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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21화 (121/210)

◈ 121.

-…인정하마. 지난 수백 년간 날 이렇게 애먹게 한 인간은 없었다.

맥스웰은 얼굴에 흐르는 피를 거칠게 닦아내며 날카롭게 두 눈을 치켜 떴다.

검은 현자의 계승자라는 것은 허언이 아닌지 지금껏 검을 겨뤘던 인간 중 이렇게 다채로운 공격을 해오는 이는 없었다.

검, 마법, 창, 활, 그 이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단까지.

맥스웰은 그 각각이 잡기라 치부할 수 있는 어쭙잖은 수준이 아님을 인정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 정도로 용납할 수 없다.

맥스웰의 여섯 팔이 꿈틀거리며 미증유의 마기를 뿜어낸다. 마치 이전까지는 진심이 아니었다는 듯 말해오는 그 분위기에 이진한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 반쯤 죽여 놓아야 용납하겠다 그런 소린가?”

-다르다.

맥스웰은 고개를 저었다.

-마족에게 있어서 본디 용사란 상생할 수 없는 대척점이었다. 만일 서로 마주하게 된다면 누구 한쪽은 죽을 때까지 치고받고 싸워야 하는 운명이었지.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인간과 마족, 선과 악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이제는 강한 힘을,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들의 손을 잡고자 자처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졌다.

가증스러운 여신을 섬기는 성직자들과도 연을 트는 마족이 있었고,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중간계에 숨어든 다른 마왕 세력의 정보를 팔아넘기는 이들도 있었다.

더 큰 목적을 위해서라면 인간과 혹은 그토록 증오스러워했던 이들과 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마왕 자간에게 있어서 더 큰 목적은 자신의 서열을 올리는 것이었다.

마계의 지배자인 72 군주의 서열은 절대적이진 않으나 확실한 우위를 지녔다. 한 순위를 올리는 데에도 천문학적인 피해를 감수해야 했고, 그마저도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렇기에 마왕 자간은 중간계에서 그 방법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어지간한 강자라 할지라도 마왕에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중간계의 수호자라 불린 드래곤 역시 로드나 에이션트 급인 몇몇만이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수준.

그 가운데 마왕 자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용사에 관한 기록이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나와 내 동료들은 스스로 용사라 칭하거나, 추앙받는 이들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애초에 그 개체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그마저도 대부분 제대로 된 이가 아니었지.

쿵.

맥스웰의 기세가 한층 더 부풀었다.

시뻘건 마기가 마치 아지랑이처럼 그 전신을 휘감았고, 자신 앞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해버릴 듯한 아우라를 내뿜기 시작했다.

-증명해라. 용사의 기조를.

“어이가 없네. 마족 주제에 내가 용사인 것을 증명하라고?”

-이 자리에 내 존재를 걸고 맹세하겠다. 네 녀석이 지금껏 내가 지나쳐왔던 수많은 이처럼 거짓된 존재라면.

아수라의 눈이 파멸의 빛을 번뜩였다.

-이 앞에 있는 이들을 모두 지워버리겠다. 살아 숨 쉬는 것은 모두 멸할 것이요, 구조물은 모두 짓밟아 잔해조차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를….”

-내가 승리했을 때만을 가정한 이야기가 아니다. 설사 패배하더라도 마왕 자간 님의 계보를 잇는 마족들이 끊임없이 군세를 일으켜 이 왕국을 공격할 것이다. 설사 네 녀석이 그것을 전부 막아낸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수명은 유한. 그 끄트머리가 결국 파멸을 맞이하는 것은 바뀌지 않겠지.

이진한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 미친 소리는 무엇인가.

마족 주제에 자신에게 용사임을 증명하라는 것과 더불어 거침없는 협박까지 가해온다. 그 모든 것이 다른 마왕의 목을 칠 협력자를 구하기 위해서 하는 행위란 것이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설사 날 쓰러뜨리더라도 용사임을 증명하지 못한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등 뒤에 있는 이들을 살리고 싶다면 네게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다.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이진한의 이마로 힘줄이 불쑥 솟아올랐다.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 받아주는 법.

전부 무시해버린 채 「무신」의 전력으로 도륙해버릴 찰나, 녀석이 내뱉은 말이 가슴 한구석에 묵직하게 걸렸다.

「네 녀석이 그것을 전부 막아낸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수명은 유한. 그 끄트머리가 결국 파멸을 맞이하는 것은 바뀌지 않겠지.」

맥스웰은 자신의 존재를 걸고 맹세했다.

그렇다는 건 자신이 용사의 증명을 만족하지 못할 시 어떤 식으로든 베르하임 왕국을 멸망시키겠다는 이야기.

그의 말대로 혼자 전부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시간의 유예가 있는 이상 언제까지고 이곳에 붙어 있는 것은 비현실적인 방안이었다.

‘일이 귀찮게 됐네.’

이진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치고받고 싸울 줄만 알았지 마왕이 용사와 손을 잡기를 원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무슨 증명을 운운하는 이야기로 사람들의 목숨을 저당 잡힐 줄 이야.

그는 한숨을 내쉬며 「무신」의 스킬을 해제했다.

-음?

이진한으로부터 느껴지던 막중한 기세가 사그라들자 맥스웰은 두 눈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표정을 보니 포기한 것은 아닌 듯 보였다. 그렇다는 것은 이제야말로 숨겨진 용사의 힘을 발휘할 마음이 들었다는 것일까.

스릉.

그의 손으로 검 한 자루가 쥐어졌다.

신도(神刀) 무라마사도, 마검(魔劍) 그라나다도 아닌 평범한 스펙의 검.

물론 그마저도 세간에 나돌게 된다면 큰 화제가 될 법한 능력치를 지닌 것엔 틀림없지만, 그간 사용하던 것과 비교하자면 스펙 면에서 큰 손색이 있었다.

‘듀란달이라도 멀쩡하면 모를까. 그도 아니라면 아무런 특색 없는 검이 신성력을 사용하기엔 좋으니.’

검 끝으로 찬란한 신성력이 피어오른다. 어지간한 사제라 할지라도 감히 흉내 내지 못할 빛이었으며, 여신의 선택을 받은 용사라고 칭하기에 충분한 광채였다.

“…!”

성벽 난간에 기대 멍한 표정으로 싸움을 바라보고 있던 유리아조차 온몸에 소름이 돋았을 정도로 압도적인 광경.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허공을 물들여가는 그 빛이 예쁘다며 감탄을 흘렸다.

-그것이.

맥스웰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림에 나지막한 신음을 토해냈다.

이전과 달리 그 기세에 압박감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존재로서의 위협.

서로 태생부터 상극인 빛과 마주하니 모골의 송연해지는 듯한 위기감이 끓어올랐다.

콰지직─.

과도한 긴장 때문인지 의식적으로 제한하던 인과율의 수위가 깨어져 나갔다.

꽉 움켜쥔 주먹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진 것은 마계에서부터 끌어온 본신의 격이 허용치를 넘어섰다는 것.

하지만 수백 년 만에 진정한 용사를 눈앞에 둔 맥스웰은 사소한 불이익 따위는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다.

“네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용사의 힘이다. 나도 거의 처음 써보는 거니까 재주껏 막아봐.”

나풀거리는 검은 색 머리카락의 가장자리로 새하얀 빛이 일렁인다. 밤하늘의 별을 품은 듯 어둡게 반짝거리던 눈동자는 티 한 점 없는 백색으로 물들었고, 그 의지에 따라 지상에서 뿜어진 신성력의 기둥을 한 점으로 응축해나갔다.

용사 클래스 초월 스킬 「신성의 증명」

현재 「불굴의 가호」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그것이 무슨 효과를 지닌 지는 사용하는 본인조차 몰랐지만, 어쨌든 초월 스킬인 만큼 괜찮은 위력을 지니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으어어어어어!

자신에게로 떨어져 내리는 막대한 빛의 기둥에 맥스웰은 환희의 절규를 토해내며 팔을 들었다.

하지만 시뻘건 아수라의 여섯 팔로도 들이닥치는 신성을 감당하기엔 부족했을 따름이었다.

취이이익!

마족으로서의 격이 손상되며 그 몸을 둘러쌌던 마기가 정화돼간다. 맥스웰의 격을 생각한다면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였으나,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신성력은 그것을 가능케 했다.

“이게 되네?”

오죽했으면 처음으로 용사 클래스의 스킬을 발동해본 이진한조차 놀랄 정도. 이윽고 빛의 기둥이 여섯 개의 팔을 넘어 그 거대한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훌륭하다.

신성의 상징인 성호(十)가 맥스웰의 가슴 한복판에 선명하리만큼 새겨졌다. 악마인 그에게 있어서 더 없을 치욕이었지만, 맥스웰은 오히려 후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패력의 맥스웰, 아니 마왕 자간님의 대리인으로서 네 녀석을 중간계의 용사로 인정하겠다.

심각한 타격을 받은 것인지 그 몸이 손끝에서부터 가루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한다. 맥스웰은 그것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고는 새빨간 눈으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맹세대로 다른 이들에게 손대지 않으마. 자간 님께서도 용사의 등장에 기뻐하실 터. 용사에게 있어서 마왕과 손을 잡는 것이 조금 억지스러울 수 있겠으나….

“그 이야기 말인데.”

서걱.

이진한은 가볍게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맥스웰의 목을 베어냈다.

수라의 형상을 한 머리만 그 커다란 몸에서 툭 떨어져 나왔고, 그는 바포메트의 마기를 주입해 맥스웰이 소멸하는 것을 막았다.

“내가 왜 네놈들과 손을 잡아야 하지?”

-…마왕을 척결하는 일이다. 용사의 사명을 지닌 너에게는 더없이 좋은 이야기일 터. 설마 수단과 방법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운운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겠지.

맥스웰은 머리만 남은 상태에서 가늘게 뜬 눈으로 시선을 보냈다.

“하하.”

이진한은 기가 차 헛웃음을 토해냈다.

당장 이곳을 공격해 피해 입히고도 손을 잡을 수 있으리라 뻔뻔하게 생각하는가.

물론 마왕과 손을 잡고 다른 마왕을 척결한다면 그에게 있어 이득이 되겠지만, 이진한은 그리 순순히 이들의 말에 따를 이유가 없었다.

-그렇군. 보상의 이야기인가. 그쪽은 섭섭지 않게 해주겠다. 과거 중간계에서 영웅과 용사라 불렸던 이들이 사용한 유산을 비롯해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지. 그것이라면 너도….

“아니, 내 말은 내가 왜 굳이 네놈들과 손을 잡아야 하느냐고 묻는 거다.”

-…굳이?

“마왕 자간의 서열은 끽해야 중간급 정도라지. 그래서 나와 손잡고 상위 서열의 마왕을 꺾고 싶다는 것이고.”

-그렇다. 하지만 마왕은 서열만이 전부가 아닌….

“대충 들어보니까 네놈들만이 아니라 다른 마왕들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 같은데, 자간이 아니라 더 높은 서열의 마왕과 손잡으면 되지 않을까?”

맥스웰의 말이 멈췄다.

그야말로 정곡을 찔린 듯,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두 눈만 지진이 난 것처럼 떨고 있을 뿐이었다.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괜히 어중간한 서열의 마왕과 손을 잡을 바에는 상위권 마왕과 협력해서 깡그리 정리하는 게 더 빠를 테니 말이야.”

-물론 그렇다. 하지만 상위권 마왕은 모두 비열하고 음험한 속내를 지니고 있다. 만일 네가 그들과 계약했다간 좋을 대로 이용만 당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비참하게 버려질 것이다. 하지만 자간님은 다르….

“같은 마왕 주제에 누가 더 믿음 있고 신뢰가 간다는 말은 좀 그렇지 않나?”

-….

자기가 말하고도 그랬는지 맥스웰의 입가가 경련했다. 그렇기에 이진한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의 머리 위로 검 끝을 겨눴다.

“그러니 정말로 나와 손을 잡고 싶다면 이쪽의 마음이 움직일 정도의 성의를 보여라. 난 당장 급한 게 없으니 기한은 충분히 주마. 내가 용사란 것을 알게 된 마왕들이 그동안 가만히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싸움은 잘하는데 교섭 능력은 영 꽝이네. 나 같으면 일단 줄 수 있는 건 다 때려 박고 부족한 걸 찾겠다. 그러니까.”

웅웅─.

검 끝으로 새하얀 불꽃이 불타오른다. 그 찬란한 신성에 맥스웰이 황급히 무어라 말을 이으려 할 때, 이진한은 씩 웃으며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녀석의 미간에 검을 박아넣었다.

“다음엔 더 챙겨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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