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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23화 (123/210)

◈ 123.

“기침하셨습니까.”

베르하임 국왕은 이전보다 더 정중한 태도로 이진한을 맞아주었다.

이전에는 그저 검은 현자의 계승자로서 우대했다면, 지금은 그가 보인 신위와 용사로서의 이름을 인정한 것이었다.

“바빠 보이는군.”

“전쟁이 그렇지 않습니까. 고작 며칠밖에 치르지 않았지만, 처리할 서류가 산더미처럼 밀려있었습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책상 위에 쌓인 서류의 탑을 가리켰다.

이진한은 창문 사이로 흘러들어온 바람에 날린 양피지 한 장을 주워들었다.

전쟁 사후 처리에 드는 비용에 관한 문서였다. 전사자, 부상자, 성벽의 유지 보수, 무기와 식량의 비축, 소모된 재화의 정리.

공백을 뚫고 나올 정도로 긴 숫자의 나열과 빼곡한 글씨는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복잡한 것이었다.

“…나 때문에 피해를 많이 보았네.”

“피해라니요. 재해 같은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이진한은 턱을 쓰다듬으며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베르하임 왕국의 재정은 희귀 광물과 마도 기술을 기반으로 삼아 여타 왕국보다 몇 배는 더 튼튼하다고 했다.

이 정도의 피해로 단번에 휘청거리진 않겠지만, 예상치 못한 지출인지라 다소 부담스러운 상황일 터.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직관적인 것이 제일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전쟁으로 소모된 재화를 비롯해 각종 지출의 총합이 대충 천오백만 골드라지.’

일반적인 전쟁이라면 이렇게까지 액수가 크진 않겠지만, 왕성을 보호하는 프로텍터의 파손 피해가 큰 지분을 차지한 듯했다.

이진한은 잠시 인벤토리를 조작한 후 그 안에서 묵직한 자루 하나를 꺼내 국왕의 책상 위에 툭 하고 올려놓았다.

“…이것은.”

“이천만 골드다. 보수하는 데 써.”

“바, 받을 수 없습니다. 계승자께 어찌….”

“계승자니까. 원래 이름에 책임이 뒤따르는 일은 당연한 거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을 노린 마물 군세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이들이었다. 최소한 그에 대한 감사와 성의는 표시해야 함이 옳은 일.

그래야 자신의 마음도 편해졌다.

“….”

베르하임 국왕은 잠시 돈 자루를 보곤 입술을 우물거리는 듯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계승자님의 이름으로 하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족들에게도 적잖은 위로가 되겠군요.”

“그래. 이 나라에서 검은 현자의 이름이 지니는 이름은 위대하다고 했으니.”

이진한은 그 말을 끝으로 착잡해진 마음을 털어냈다.

속물적이니 생명을 생명으로 여기지 않는 자기혐오니 하는 것이 들어찰 여유는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의 손이 닿는 주위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뿐이었다.

“참, 보관소에 들르고 싶은데.”

“예의 그 검은 포탈 때문입니까?”

“그래. 그 안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다.”

“내부에 무언가 있었습니까?”

베르하임 국왕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검은 현자가 남긴 것 중 거의 기록이 없다시피 한 유산이었다. 일렁거리는 검은 색의 포탈은 분명 어디론가 이어지는 공간 마법의 종류.

그러니 그를 추종하는 국왕 역시 흥미가 일 수밖에 없었다.

“내부에는 도원경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수많은 나 자신과 맞서 싸웠지.”

“아, 그런 식으로 되어 있군요. 수많은 나 자신과 싸우는 수련장이라.”

그 설명만으로 대략적인 개요를 깨달은 듯 국왕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도원경으로 향하는 검은 포탈.

검은 현자 본인인 이진한으로서는 그것이 자신의 소유물이 절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말씀드렸다시피 급한 일도 다 끝낸 참입니다. 바로 가시지요.”

베르하임 국왕은 앞장서서 보관소로 나아갔다.

엘레오노라와 일레이나는 아직 수련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굳이 그녀들까지 부를 일은 아니었기에 동행은 미르엘로 만족했다.

“음.”

다시 한번 검은 포탈의 앞에 선 이진한은 가볍게 그 안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도원경은 그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다음 입장까지는 xx:xx:xx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이진한은 허공에 떠 오른 메시지를 노려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그다음 입장까지는 일정 기간 들어가지 못하는 모양이네.”

구체적인 시간이 표시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간 이외에 다른 조건도 필요로 한 듯했다.

“저도 안 되네요.”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미르엘 경은 출입 자격이 되질 않나 보군요.”

시험 삼아 그 안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간 미르엘과 베르하임 국왕은 전과 같이 딱딱한 벽을 짚었을 뿐이었다.

“다음에 다시 와야겠네.”

이진한은 아쉬운 얼굴로 검은 포탈 너머를 바라보았다.

***

안 되는 일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은 시간 낭비다. 그러니 이진한은 다시 도원경으로 들어가는 것을 순순히 포기한 채 집무실로 되돌아왔다.

그곳에서 베르하임 국왕, 미르엘과 함께 전쟁 사후 처리를 비롯해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수련실에 틀어박힌 그녀들이 나오길 기다린 것이 몇 시간 째.

먼저 집무실을 찾아온 것은 단정한 제복 차림의 근위 기사였다.

“폐하. 유리아 사제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음.”

작은 목소리였지만, 듣지 못할 수가 없었다.

베르하임 국왕이 어떻게 할 것인지 시선으로 묻자 이진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을 표했다.

“이야기는 미르엘에게 간단히 들었어. 오해를 풀고 싶다지?”

“그러면 들라 명하겠습니다.”

국왕의 명을 받은 근위 기사는 곧 법복을 입은 여성 한 명과 함께 집무실로 되돌아왔다.

이진한은 소파에 기대앉은 채 새로이 등장한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도미니온, 성국의 이단심문관.’

찰랑이는 푸른 머리카락은 단발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새하얀 법복에 가지런히 모은 손은 얼핏 신실한 사제의 모습을 보이는 듯했으나, 탄탄해 보이는 신체를 보아하니 팔라딘 계열인 듯했다.

Lv.752 「유리아」

-신성 왕국 팔라딘

-이단심문관 도미니온

대현자의 눈이 정보를 간파해냈다.

이진한은 살짝 의아함이 들었다. 마인이나 마족의 정체를 간파해내는 것은 당연히 여겼지만, 평범함에 가까운 인간인 유리아의 신분까지 파악하다니.

대현자의 눈은 어떤 시스템으로 되어 있는 것일까.

“유리아라고 합니다. 신성 왕국의 사제로, 이단심문관 도미니온이란 조직에 속해 있습니다.”

유리아는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해왔다.

“어디 소속인지는 관심없고.”

이진한은 여전히 소파에 등을 기댄 채 거만한 태도를 곁들이며 가늘어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허공으로 투명한 칼날이 솟구치며 방안을 가득 채운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족히 수백 개는 될 법한 살기 어린 기운에 베르하임 국왕과 미르엘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유리아 역시 수백 개는 될 법한 칼날들의 끝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암부에 날 악마 숭배자라고 팔아넘긴 것에 서로 오해가 있다고 했다지? 내가 납득할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현 시간부로 나는 신성 왕국과 적대하겠다고 선언하겠다.”

물론 그 시초는 네 죽음이 될 것이다.

방안에 도사리고 있는 날카로운 살기는 그런 선명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진한은 일부러 극단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간 쌓인 것도 많았고, 관계에 있어 확고한 우위를 가져오기 위함이었다. 어차피 이쪽이 용사인 이상 아쉬운 것은 신성 왕국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저들이다. 자신 쪽은 하등 아쉬울 이유가 없기에 한껏 거만한 모습을 취했다.

“…그 건에 대해서는 깊이 사죄드리는 바입니다.”

유리아는 다시금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화를 삭일 수 있다면 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교단 규율에 따라 신 혹은 그에 준하는 상징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단으로 간주하는 행위였다. 신실한 성도이자 도미니온인 그녀는 설사 제국의 황제가 오더라도, 목숨을 저당 잡힌 상황에서라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베르너 님을 처음 관측한 곳은 페르포치아 왕국의 영지, 미들턴에서였습니다. 저는 당시 그 구역에서 암약하던 마르바스 교단의 잔당들을 쫓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진한의 신위를 보았다.

찬란한 빛을 피워내며 세상을 뒤덮은 어둠을 몰아내는 그 꿈과 같은 광경을.

그렇기에 그녀는 그 이후로 쭉 그의 뒤를 따라왔다.

마치 순례자의 수행처럼.

“신탁이 있었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베르너 님이 그 신탁의 주인공임을 알 수 있었죠.”

“…신탁?”

“예.”

유리아는 잠시 헛기침을 내뱉으며 목을 가다듬고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둠이 창궐할 때, 과거의 빛이 깨어나리라.”

곰곰이 그 의미를 곱씹던 이진한의 몸이 움찔했다.

신탁이라는 내용이 가리키는 뜻은 노골적일 정도로 명백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직접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작위적이지 않은가.

이진한은 슬쩍 미르엘을 바라보았다.

이곳으로 오며 하는 대화 가운데 신탁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그녀도 몰랐나 싶었지만,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니 말해주는 걸 깜빡한 듯싶었다.

‘신탁 정도 되는 걸 깜빡하다니.’

자신과 어울려 다니며 간이 커진 것일까.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유리아로 시선을 돌렸다.

“내용은 딱 들어맞는군. 검은 현자의 이름은 과거의 빛이라고 칭할만하다. 그 계승자인 내 등장 시기도 딱 들어맞으니.”

“예. 마기를 다루시는 건 예상외지만, 과거 《지혜》의 검은 현자께서도 그러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신탁에 따라 그 계승자인 내가 용사다?”

“저는 그리 믿고 있습니다. 미들턴에서,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두 눈으로 그것을 똑똑히 보았지요. …물론 신성 왕국에 인정받기 위해서는 중앙 교단으로 돌아가 몇 가지 검증을 거치셔야 합니다.”

“검증이라.”

이진한은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용사 클래스 전용 스킬 「신성의 증명」

파아앗-!

찬란한 신성력이 방안을 뒤덮었다.

「신성의 증명」은 특정 영역 일대를 신성력으로 뒤덮는 스킬.

영역 내에서는 자동으로 상처가 치유되며 신성력으로 인한 버프로 인해 모든 능력치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성직자 클래스의 초월지경인 교황의 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효과였다.

“아아….”

유리아는 자신의 몸을 감싸는 그 빛에 두 손을 붙잡고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눈을 꼭 감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무어라 기도를 올린다. 그것은 이진한이 「신성의 증명」을 해제했을 때까지 이어졌다.

“이걸로 충분하겠지?”

“…물론입니다. 분명 교단에서도 베르너 님을 용사로 인정해줄 겁니다.”

유리아는 방안을 뒤덮은 농밀한 신성력이 사라지자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자신감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왜 너희들의 인정을 받아야 하지?”

“…네?”

물론 그것은 직후 이진한의 입에서 내뱉어진 싸늘한 말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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