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인정? 신성 왕국의 중앙 교단으로 오라고? 나보고?”
“어, 어…. 대대로 용사의 존재는 성국만이….”
“이 힘을 여신이 줬다는 증거도 없잖아.”
“…그러니 검증을 받는 겁니다. 그리고 외람되지만, 말씀에 주의 부탁드립니다. 방금 그 발언은 자칫 신성 모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 힘을 내려주실 수 있는 건 여신님뿐입니다.”
“신성 모독하면 어쩔 건데. 용사라며?”
유리아는 잠시간 말을 멈칫거렸다.
오해를 풀었음에도 그가 이런 태도로 나오는 것이 이해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나는 마기도 다룰 수 있으니 네 말대로라면 이 힘은 마왕이 내려준 건가?”
“…그건.”
“용사의 이야기는 틀림없겠지. 너뿐만 아니라 지금껏 나와 싸웠던 마인이나 마족 역시 모두 같은 말을 했다. 그런 것을 보면 내가 용사인 것은 틀림없겠지.”
당연하지 않은가.
유리아는 목 끝까지 솟아오른 말을 겨우 삼켰다. 그 찬란했던 빛을 피워내는 것이 용사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그가 보이는 반응은 기존의 기록과는 확연하게 다른 것이었다.
보통은 숭고한 신념이나 거룩한 분위기로 운명을 따르겠다며 자신을 찾아온 사자를 맞이하는 법이거늘, 이 남자는 마치 길거리의 불량배처럼 자신을 겁박하고 있었다.
‘설득해야 한다.’
아직 용사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깨닫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유리아가 말을 이을 찰나, 이진한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짤막한 탄식을 내뱉으며 인벤토리로 손을 뻗었다.
스릉.
한 자루의 검이 뽑혀 나왔다.
아니, 검이라 부를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원래 새하얗게 뻗어있어야 할 검신은 처참하게 녹아 반 토막이 났고, 그 끄트머리에는 거무죽죽한 마기의 잔해가 달라붙어 조금씩 검날을 좀먹어가고 있었다.
“성검(聖劍)이다. 이름은 듀란달이라 하지. 미들턴에서 교주인 아이돈의 몸에 강림한 마왕 마르바스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이렇게 되었다.”
“성검 듀란달….”
유리아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듀란달을 바라보았다.
비록 반 토막이 나고 마기에 오염돼 볼품없는 모습이었지만, 그 자태에 어린 신성한 기운은 분명 진짜였다.
듀란달에 이끌린 유리아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그것에 가져간다. 하지만 이진한은 어림없다는 듯 서늘한 미소를 짓고는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용사를 애타게 찾는 이유라도 있는가?”
“….”
유리아의 몸이 움찔했다.
예상치 못한 발언에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이다. 찰나 이후 황급히 수습했지만, 이진한의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대략 적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마계가 창궐할수록 신성 왕국의 입지는 올라간다. 그것을 확고하게 화룡점정을 찍어줄 요소는 바로 용사의 존재.
자신들의 영향력을 흩뿌리고 싶은 성국으로서는 꼭 잡고 싶을 것이었다.
‘목줄 잡혀서 개처럼 끌려다닐 생각은 절대 없다.’
물론 그것을 제외하고도 몇 가지 가설이 있었다.
가능성은 작지만, 용사가 절실할 정도로 마계에 밀리는 상황이라든지. 아니면….
문득 마왕 자간의 사도 중 한 명이었던 마인 엑스가 이곳을 떠나기 직전에 했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신성 왕국을 조심하십시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있어서 필연적인 존재이지요.
신성 왕국의 일부가 마족과 얽혀 있다면?
용사의 영입은 성국의 쇄신과 동시에 뿌리부터 썩은 변절자들을 쳐내기 좋은 구실이 될 터.
아예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신성 왕국에 중앙 교단이 있다고? 그러면 그곳에 교황이 있겠군.”
“…예. 성왕(聖王) 폐하께서 계십니다.”
“신성 왕국은 제정일치의 국가입니다. 성왕이 교황과 국왕을 역임하지요.”
옆에서 베르하임 국왕이 말을 보태왔다.
잠시간 입을 일자로 다문 채 생각하던 이진한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참고로 성국 내에서 용사의 위치는?”
“규율상 성왕 폐하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힘을 지니십니다. 여신께서 내린 존재이시니 말이죠.”
“그건 마음에 드는 이야기네.”
톡톡.
이진한은 소파의 팔걸이를 가볍게 건드렸다.
유리아는 긴장하는 모양새로 그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사명은 용사를 신성 왕국으로 인도하는 것.
이쪽에 실책이 잡힌 이상 다소 무리한 요구를 해오더라도 따를 의향이 있었다.
“흠.”
이진한은 무언가 떠올린 듯 인벤토리를 뒤져 부서진 듀란달의 파편을 꺼내 유리아 앞에 툭 내던졌다.
새하얀 검날의 조각. 그 위에 얽힌 신성력과 강렬한 마기의 흔적에 유리아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보다시피 마왕 마르바스의 마기가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어 수복하기 곤란한 상황이다.”
“…예. 이렇게 지독하고 추악한 마기는 처음 봅니다.”
“성왕에게 전해라. 내 첫 번째 요구는 성검의 수복, 혹은 듀란달을 대체할 새로운 성검이라고.”
자고로 용사란 성검을 들어야 하는 법이 아니겠는가.
이전에도 말했듯 무기 중 최상위는 성검이었다. 위력 면에서 보자면 마검과 함께 투탑이었지만, 상성으로는 성검이 발군.
신성 왕국이라 칭할 정도니 성검 정도는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일레이나의 말 대로라면 저기 브리튼이란 동네에 엑스칼리버도 있다고 하니 대신 교섭해줄 수도 있겠고.’
앞으로 싸워야 할 적들이 명확해진 이상 성검의 부재는 빠르게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절그럭.
유리아는 새하얀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럽게 듀란달의 파편을 집어 들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였기에 어렵지 않게 그것을 봉인했고 마치 소중한 무언가라도 되는 것처럼 품에 넣은 채 깊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꼭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설령 수복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용사란 것이 확인된다면 어렵지 않게 성검을 받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걸 받으려면 성국에 가야 하고?”
“…예.”
유리아가 슬쩍 눈치를 봐왔다.
어떻게든 이쪽을 신성 왕국에 데려가고 싶은 모양새다. 하지만 이진한은 피식 웃으며 어림도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지금 성국에 가는 건 하책이지. 저들이 안달 나서 최상의 조건으로 대우해준다고 해도 모자라다.’
여신이니 신탁이니 이쪽이 알 것이 무엇인가.
아니꼽다면 바리바리 싸 들고 오면 될 일.
하다못해 마왕 자간도 고대 영웅이나 이전 용사들의 유산들을 약속했다. 그렇다면 신성 왕국도 성의를 보이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최소한의 유예는 주지. 하지만 너무 여유롭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너처럼 내게 접근해온 것이 성국뿐이라는 오만은 버려라.”
“…!”
유리아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진한은 맥스웰 아니, 마왕 자간으로부터 받은 제안은 발설하지 않았다. 초장부터 마족과 손을 잡았다는 것을 말한다면 괜히 안 좋은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
유리아는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벌써 그에게 접촉했다니,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설마 다른 교단이 먼저 용사의 존재를 눈치채고 마수를 뻗어왔는가.
베르너가 허세를 부리는 걸 수도 있었지만, 그 당당한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꽃에는 벌레가 꼬이기 마련이니.’
유례없는 위기에 유리아는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너 님께서 만족하실만한 제안들 들고 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래서 이다음 목적지가 어떻게 되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따라오기라도 하려는 모습이군.”
“적잖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이진한은 비릿한 조소를 지으며 손을 휘저었다. 용건은 끝났으니 그만 가보라는 모양새.
유리아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뒤 자리를 떠났다.
“…귀찮게 됐네.”
이진한은 성가시단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달린 혹이 세 덩이다. 그녀들은 이제 완전히 자신의 사람이라 할 수 있었지만, 유리아는 기본적으로 성국의 신도.
굳이 그녀를 데리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넌 어떻게 생각, …응? 왜 그렇게 쳐다봐?”
이진한은 문득 바로 옆에서 미르엘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음.”
“평소랑 태도가 달라서 그래? 일부러 좀 거만하게 해봤는데.”
“아니요, 이러시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런 걸로 동요할 시기는 지났죠. 다만, 좀 뭔가….”
뭔가 멋있었다. 미르엘은 뒷말을 삼켰다.
자신마저 콩깍지에 쓰인 것일까. 시종일관 유리아를 압박하며 유리안 위치를 선점하는 그의 모습은 완벽하게 나쁜 남자의 표본이었다.
“멋있으면 멋있다고 해.”
“…자화자찬하는 남자는 매력 없어요.”
이진한이 씩 웃으며 놀리자, 그녀는 잠깐 머뭇거리고서는 그런 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베르하임 국왕은 아들과 사위의 모습을 보듯 흐뭇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자, 그럼 급한 일은 대충 끝났고.”
도원경, 전쟁의 사후 처리, 신성 왕국의 유리아.
골치 아픈 의제들은 전부 지나갔다. 그렇다면 이다음은 사흘간의 숙면으로 찌뿌둥해진 몸을 풀어줄 차례였다.
“그간 성과는 있었겠지?”
“물론이죠.”
미르엘은 자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과도기에 다다라 있었다. 현재 경지는 익스퍼트 최상급. 흔히 검이 완성되는 마스터를 눈앞에 두고 있기에 하루하루 실력이 달라졌다.
도원경에서 한 달, 현실에서는 일주일이 흘렀으니 그동안 또 많이 발전했을 터.
“바로 수련장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베르하임 국왕이 손수 나서서 자신의 전용 수련장을 내어주었다.
공기부터 습도, 내리쬐는 햇빛까지 제어할 수 있는 최고급 시설.
그 쾌적함 가운데 가벼운 차림의 두 남녀가 마주 섰다.
“키가 좀 큰 것 같은데?”
“정말요?”
“응.”
프로스트를 쥔 미르엘이 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키는 대략 159cm 정도였지만, 마주 섰을 때 내려다보던 각도가 조금은 올라갔다. 잠시간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던 이진한은 깨달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것저것 많이 먹어서 그런 것 같네. 마나가 촉진되면서 신체가 발달한 걸 거야.”
“영약을 먹으면 키도 커지는군요. 좋은 걸 알았습니다.”
“마스터 경지에 들면 환골탈태하는 건 알지? 그러면 더 클 수도 있겠네.”
“…환골탈태.”
육체가 재구성되며 경지에 적합한 신체로 바뀌는 것을 뜻했다.
미르엘은 이전보다 한껏 더 의욕이 생긴 모습으로 프로스트를 쥐었다.
‘그러면 나도 엘레오노라 님이나 일레이나처럼….’
이전까지는 딱히 의식하진 않았지만, 함께 어울려 다니니 그녀들과 비교해 자신은 키가 작고 스타일이 빈약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사로서의 삶을 살 땐 연연할 필요가 없던 요소다. 하지만 ‘미르엘’만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면 조금 더 욕심을 내지 않을까.
그편이 베르너, 저 남자의 시선을 더 잡아끌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표정이 음흉한데.”
“수, 숙녀한테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이상한 말씀 마시고 얼른 대련이나 시작하죠!”
정곡을 찔린 미르엘은 새빨간 얼굴로 이진한에게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