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Lv.1274 「패력의 맥스웰」
악마를 겉모습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은 없지만, 우락부락한 근육에 투기를 풀풀 흩날리는 꼴을 보아하니 무투계 악마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육체 피라미터는 지금껏 봤던 녀석 중에 최상급인가.’
대현자의 눈이 분석한 바로는 블랙 드래곤 벨라시온, 악마화한 카라반 얀센과 검호조차 녀석에 미치지 못했다.
꽈아악.
이진한은 마검을 다잡고는 천천히 그 앞으로 걸어 나갔다.
“네 아이의 부름에 응했다고? 이미 다 썰려 나갔는데?”
“음.”
맥스웰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수고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갸륵한 마음이다. 설령 한참 늦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응답해주는 것이 아비 된 도리.”
“아비라고?”
이진한은 헛웃음을 토해냈다.
악마와 마인은 주종관계다. 죽으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노예, 또는 도구에 가까운 그 무언가. ‘월드’를 플레이할 때도 간혹 별난 녀석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설마 부모의 행세를 한다니.
“그래. 그러니 자식들의 복수는 이 손으로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노릇.”
쿵.
맥스웰이 발끝으로 땅을 찍으며 적의를 드러내자 마기에 휘말린 그 붉은 머리카락이 사자의 갈기처럼 허공에 흩날렸다.
주먹 끝에는 미증유의 힘이 모인다. 마치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그 압력에 이진한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마검을 들어 올렸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이제 마인들 정도는 한 손으로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애매해진 수준이 되었다.
아직 도원경에서 수련한 성과의 반절도 보여주지 못했는데 싸움을 끝낼 수는 없지 않은가.
“받아보아라. 이것이 패력(敗力) 일지니.”
맥스월의 어깨가 뒤로 당겨진다. 꽉 쥔 주먹 위로 마기가 넘실거리며 소용돌이쳤고, 조금만 방심한다면 몸이 끌려갈 정도의 흡입력이 느껴졌다.
도원경 안에서 수백, 수천 번의 대련으로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서있던 대현자의 눈이 상대가 발할 힘의 궤적과 경로를 예측해온다. 지금 상태에서 정면으로 맞부딪친다면 승률은 오할.
도원경 안에 있었던 대마도사는 지금과 같이 승패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취해야 할 행동을 명쾌하게 알려주었다.
“내리쳐라.”
우르릉─!
마른하늘로부터 자색 뇌전이 내리쳤다.
번뜩이는 섬광이 맥스웰이 발을 채 떼기도 전에 그 몸을 급습했고, 주먹 끝으로 집약되어 있던 마기를 흐트러트렸다.
“으음.”
맥스웰은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마법 따위, 얕은 잔재주에 불과하거늘.”
콰지직.
생긴 것만큼이나 터프한 것일까.
녀석은 제 몸을 휘감은 영원의 번개를 가볍게 찢어발기며 무력화해버렸다.
“…허?”
이진한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그래도 초월 마법이다. 특히 영원의 번개는 지속력에 있어서 발군의 위력을 자랑하는 마법.
그것을 단번에 무력화한다는 것은 항마력이 얼마나 높다는 것인가.
“진정한 힘은 강한 육신으로부터 나온다.”
쿠웅.
다시금 진각을 내디딘 맥스웰의 주먹 끝으로 마기가 휘몰아쳤다. 이번엔 기습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듯 날카로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어쩐지 전장에 마도사 한 명 없더라니.”
이진한은 혀를 차며 마검을 쥐었다.
원래 지닌 고유 능력인지 아니면 무언가의 작용인지 모르겠지만, 초월 마법까지 통하지 않는 이상 마법으로 공격하는 것은 비효율적이었다.
‘까짓거 버텨내고 역공한다.’
악마화한 이상 어지간한 데미지는 버텨낼 수 있다. 하지만 뻗어진 주먹 끝으로 쇄도한 돌풍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을 때, 그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저적─.
여파를 직격으로 맞은 성벽이 우그러들며 신음을 토해낸다. 그 앞을 지키고 선 이진한이 온전하게 그 힘을 해소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검을 몸 앞으로 내민 채 맥스웰의 공격을 견뎌내었던 그는 쭈뼛 솟아오른 머리카락이 가라앉았을 때 슬쩍 고개를 내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난 아닌데.”
체감상 마경에서 블랙 드래곤 벨라시온의 브레스에 직격당했을 때와 비슷한 강도의 충격이었다.
자신이 선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진이라도 난 듯 무참하게 갈라진 상태로, 휘말린 성벽 역시 끝끝내 버텨내지 못한 채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피하지 않은 그 용기. 칭찬할만하다.”
맥스웰은 씩 웃으며 주먹을 거두었다.
이쪽을 완전히 하수로 보고 있는 모양새에 슬슬 열받은 이진한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발을 굴렀다.
“자신 넘친다 이 말이지.”
이쪽 역시 악마화를 유지할 마기는 차고 넘쳤다.
고대 신의 잔재를 통해 흡수한 덕분에 기존 용적 자체가 확장되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커졌다.
“가볍게 한방씩 주고받았으니까 이제 제대로 해볼까.”
콰득.
발끝이 땅을 파고든다. 그것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이진한의 신형은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쐐애애액-!
맥스웰은 귓가를 스치는 파공성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어쭙잖게 손대중하는 것보단 일격에 전력을 싣는 것이 그의 취향.
그러니 걸려온 싸움은 피할 이유가 없었다.
검은 마기가 짙은 꼬리를 남기며 전장 위로 선명한 궤적을 남긴다. 고대 악마라 불리는 바포메트의 기운.
하지만 맥스웰이 주목한 것은 베르너라는 인간의 강직도였다.
‘종족을 떠나 강한 존재다. 이 몸의 강함을 보고도 조금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는다니.’
이 정도의 흥분을 느끼는 것은 오래간만의 일.
용사라는 이름에 끌려 굳이 이곳까지 나아온 것이 헛된 일은 아닌 듯싶었다.
“음.”
마검의 날카로운 이빨이 목을 향해 닥쳐온다. 아무리 맥스웰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베이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기에 근육으로 뒤덮은 두 팔을 내밀어 막아내고자 했다.
파가가각-!
검날과 팔뚝이 부딪쳤는데 쇠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샛노란 불똥이 피어올랐다. 그 위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에 맥스웰이 옅은 미소를 지을 찰나, 마검이 자신의 팔에 응집된 마기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근본이 없는 악마라 그런지 탐욕스럽기 그지없구나. 주제에 없는 힘은 오히려 화를 불러올 뿐이거늘.”
“그런 몸뚱이로 그딴 말을 지껄이는 건가?”
힘이란 걸 똘똘 빚어 형상화한 것 같이 생긴 녀석이 그러한 말을 하니 어이가 없었다.
“뭘, 이 정도로 놀라면 안 되지.”
맥스웰은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만난 강적에 대한 기쁨과 호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자간 님께선 네놈과 손을 잡으라고 하셨지만, 이쪽이 더 강한데 굳이 평등한 조건으로 맺을 필요가 있을까.”
힘으로 굴복시키겠다.
그 말에 이진한은 피식 웃으며 마검의 손잡이를 비틀었다.
“할 수 있다면.”
쉬이이익-!
마검의 칼날이 섬뜩한 빛을 내뿜는다. 게걸스럽게 맥스웰의 마기를 먹어치우던 것을 그만두고, 그간 흡수한 마기를 방출해 그 몸에 날카로운 참격을 날린 것이었다.
“흡!”
맥스웰은 몸에 호신강기와 같이 마기를 두른 것으로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곤 왼손으로 가벼운 잽을 날리며 그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견제한다. 그마저도 어지간한 강자의 머리를 풍선 터칠 만큼 강맹한 위력인지라 이진한은 방심을 금치 못했다.
탁-!
슬쩍 땅을 박참으로 거리를 벌린 그는 거대한 장궁을 꺼내 들었다. 신성력이 인챈트 된 미스릴 화살이 시위에 걸리고, 찰나의 순간에 수십 발이 허공을 꿰뚫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연격에도 맥스웰은 당황하지 않은 채 가벼이 손날을 휘둘렀다.
“화살 따위…….”
퍽-!
그중 한 대의 화살이 그의 어깨로 깊숙이 박혀 든다. 다른 것들과 속도도 강함도 다른 것으로, 은밀히 몸을 숨긴 채 쏘아진 것이었다.
“화살 따위가 뭐라고?”
웅웅웅.
미스릴 촉에 인챈트 된 신성력과 더불어 항마(降魔)의 술식이 활성화된다. 그와 동시에 맥스웰의 몸을 뒤덮고 있던 마기의 호신강기가 무참히 깨어져 나가며 그 맨몸이 드러났다.
“어림없다!”
맥스웰은 이진한이 또다시 화살을 쏘아 보내리라 생각해 주먹을 휘둘러 거센 풍압을 일으켰지만, 그는 가벼이 양 손바닥을 부딪쳤을 뿐이었다.
“「귀문」”
마스터 어쌔신 클래스의 속박 스킬이 그 몸을 붙든다. 적중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적중만 한다면 고대 악마인 바포메트의 본신 조차 찰나 동안 발을 묶을 수 있는 스킬이었다.
“흡-!”
맥스웰은 순식간에 그것을 깨부수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구태여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그곳에만 우뚝 선 것은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자 상대적인 오만이었다.
쉬이이익-!
어디에선가 흘러나온 핏빛 혈류가 그 발목을 타고 몸을 휘감아간다. 맥스웰은 강하게 발을 구르며 질척이는 혈류를 떼어내려 했지만, 애초에 형태를 지닌 것이 아니라 끈덕지게 달라붙어 갔을 따름이었다.
쿵.
강한 마기가 발산된다. 지축이 들썩거릴 정도의 기파.
이진한은 「폭혈」의 술식이 무력화되기 전에 빠르게 영창을 외웠다.
「저주하라, 움직이는 모든 것을. 원망하라, 살아있는 모든 것을. 빛이 저물고, 어둠이 뒤덮을 때까지 심연은 끝없이 깊어지리니」
흑마법사 클래스 상위 마법
「은빛 부식(Silver corrosion)」
취이이익!
고대 괴수인 베히모스조차 견뎌내지 못했던 부식이 농밀한 마기를 녹여간다. 자신의 마기조차 침식되어가는 그 광경에 맥스웰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기묘한 잡술을 많이 알고 있구나. 허나 그 모든 것은 압도적인 힘 앞에서 무용지물이 될 따름이다!”
“글쎄.”
어느새 벨라시온의 드래곤 하트로 만든 스태프인 「블랙 다이아몬드」를 꺼내 쥔 이진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 끝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그 안에서도 그런 소릴 할 수 있을지 보자.”
대마도사 초월 마법 「고래(Whale)」
드드드드─!
큰 지진이라도 난 듯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지축이 흔들리며 심상치 않은 파동이 사방을 뒤덮기 시작했다.
“….”
맥스웰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온몸을 마기로 뒤덮었다.
용사로서의 힘을 파악하기 위해 어느 정도 이 몸으로 그 공격을 받아 내주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잡스러운 기술만 사용하는 것을 보니 아직 진심을 낼 생각이 들지 않은 듯했다.
“용사의 본심을 끌어내지 못할 정도라면 패력이라는 이름의 수치….”
스스슷─!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반이 솟아오른다. 맥스웰은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땅 깊숙이 자신의 발을 박아넣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화가 되었을 따름이었다.
“…고래?”
성벽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반 밑에서 솟구친 것은 한 마리의 거대한 고래.
맥스웰을 먹어치우려는 듯 쩍 벌린 입 가운데 그를 중심으로 둔 채 지상으로 솟아오른 차였다.
“흡-!”
시퍼런 힘줄이 솟아오른 그의 두 팔이 닫혀가는 고래의 입을 강제로 열었다. 그대로 산산이 찢어발기려는 듯 마기의 기류가 날카롭게 휘몰아쳤을 때, 이진한은 차가운 눈으로 다시금 「블랙 다이아몬드」를 내리찍었다.
쿠구구궁.
하늘 높이 떠 오른 태양이 떨어져 내린다. 그 압도적인 질량은 마냥 잡기(雜技)라고 칭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가.”
맥스웰은 떨어져 내리는 태양을 보며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중간계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어 활동한 것이 벌써 삼백여 년 만의 일.
그간 인간들이 강함을 재단하는 방식이 바뀐 듯싶었다.
“정말로.”
정말로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진정한 강함이란 것은 이런 잡스러운 것이 아닌 것을.
맥스웰은 고개를 들어 흉흉한 눈빛으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보여주마. 압도적인 힘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