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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22화 (122/210)

◈ 122.

검날이 미간을 꿰뚫자 맥스웰의 눈동자의 색이 바랬다.

애초에 그 몸은 전부 소멸한 지 오래.

남은 이진한의 마기에 의해 유지되다 끝을 맞이한 것이었다.

“…맥스웰 님.”

인간 형태로 돌아온 마인들이 신음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이진한은 손을 툭툭 털어 그 위에 남은 잔여물을 털어내는 것으로 눈앞에 선 군세를 바라보았다.

“뭐해. 더 싸우게?”

맥스웰은 빙의한 육신을 잃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을 뿐이었다.

싸움에서 소모한 격도 적다. 북쪽 숲에서 메피스토처럼 본신의 격을 다량으로 끌어와 현신한 것도 아니고 그 일부의 힘을 빌려와 빙의한 육신을 강화했을 따름.

격의 손상을 따지자면 메피스토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을 것이었다.

하지만 마인들은 마치 맥스웰이 죽은 것처럼 오열하며 주저앉자 이진한은 신성력을 더 내뿜었다.

“5초 준다. 더 싸우고 싶은 놈들은 앞으로 나와.”

“…후퇴하겠다.”

엑스, 토끼의 형상을 했던 마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착잡한 표정을 말한다. 곧 그들의 인도에 따라 평야 위에 응집해있던 마물이 몸을 돌려 사라졌고, 마인들 역시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더러는 맥스웰이 당한 것이 믿기지 않는 듯 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다. 도중 이진한이 눈을 부라리자 움찔하며 동료들의 뒤를 따라갔다.

“끙.”

엑스는 사지가 잘려나간 얀카를 둘러업었다.

신성력이 내뿜는 폭발적인 여파에 휘말려 재생력이 극도로 떨어진 상태라 너덜너덜해진 채 의식을 잃은 지 오래.

그 뒤치다꺼리는 자신이 할 수밖에 없었다.

“…용사여.”

“뭐.”

엑스는 발걸음을 내딛다 말고 잠시간 자리에 멈춰서서 고개를 돌렸다. 이진한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잠깐 고민하는 듯싶더니 망설이는 태도와 함께 천천히 말을 이었다.

“신성 왕국을 조심해라.”

“해라?”

“…하십시오.”

마왕 자간과 손을 잡는다면 용사의 위치는 자신들을 아득히 상회한다. 그렇기에 엑스는 신중한 태도로 말을 골랐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있어서 필연적인 존재이지요.”

“보통은 반대 아닌가?”

“다릅니다. 우리에게도 그들에게도. 위험이 강해질수록 멋모르는 인간들은 신을 의지하게 되는 법이지요.”

“헛소리만 계속할 거면 그만 가라.”

이진한은 꺼지라는 뜻으로 손을 휙휙 내저었다. 그 모습을 본 엑스는 입술을 씹으면서도 이 말만은 꼭 해야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대륙에서 제일 큰 종교 집단인 신성 왕국 및 다른 교단들도 마족과 얽혀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부디 제 말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마족과 얽혀 있다, 라.”

이진한은 턱을 쓰다듬었다.

이곳의 일도 있으니 이제 자신이 검은 현자의 계승자인 것과 함께 용사란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터.

베르하임 국왕의 뒷배도 있으니 어렵지 않게 그 사실을 인정받으리라.

‘신성 왕국도 곧 접촉해오겠지. 그때 판단해보면 될 문제다.’

도원경에서 곧바로 전장에 나온 이진한은 아직 유리아의 존재를 몰랐다.

그러니 그 상황이 닥치면 직접 보고 판단해볼 생각이었다.

[「메인 퀘스트」 ─ ∑검은 수호자 달성]

【824:12:15】

띠링, 하는 알림음과 함께 언제 받았는지도 모를 퀘스트의 완료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진한은 가볍게 손을 휘둘러 그것을 치워버리며 크게 하품을 했다.

현실 시간으로는 한 주, 도원경으로는 한 달.

그간 거의 잠을 자지 않으며 수련에만 몰두했다. 밖으로 나와서는 맥스웰이란 강적을 상대로 격렬한 전투까지 행해졌다.

즉, 심신이 극한으로 피로한 상태.

“일단 좀 자자.”

성벽 위에서 승리를 환호하는 이들을 뒤로한 채 이진한은 그 가운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사흘간 내리 잠만 잔 것 같았다.

실제로 시간의 유예를 보니 그 비슷한 시간이 지나 있다. 짙게 깔린 커튼을 슬쩍 들추자 새파란 하늘 위에 걸려 있는 태양을 볼 수 있었다.

가볍게 어깨를 돌리자 뼈 소리와 함께 개운한 느낌이 전신을 휩쓴다. 베르하임 국왕의 배려로 그간 한 번도 깨어나지 않은 채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냄새 하나 안 나네.”

현실에서 사흘 내리 잠만 잤다면 체취의 냄새가 짙게 배었을 테지만, 온갖 버프를 받고 있어서 그런지 지저분한 부분은 없었다.

“우선은.”

우선 상태창과 알림부터 확인했다.

도원경에서의 수련과 맥스웰과의 전투로 인해 전체적인 수치에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겼다. 잠시간 그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이진한은 제일 위로 떠 오르는 무언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Lv.1027 「베르너」

마경에서 블랙 드래곤 벨라시온과 싸울 당시 딱 1천을 달성했던 레벨이 어느덧 1027까지 도달했다.

전체적인 능력치 역시 적지 않은 폭으로 상승했고, 새로운 스킬도 여럿 생겨났다. 이진한은 그중 제일 최근에 얻은 스킬을 주목했다.

대현자 클래스 전용 스킬 「무신」

한 달간 도원경에서 구르고 구른 끝에 얻은 스킬이었다.

사실 그곳에서의 성과는 스펙업이나 싸우는 방식의 숙달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대현자는 당연하다는 듯 「무신」을 주었고, 맥스웰과의 싸움을 이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지나쳤는데 좀 이상하네.”

지금 생각해보니 도원경이란 자체부터 의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월드’ 내부였더라면 인공지능 NPC들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지만, 이 세상은 현실이지 않은가.

대현자는 자신들이 클래스별로 나뉜 이진한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본체를 아득히 뛰어넘었을뿐더러 이쪽이 알고 있지도 않은 지식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들어가 봐야겠네.”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며 그렇게 중얼거렸을 찰나 방문이 열리며 한 인영이 안쪽으로 들어왔다.

“…일어나셨군요.”

“미르엘.”

파란 제복 차림의 미르엘이 옅은 미소를 지어왔다.

식사를 들고 온 것인지 쟁반 위에 무언가 가득 쌓여 있다. 그녀는 종종거리는 발걸음으로 침상에 다가와 익숙한 손놀림으로 상을 차렸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사제는 별문제가 없다고 하긴 했는데 혹시 모르니까요.”

“괜찮아. 애초에 싸움이 끝난 뒤에도 그리 피폐한 상태는 아니었어.”

이진한이 식기를 달라며 손을 뻗자 미르엘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미련이 남은 손길로 그것을 건네주었다.

“제가 먹여드릴 수 있는데.”

“…멀쩡하다니까.”

식사는 죽과 가벼운 반찬들이었다.

미르엘은 침상 앞으로 가져온 의자에 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진한은 그 시선이 살짝 부담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또 그리 말하면 풀이 죽을 것을 알기에 죽과 함께 말을 삼켜버렸다.

“다른 애들은?”

“두 분 다 어제까지 같이 계시다가 저녁 이후부터 수련실에 쭉 머무르고 계십니다. 베르너 님께서 깨어나시면 알려달라고 하셨어요.”

“깨달음이 있었나 보네.”

좋은 징조였다.

일레이나는 나름대로 《영원》의 마법을 연구 중이고, 엘레오노라는 이쪽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밟아나가는 중이었다.

강함의 경지라는 것은 정체되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한 번에 폭발적으로 일어나기 마련.

이진한이 보기에 그 과도기는 얼마 남지 않은 듯싶었다.

“미르엘, 너도 말이지.”

백금색 머리카락이 살랑인다. 미르엘의 붉은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예쁜 미소를 지어왔다.

“다 베르너 님 덕분입니다.”

Lv.527 「미르엘 브레스트」

단 몇 달 사이 미르엘의 레벨은 이전보다 200 정도 상승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자면 비정상적일 정도의 성장세. 아마 자신이 쓰러뜨린 강적의 경험치를 일부 나눠 먹은 것이 분명했다.

“그래. 잘 알고 있어서 다행이네.”

“하하.”

미르엘이 작게 웃음을 토해냈다.

지금 그녀의 경지는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

여기서 몇 번 더 수련을 거치면 어렵지 않게 소드 마스터에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왕국 쪽은 어때? 연회라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조용하네. 낮이라 그런가?”

“아, 베르하임 국왕이 이번 주간은 전사자들에 대한 추모로 보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물의 군세가 물러난 이후 그런 행사는 일절 없었어요.”

“…그런가.”

이진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행은 조금 이상하지만, 정신머리는 똑바로 박힌 왕인 듯싶었다. 가벼운 기합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이진한은 옷을 걸치곤 가볍게 몸을 풀었다.

“다른 분들께 베르너 님께서 깨어나셨다고 알릴까요?”

“내버려 둬. 중요한 때인데 스승으로서 방해하면 안 되지.”

저럴 때 괜히 건드렸다가 깨달음의 실마리라도 날아가 버리면 서로 골치 아프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수련실을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베르하임 국왕은?”

“외부로 나간다는 소리는 못 들었으니 집무실에 있을 거예요.”

“그럼 가볼까.”

이진한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미르엘은 마치 그의 기사라도 되는 것처럼 당당한 걸음새로 동행한다. 그러던 중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이었다.

“참. 신성 왕국에서 사자가 와 있습니다. 교단 산하의 이단심문관 조직인 도미니온의 유리아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신성 왕국?”

이진한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사흘간 잠에 빠져들기 전 맥스웰 산하 마인인 엑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신성 왕국을 조심해라.

그들 역시 타락한 이들이라 말해주는 듯한 뉘앙스였다.

신성의 타락.

수많은 클리셰와 이야기 루트 중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괜한 찜찜함이 가슴 언저리에 남아 진득하니 느껴졌다.

“그때의 전투를 보고 확신한 듯싶더라고요. 베르너 님이 용사이신걸.”

“그래서, 같이 신성 왕국으로 가자고 했어?”

“그렇게 직접 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대충 그런 뉘앙스였습니다. 사랑에 빠진 소녀인 줄 알았어요.”

“악마화한 걸 봤을 텐데 포용력도 높네.”

“검은 현자의 계승자라서 마기도 다룰 수 있다고 둘러댔거든요. 기존과는 조금 다른 형식의 용사, 라는 걸로 납득한 모양이에요.”

“…이쪽을 악마 숭배자라고 암부에 찌른 것 치고는 반응이 덤덤한데.”

“그쪽도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변호하는 모양새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좀 그렇지만, 한 번 말씀을 나눠보시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요.”

“흠.”

신성 왕국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그랜드 퀘스트에 쓰인 것처럼 최종 적이 마왕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인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든 신성 왕국과 손을 잡게 될 터.

하지만 이때까지 쌓인 감정은 별로 좋지 못했다.

거기에 엑스가 떠나면서 했던 이야기가 계속 귓가를 아른거리고 있으니 의혹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판국이었다.

“…그래. 일단 이야기라도 나눠보자.”

대적자가 확실해진 이상, 현재 이진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서진 성검(聖劍)의 수복. 그것을 대가로 한다면 어느 정도 말을 들어줄 가치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뒤쪽에서 마족과 손을 잡고 있다면.

‘한 번 갈아엎고 시작해야지.’

뒤통수 맞는 일은 극구 사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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