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가고마일 광산은 현재 다모라와 니헤임 두 왕국의 분쟁 지대로 떠 오르는 기슈발 지역에 있는 광산입니다.”
이틀 뒤, 이진한의 부탁을 받은 베르하임 국왕은 가고마일 광산에 대해 상세한 조사를 끝마친 뒤 그에게 보고 중이었다.
“분쟁 지대?”
“예. 애초에 기슈발은 두 왕국의 중립 지대였습니다. 세금을 비롯해 그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은 각각 반 절씩 맡기로 되어 있었지요. 하지만 반년 전부터 광산에 순도 높은 미스릴 광맥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는 바람에….”
“서로 욕심이 생겼군.”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서로 권리를 입증할 수 있는 땅에서 일어난 일이라 금상첨화이기까지 했으니.
“대게 그냥 손잡고 반반씩 먹는 게 가장 효율적인 일이지만, 아무렴 순도 높은 미스릴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마음이 바뀌었겠지요.”
“두 왕국 뿐만의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맞습니다. 아직 은연중에 떠도는 소문이지만, 다모라 왕국 뒤엔 여러 열강이, 니헤임 왕국 뒤에는 리베라 제국이 지원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파다합니다.”
제국, 열강.
이권 분쟁 지역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들이었다.
“혹시 미스릴이 필요하신 겁니까? 저희도 순도 높은 미스릴 광산을 세 개 보유하고 있지요.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 구해다 드릴 수 있습니다.”
굳이 이런 분쟁 지역의 조사를 맡긴 이유가 무엇일까.
베르하임 국왕은 그의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 슬쩍 운을 띄웠으나, 이진한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스릴이 아니다. 영원의 결정이란 걸 찾고 있어서 말이야. 옅은 보랏빛이 나는 작은 보석 형태지.”
“영원의 결정….”
그로서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보석이었다.
하지만 계승자가 원하고 있으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것도 다방면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부탁해.”
“그리고 말씀하신 용병 신분증입니다. 베르하임 왕국의 인증을 받은 용병이라면 대부분의 검문을 통과할 수 있을 겁니다.”
베르하임 국왕은 각각의 이름이 들어간 신분증 네 장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기슈발에선 소규모 국지전뿐으로 전면전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온갖 정황이 파국이 머지않았음을 알려왔다.
그런 가운데 드래곤 슬레이어를 비롯해 화려한 면면들이 등장한다면 단번에 시선을 끌어모을 터.
그러니 영원의 결정을 발견할 때까지는 최대한 조용히 움직일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 이단 심문관이네요. 듣자 하니 따라오려고 한다면서요.”
한쪽에서 차를 마시며 조용히 있던 일레이나가 말하자 엘레오노라와 미르엘 역시 고개를 끄덕여왔다.
“여기까지 추격해올 정도로 끈질기니 말이죠.”
“어떤 식으로든 뒤따라올 겁니다.”
“확실히.”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성국의 대답을 받을 때까지 찾아오지 말라고 했지만, 계속해서 주변을 맴도는 꼴을 보아하니 저쪽까지 따라올 것이 분명했다.
‘반쯤 죽여 놓으면?’
다리라도 분질러 놓는다면 따라오지 못할 터.
아니, 그러면 신성력으로 금방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여러모로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중간으로 나서겠습니다. 계승자님과 연락하고 싶다면 저를 통하라고 말이지요.”
“귀찮을 텐데 괜찮겠어?”
“문제없습니다.”
연락책이라니.
일국의 국왕이 할 법한 일은 아니었지만, 베르하임 국왕은 오히려 기꺼운 표정이었다.
‘계승자님과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구실로 더없이 좋다.’
지금은 특정한 세력을 구축하지 않고 개인으로서 대륙을 돌아다니시지만, 유사시에는 그를 중심으로 대륙의 인재가 모일 것이다.
검은 현자를 숭상하는 베르하임 국왕은 그의 추종자이자 제 일의 심복으로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기꺼이 그 역할을 맡기로 했다.
“검은 현자의 계승자이신 베르너 님이라면 오히려 기쁜 일이지요. 혹시 거점도 필요하십니까? 영지를 하나, 아니 부담스러우시다면 왕도에 저택을 준비해놓겠습니다. 드린 신분증으로 사용할 수 있으시도록 조치해놓지요.”
“그렇게까지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이진한은 괜히 미안해져서 뺨을 긁었다.
그토록 검은 현자란 존재가 베르하임 국왕에게, 이 나라에 중요한 것일까.
본인도 아니고 계승자라 밝혔을 뿐인데 이토록 융숭한 대접을 해주다니.
“언제 출발하실 예정이십니까?”
“기다릴 것 없이 바로 떠날 생각이다. 다 준비된 와중에 시간을 쓸 필요가 없지.”
이진한은 슬쩍 시야 한쪽을 바라보았다.
【715:05:24】
맥스웰과의 싸움 이후 사흘 내리 잠에 빠져 있었고, 그 뒤에도 이틀이나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전과 비교하자면 크게 여유로워진 것은 맞지만, 서둘러 영원의 결정을 취득해 시간의 유예를 늘리고 싶었다.
“그러시군요. 하루만 더 계셨다 갔으면 좋겠지만, 알겠습니다. 이쪽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촐하게 송별 연회라도 준비하려고 했던 베르하임 국왕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셨다.
왕궁의 텔레포트 게이트.
이진한의 부탁으로 떠나는 그들을 배웅하는 이는 베르하임 국왕 혼자뿐이었다.
“부디 그곳에 가셔도 하시고자 하는 일을 무사히 완수하시길 바랍니다.”
“…뭔가 엄청 거창한 일인 것처럼 말하는 데 진짜 개인적인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이진한이 질색하자 베르하임 국왕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어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그때까지 건강하시길.”
일레이나부터 엘레오노라, 미르엘이 먼저 게이트를 오른다.
이진한은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다가 자신 옆에 선 베르하임 국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나 말할 게 있는데….”
“아, 말씀하십시오. 부탁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베르하임 국왕은 기꺼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한 것이라면 자신의 힘으로 처리할 수 있다. 이렇게 뜸을 들이는 것을 보니 제법 어려운 안건임이 분명했다.
“사실 내가 검은 현자다.”
“예.”
“…?”
“…?”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진한은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베르하임 국왕은 뭐 그리 당연한 이야기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멀뚱히 시선을 보냈다.
“알고 있었다고?”
“…예? 계승자께서 검은 현자이신 건 당연하시지 않습니까.”
대화의 아귀가 맞물리지 않는다.
이진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쪽을 바라봐오는 그 시선에 베르하임 국왕이 자신의 말을 착각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 계승자로서 그 이름을 물려받았다는 게 아니라, 내가 천 년 전 고대 영웅으로 이름을 올렸던 《지혜》의 검은 현자 본인이라고.”
“…예?”
그제야 말뜻을 깨달았는지 베르하임 국왕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게 무슨 이야기 신지….”
혹시 무언가의 저의가 있는 것인가.
천 년 전의 고대 영웅이 본인 자신이라니.
아무리 계승자의 말이라도 쉽사리 믿기 힘든 이야기.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묻자, 이진한은 씩 웃으며 계단 위로 발을 걸쳤다.
파아앗-!
기하학적인 문양이 주위를 가득 채우며 시커먼 깃털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곧 그 가운데 오스칼 제국을 뜻하는 문양과 검은 현자의 상징인 초승달이 새겨지며 한 줄의 문장이 떠올랐다.
『검은 현자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며.』
물론 이것만으로 그가 검은 현자 본인이라는 것을 입증할 순 없다. 고도의 마법으로 짜인 술식이었지만, 높은 경지의 마도사가 작정하고 흉내 내고자 한다면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베르하임 국왕은 흩날리는 고귀함에 감히 그것이 거짓이라 의심할 수 없었다.
‘…그런.’
일순간 머리가 번뜩이며 아귀가 맞아들어가기 시작했다.
단순히 계승자라고 하기에 그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
보관소에서 과거 자신과 동료들에 관한 기록을 읽을 때의 아련한 모습이며, 잘못 적힌 것에 분개하는 모습까지 전부 그 본인의 것이라 그랬던 것이리라.
-어둠이 창궐할 때, 과거의 빛이 깨어나리라.
불현듯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그 목소리에 베르하임 국왕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용사, 검은 현자, 과거의 빛.
계승자 따위가 아니라 검은 현자 본인이라면.
‘과거의 빛’이 깨어난다는 표현은 더 없이 들어맞는 것일 터.
세기의 발견을 한 과학자처럼 그의 두 손이 덜덜 떨리며 흥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베르하임 전하!”
“…유리아 공.”
저 멀리 유리아가 모습을 드러내 큰 소리로 불러왔다.
근위 기사에게 이곳에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명했기에 제지당한 상태였지만, 베르하임 국왕은 가볍게 손짓한 것으로 포위를 풀고 그녀를 앞으로 불렀다.
“무슨 일이지.”
“용사님께선, 베르너 님께선 떠나셨습니까?”
호흡까지 거칠어진 것이 상당히 급한 모양새였다.
지금까지 자신과 마주하던 이가 검은 현자의 계승자가 아니라 그 본인이었다는 충격에 빠져 있던 베르하임 국왕은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동료분들은 알고 계시겠지. 그 이외라면 이전에 지나오셨다는 이터널의 마탑주 정도려나. 그는 《영원》의 계보를 잇고 있으니 서로 협력을 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가운데 그저 검은 현자의 추종자인 자신에게까지 진실을 알려주었다는 것은 이쪽의 쓸모를 입증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감격에 차올라 눈물이 흘러나올 지경.
하지만 베르하임 국왕은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며 다급한 표정으로 자신을 재촉하는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렇다, 떠나셨지.”
“행선지는 어디입니까.”
“계승자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나. 성국의 대답을 듣기 전까진 찾아올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을 텐데. 벌써 답변이 왔나 보지?”
“…큭.”
유리아는 입술을 씹으며 텅 비어버린 텔레포트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그 뒤를 따라나서야 했지만, 걸림돌이 너무 많았다. 어떻게든 그를 성국으로 인도해야 하거늘 이토록 도와주지 않는가.
“계승자께서 전언을 남기셨네. 앞으로 그분과 연락하고 싶으면 내게 이야기하라고. 나는 그분과 직결되는 통신구가 있으니 말일세.”
“그런.”
유리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검은 현자의 계승자 정도 되는 이가 떠나는 것이니 적어도 조용한 송별식 정도는 열 줄 알았기에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거늘, 이건 명백히 예상외의 상황이었다.
“그러니 경고하겠네. 이 이상 계승자님을 귀찮게 했다간.”
베르하임 국왕의 두 눈이 번뜩였다.
“베르하임 왕국 전체가 성국을 막아서겠다고 말이야.”
전쟁이라도 불사할 그 기세에 유리아는 긴 한숨만을 내쉬었을 따름이었다.
***
“그런데 알려줘도 괜찮았던 거예요?”
텔레포트 게이트 통과 이후 니헤임 왕국의 도시로 내려온 일레이나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현재 그의 진정한 정체를 아는 이는 여기 있는 셋을 포함해 마탑주 뿐이었다. 그만큼 앞으로의 국면에 중요한 사실일 터인데 과연 베르하임 국왕은 믿을만할지 신중한 일레이나는 아직 판단이 서질 않았다.
“괜찮으신 분 같던데요. 베르너 님을 보는 눈빛에 존경이 가득했어요.”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 한 걸음 더 내디딘다면 조금 위험한 감정으로 바뀔 것 같긴 했지만.”
동료들의 이야기에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밝혀야 할 이야기니까.”
아직은 가정의 이야기였지만, 마계가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내 대륙을 침공한다면 구심점이 될 존재가 필요로 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진한은 가장 효과적인 타이밍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자신이 고대 영웅 중 하나인 검은 현자라는 것을 밝힐 예정이었다.
아마 단숨에 이 대륙의 구도를 휘어잡을 수 있을 터.
“미리미리 준비해야지.”
베르하임 국왕의 영입은 그 가운데 사소한 계획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