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쉬식, 캉!
분광십이검의 초식이 허공에 수놓아지며 빛살 같은 검격을 뽐냈다.
이전이라면 모두 가볍게 피해냈겠지만, 지금은 세 번에 한 번꼴로 피할 수 없는 공격이 닥쳐 들어와 불통을 피워올리며 거칠게 검을 부딪쳤다.
‘이 정도면 대충 4성은 되었나.’
분광십이검의 5성은 절정의 경지.
마스터를 목전에 두고 있는 그녀의 실력을 생각한다면 딱 알맞은 위치였다.
물론 익힌 시간을 따져보자면 터무니없을 정도의 성장세였지만, 그 스승이 누구인가.
입신지경에 오른 고수와도 같은 존재가 직접 가르쳐 주었으니 이 정도는 해주어야 함이 옳았다.
“흡!”
미르엘은 짤막한 기합과 함께 힘껏 허리를 비틀었다.
이전에 남아있던 대검을 쓰는 습관의 잔재는 거의 사라진 상태.
힘과 육체의 의존한 것이 아닌 기술과 정교함의 날카로움이 검 끝을 뒤덮었다.
분광십이검 일 초식 「무광일섬(無光一閃)」
무채색 궤적이 맹렬한 기세로 허공을 꿰뚫는다. 이진한은 검을 비스듬히 기울여 그것을 흘려내려 했지만, 서로의 검이 닿기 전 미르엘의 검 끝이 기묘하게 구부러졌다.
‘거기서 방향을 꺾어?’
초식이 발출된 도중 궤도를 수정하는 것은 큰 무리가 뒤따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 평온한 표정을 보아하니 이제껏 여력을 숨긴 듯싶었다.
핏─!
프로스트의 끝이 머리카락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황급히 고개를 꺾지 않았더라면 뺨에 실선이 그어졌을 정도로 날카로운 일격. 같은 수준으로 대련하는 가운데 미르엘이 품고 있던 비책은 제법 매서운 것이었다.
“실력을 숨겼구나.”
“어떤가요?”
미르엘은 프로스트를 거둔 채 반짝거리는 두 눈으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저 실력을 숨긴 것이라면 괜찮았으나, 자신의 시선마저 속일 정도로 철저하게 그것을 가장했다는 것이 제법 대단하게 느껴졌다.
“한 방 먹었네. 이대로만 하자.”
“더 열심히 할 거예요.”
“조금 살살해도 되는데. 무서워지네.”
이진한은 살짝 잘려 나간 머리카락의 끄트머리를 매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찌 이리 기특할 수가 있을까.
그녀들이 강해질수록 자신이 해줄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 하다못해 마스터 중상급만 되어도 갖가지 성장 플랜과 장비들로 몇 배는 더 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었으니 하루빨리 그날이 오길 바랄 뿐이었다.
“아앗! 치사하게 둘이서만 대련하고 있었어요!”
“나오면 알려달라고 했잖아요!”
그때 수련장의 문이 열리며 두 인영이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쏟아지는 잔소리에 이진한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중요한 수련 중이었다며. …그리고 꼴이 왜 그래? 이건 또 무슨 냄새고.”
둘 다 미모는 여전했지만, 머리는 부스스했고 눈 밑이 거뭇거뭇한 것이 한껏 초췌한 모습이었다.
화룡점정으로 코끝을 스치는 탄 내와 쉰내 나는 악취는 이진한이 질색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앗.”
“윽.”
둘은 깜빡했다는 듯 황급히 매무새를 살핀다. 그러곤 클린 마법으로 불순물을 정화했고, 얼굴을 붉히며 이진한을 올려다보았다.
“수련 때문에 밴 거예요.”
“그리로 당신, 그걸 직설적으로 말하기 있기에요? 여성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요!”
“아니, 딱히 뭐라고 한 건 아닌데….”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대놓고 언질을 주었기에 그는 한 발자국 물러나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미르엘만 아니라 둘도 제법 성장했네.’
Lv.511 「엘레오노라 폰 오스칼」
Lv.695 「일레이나 유클리드」
처음 만날 당시 3클래스 초입에 불과했던 엘레오노라는 어느새 당당히 5클래스에 도달해 있었다.
이제 한 클래스만 더 성장한다면 일레이나와 같은 마도사의 칭호를 부여받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일레이나는 올라간 레벨은 둘보단 적지만 경지가 경지인 지라 지금의 성장 폭 역시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7클래스를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을 보니 새삼스럽게 그녀가 천재라는 것이 실감 되었다.
“좋아. 너희도 확인해봐야겠지.”
“그럼 저 먼저 괜찮죠?”
엘레오노라가 동의를 구하자 일레이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마지막으로 점검 좀 하고 있을게요.”
“천천히 하세요. 꽤 걸릴 테니까.”
엘레오노라는 소매를 걷으며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완드를 쥐었다.
“규칙은 이전과 같아. 엘레오노라 너와 같은 수준의 힘만 쓸 거다.”
“문제없어요.”
파앗-!
곧 미르엘과 일레이나가 거리를 벌리며 물러났을 때, 엘레오노라의 주위로 찬란한 마력의 파장이 휘몰아쳤다.
잔뜩 영약을 먹이고 좋은 장비와 아티팩트를 쥐여주어서 그런 것인지 기존 5클래스 마법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내뿜었다.
이진한이 흐뭇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찰나, 날카로운 질풍이 수십 갈래로 갈라져 쏜살같이 쇄도해왔다.
“깔끔하네. 술식에 군더더기는 없어. 마력 제어도 비효율적인 부분도 안 보이고.”
이진한은 제자리에 서서 그녀와 마찬가지로 바람을 일으켜 고정력을 가진 두꺼운 방벽을 만들어냈다.
질풍의 칼날은 그 위를 무차별적으로 난자하며 매서울 정도로 기세로 허공을 찢어발겼다. 하지만 그 너머에 있는 이진한에겐 얕은 미풍조차 도달하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화륵!
엘레오노라의 공격은 당연히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질풍의 궤적을 타고 치솟아 오른 시뻘건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순식간에 주위를 집어삼킨다. 마치 의지를 지닌 것처럼 그의 앞에 자리한 방벽을 우회해 날카로운 이빨을 뻗어왔다.
“술식의 커스텀까지? 이건 가르쳐준 적 없는데.”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혼자 생각했던가, 아니면 일레이나의 도움을 받았던가. 어찌 되었든 그녀의 경지에서 발동한 마법을 이 정도까지 다룬다는 것은 칭찬할만한 일이었다.
물론 당해주는 일은 없었다.
펑-!
바람을 끌어모아 압축한 이진한은 불꽃 가운데서 그것을 사정없이 풀어헤쳤다.
본래라면 불길이 힘을 얻어 더 날뛰게 만들 수 있는 미친 짓이었지만, 완벽하게 통제된 바람의 흐름이 진공 상태를 만들어 불씨를 아예 꺼트려 버렸다.
“이제 어쩔 거지? 바람, 불, 다음은 물이랑 흙인가?”
이진한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직전까지 바로 앞에 있던 엘레오노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력의 흐름은 없었다. 아니, 그 파장에 묻어간 건가?’
대현자의 눈을 비롯해 여러 기감을 강제로 억누른 상태라 마법의 발현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단거리를 도약하는 「블링크」? 아니라면 모습을 숨기는 「인비져블」?
쐐애애액!
귓가를 스치는 파공성에 이진한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곧바로 실드를 펼쳐 뒤를 막았지만, 부질없이 부서진다. 그렇기에 하는 수 없이 손을 뻗어 자신에게 닥쳐오던 무언가를 잡아냈다.
“…이건.”
마력으로 단조던 기다란 창끝이 손안에서 웅웅거리며 반항적인 소리를 내뿜었다.
엘레오노라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려온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완드에 이런 기능이 있다고 알려주셨잖아요. 한 번 응용해봤어요.”
“마력으로 신체 강화까지 하고 블링크로 이동해 온 건가. 확실히 이거면 상대를 마법사로 인식하고 있는 적에게 한 방 먹일 수 있겠네.”
“그렇죠?”
“마력을 주조해 창을 만들어낸 건 의외지만. 왜 검이 아니라 창이야?” “그야 사거리가 더 길잖아요. 공격이 실패했을 때 리스크도 생각해야죠.”
이진한이 창끝을 놓아주자 엘레오노라는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창을 휘둘렀다. 어설픈 모습은 없이 제법 날카로운 기세가 깃든 것이 하루 이틀 연습한 것이 아닌 듯해 보였다.
“기본적인 움직임은 제가 알려드렸습니다.”
지켜보고 있던 미르엘이 사뭇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그 모습에 이진한은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었다.
‘배틀 메이지도 괜찮을 것 같은데.’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해 전선에서 함께 싸우는 근거리 형 전투 클래스.
신체가 나약한 마법사의 피지컬로는 힘들긴 하지만, 제대로만 육성한다면 어지간한 무투 클래스보다 더 큰 파괴력을 낼 수 있기에 일부에게는 각광 받는 클래스였다.
“…좋네. 이 부분은 나랑 나중에 좀 더 생각해보자.”
“네. 그러면 저는 통과인가요?”
“100점이다. 칭찬의 의미로 뽀뽀라도 해줄까?”
“그걸로는 부족한데요.”
“….”
농담 삼아 던진 말에 진지한 기색으로 대답해왔다.
이진한이 움찔하며 한 발자국 물러나자 그녀는 얼굴을 가까이하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만간 밤에 찾아갈게요.”
“…뭐?”
찾아와서 뭘 한단 말인가.
이진한의 얼굴이 달아올랐을 때, 엘레오노라는 자신의 차례가 끝났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태도와 함께 종종걸음으로 물러났다.
“…뭐라고 했길래 그런 표정을 지어요?”
자신의 차례를 위해 앞으로 나아온 일레이나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그와 엘레오노라를 번갈아 보았다.
이진한은 가볍게 고개를 젓는 것으로 묘한 기분을 털어내곤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됐고, 일레이나 너도 성과는 있었겠지?”
그 물음에 일레이나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성벽에서도 보셨잖아요.”
삼라만상의 열화판 「사계」.
「무간」을 응용해 구현한 「애드」.
어느 것 하나 예사로운 수준이 아니었다.
파아앗-!
곧 그녀는 「사계」로 「애드」를 발동해 무수히 쪼개진 공간들로 구성된 무한에 가까운 장벽을 구축했다.
이진한은 그 위로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눈으로는 바로 앞에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공간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일레이나에겐 도달하지 못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긴 한데 신기하네. 이런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구나.”
“공간을 무수히 쪼개 이어 붙였어요. 완성의 형태가 아니라 상시 발동되는 방식이라 지금 이 순간에도 저랑 당신의 거리는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서로 대화는 어떻게 하는 거지? 목소리는 공기라는 매질을 타고 전해지는 거잖아.”
“무수히 쪼개진 상태지 분리된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 부분은 제 연산을 통해 선택할 수 있어요.”
“과연.”
이진한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대현자의 눈으로 「애드」의 술식 해석을 끝마쳤다.
제법 쓸만한 기술이었지만, 그에겐 이러한 현상을 대체할 다른 스킬이 많다. 일레이나야 《영원》의 계보를 잇기에 이쪽에 집착하는 것이지 이진한으로서는 굳이 사용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아직 비효율적이라는 건 알지?”
“네. 그 부분은 연구가 조금 더 필요한 것 같네요.”
“몇 군데 집어줄 수는 있는데, 네 경지면 스스로 찾아서 고치는 편이 더 좋을 거야.”
“저 둘은 친절하게 알려주더니 편애가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일레이나는 사뭇 툴툴거렸지만, 자신의 성과를 인정받아 기쁜 얼굴이었다.
“그러면 다음 행선지는 어딘가요? 아, 그 이단 심문관은 만났나요? 신성 왕국에서 왔다는 파란 머리의 여자요.”
“이미 만났고 대충 이야기도 끝냈다. 용사의 증명을 받으러 신성 왕국으로 가야 한다고 하던데.”
“그러면 다음 행선지는….”
“어림도 없지. 누구보고 오라 가라야.”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일레이나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다음 행선지로 어디를 정해야 하는가.
이때까지는 물 흐르듯 움직였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고대 영웅의 유적지로 가봤자 별다른 것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지금 당장 신성 왕국에 가기에는 무언가 꺼려졌다.
“…이게 나타나지 않았으면 갈팡질팡할 뻔했어.”
[영원의 결정 → 수집률: 2.5%]
[세 번째 조각의 위치가 탐지되었습니다.]
◎잿빛 여왕의 티아라(레전더리)
위치: 가고마일 광산
얼마 만에 등장한 영원의 결정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