 않았다고? 바쁜 사람들을 불러놓고 간도 크군.”

쿵.

조니악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원탁을 두드렸다.

회합에 참석한 건 단순한 호기심 때문.

굳이 바쁜 시간을 쪼개 온 것인데 이렇게 시간 낭비할 여유는 없었다.

“그러니까 의장 뽑자고 했잖아.”

“그 귀찮은 자리를 누가 할 건데. 네가? 아니면 내가?”

레이첼이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다른 이들 역시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을 따름이었다.

“아, 주제 이탈해서 죄송한데 혹시 누구 드래곤 사체 주운 것 좀 있나요?”

그때 나탈리는 문득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드래곤 사체?”

“네. 여기 마경에서 누가 드래곤을 쓰러뜨렸다면서요.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비닐 조금이라도 괜찮으니까 얻으신 분 있으면 저한테 팔아주세요. 값은 후하게 쳐 드릴게요.”

“여기도 구한 사람 없을걸? 아마 내가 제일 먼저 수소문 해봤을 텐데 비늘은커녕 터럭조차 남아있지 않더라고. 재주도 좋아. 혼자서 그 큰 걸 다 가져갔으니.”

레이첼이 손톱을 살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마도사인 그녀에게 있어서도 드래곤의 사체에서 얻을 수 있는 부산물은 최상급 재료에 속했다.

그렇기에 이리저리 사람을 풀어 조금이라도 구하려 시도해봤지만, 치열한 전투 흔적만 남아있을 뿐 흘린 비늘조각이나 깨진 발톱조차 구할 수 없었다.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위명답게 그 행적도 화려하더군. 여차하면 원탁에 편입될 가능성도 있으니 막내는 긴장해야겠어.”

조니악이 히죽 웃으며 레이첼을 바라보았다.

원탁의 일원은 공식적으로 서열이 없지만, 강자들이 모이는 자리이니 암묵적인 상하관계가 있었다.

만일 새로운 원탁의 후보가 생긴다면 그 상대는 막내인 「나찰」 나탈리 데이머가 될 터.

그녀는 자신을 향하는 말에 싱긋 웃으며 여유로움을 표했다.

“그러게요. 화려하게 했더라고요. 저도 나름대로 조사해봤는데 마왕 숭배 교단을 비롯해 고대 악마까지 쓰러뜨렸다는 걸요.”

“아, 나도 들었어. 현자의 계승자라고 하던데?”

“현자? 무슨 현자.”

“현자 하면 하나밖에 없지. 《지혜》의 검은 현자를 말하는 거다. 베르하임 국왕이 직접 공인했다는 걸로 보아 아마 사실일 가능성이 커.”

“아, 그 블랙 워커의 우두머리? 말만 왕국이지 검은 현자를 숭배하는 광신도 놈들이잖아.”

“그러니까 믿을만하다는 거다. 추종자로서 자존심 높은 그들이 인정할 정도라면. 그간 행적도 보인 무력도 예사롭지 않고 말이야.”

“하. 고대 영웅을 언제까지 우려먹을 생각인지. 천년도 더 지난 구닥다리들 아닌가.”

“…말조심해. 원탁의 존재의의가 영웅들의 공백을 채우기 위함인 걸 몰라?”

“조심하지 않으면 어쩔 거지? 그 몸으로 날 즐겁게라도 해줄 것인가? 저기 하이 엘프보단 좀 아쉽지만, 그것 나름대로 환영인데 말이야.”

조니악의 음흉한 눈빛이 그녀의 몸을 훑었다.

명백히 선을 넘은 언사에 레이첼의 얼굴이 싸늘해지며 그 눈동자로 위험한 빛이 일렁거렸다.

“너….”

저벅.

「발푸르기스의 마녀」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끓어오를 찰나, 닫힌 철문 너머로 다분히 의도적인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막대한 압력이 장내를 찍어누른다. 보통 사람이라면 장기가 짓눌러 터져 나갔을 정도의 힘이었지만, 각자 한 명 한 명이 인간을 초월한 강자인 그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문 쪽을 바라보았을 따름이었다.

끼이익.

철문이 열리며 그 사이로 치렁치렁한 붉은 머리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장내에 자리한 면면을 보며 씩 웃고는 가볍게 손뼉을 두드렸다.

“무례를 사과하지. 분위기가 좋지 않아 보여서 말이네.”

“…다리우스?”

「나찰」 레이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남자는 원탁의 멤버가 아니었다.

패력(覇力)의 다리우스.

오스칼 제국의 일인자인 검성의 후계자.

그는 자신을 향한 의문 어린 시선에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스승님을 대신해서 왔네.”

“하긴. 검성 그 양반은 이제 늙었으니 거동하기도 힘들 테지.”

“아하하하. 그 말대로네. 그러니 다들 이해해주길 바라네. 스승님께선 나이가 많으시지 않은가.”

도발하는 듯한 조니악의 말에 다리우스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실제로 검성의 나이는 100살이 넘었다. 원탁 가운데서 그보다 나이가 많은 것은 대수림의 하이엘프 가나온과 다른 한 명뿐. 그 이외에는 모두 비교적 젊은 나이대였다.

“…당신도 나온 걸 보니 그에게 관심이 있나 보오?”

다리우스의 시선이 가나온에게 향했다.

대수림의 하이엘프는 그것을 피하지 않은 채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쪽과 마찬가지로요.”

“하하하. 다행이로군. 회합을 소집한 건 그 때문이었으니.”

“검성이 원탁의 회의를 소집했다고?”

“그렇네. 의제는 작금 등장한 드래곤 슬레이어에 대해서네.”

모두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드래곤을 쓰러뜨린 것이 대단한 업적이긴 하지만, 굳이 자신들까지 불러 모을 사안인가. 적어도 여기 있는 이들 중 자신이 드래곤과 싸워 이기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새로운 강자의 등장은 언제나 환영하는 법이지요.”

“마찬가지야. 듣자 하니 마법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다던데. 원탁에 영입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무광」 칼슈아와 「발푸르기스의 마녀」 레이첼이 말을 보태자 다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을 쓰러뜨렸다는 건 이쪽에서 사실임을 확인했다. 뒤이어 나온 그 행적들 역시 마찬가지지.”

“…내가 듣기로는 검호가 그와 싸워 패배했다던데.”

“검호? 검호 데미안을 말하는 것입니까?”

조니악의 말에 칼슈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눈은 없지만 말이다.

“그래. 모종의 일 때문에 서로 엮이게 되었지. 그 과정에서 검호와 드래곤 슬레이어의 충돌이 있었고 검호가 죽었다.”

“허어 그 애송이가.”

“애송이는 아니지. 순수 무력으로 따지자면 우리 막내보다 조금 약한 정도일걸? 싸움에 미친 녀석이라 그렇지 기술의 완성도는 검성의 제자 중 발군이었어. 뭐, 그래도 후계자인 다리우스의 발톱만도 못하지만.”

“과찬 고맙네. 하하.”

다리우스는 탁자에 두 손을 내려놓았다.

“스승님께서 그에게 관심을 가지셔서 말이야. 어떤가, 드래곤 슬레이어 정도라면 원탁에 들어와도 괜찮지 않을까 싶네만.”

“음.”

그 말에 다른 여섯은 생각에 잠겼다.

‘정말 그 이유일 리는 없겠지.’

레이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검성은 체면과 명성을 중요시한다. 자신의 제자를 꺾은 자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는 만무할 터.

그러니 굳이 다리우스까지 움직여 그를 포섭하려는 것이었다.

만일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쓸만한 장기 말을 얻는 것이니 그것대로 좋고, 거절한다면….

“문제가 있어요. 지금 원탁의 인원은 전부 찼는데, 그러면 제가 테스트를 봐야 하나요?”

「나찰」 나탈리가 살짝 불안한 표정으로 손을 들며 말하자 다리우스는 안심하라며 고개를 저었다.

“한 가지 더 전해야 할 소식이 있네. 아이작 대마도사께서 타계하셨어.”

“…그 노인네가?”

원탁의 일원 중 한 명이었던 대마도사 아이작.

그의 죽음은 좌중을 술렁이게 하기 충분했다.

“숨을 거두기 전에 스승님께 유언을 남기고 가셨다고 하더군. 두 분께선 옛적부터 친밀한 관계셨으니.”

“막내 얼굴이 환해졌네.”

“수행 중이라 살생은 금하고 있었거든요. 어중간하게 강한 상대라면 죽이지 않고 말리기는 힘들잖아요.”

패배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였으나, 모두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원탁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절대 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였으니.

“…뭐, 당신들의 의도가 순수한지는 둘째치고 나는 찬성이야.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거든.”

“그래도 테스트는 거쳐야겠지만 말이지.”

“검은 현자의 계승자라. 본인도 흥미가 있소. 과연 전승처럼 그 계승자도 올마스터일지 궁금하오.”

「발푸르기스의 마녀」가 찬성을 표하자 다른 이들 역시 긍정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알고 추진하겠네.”

다리우스는 씩 웃으며 의제를 마쳤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자들일수록 쉽게 속여 넘길 수 있기 마련이다.

전부 두루뭉술한 핑계로 점칠 된 이야기였지만, 그들은 크게 의심하는 기색 없이 이쪽의 말을 따라준 것이 바로 그 증거.

다리우스는 스스로 대륙의 최강이라 자부하는 이 원탁이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

“…엣취.”

“감기에요?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

“그러게. 아니면 누가 내 험담을 하고 있나 봐.”

“그러니까 평소 행실 좀 바르게 하지 그랬어요.”

“내가 뭘 어쨌다고.”

고작 기침 한 번으로 일레이나에게 타박을 들은 이진한으로서는 억울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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