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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18화 (118/210)

◈ 118.

-놈!

한쪽 팔을 잃은 투르마크 얀카가 눈을 뒤집으며 달려든다.

엑스가 아차 하며 그를 말리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그 찰나 찢긴 팔을 재생한 얀카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이진한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츠즈즈즈.

신도(神刀) 무라마사.

이진한이 등 뒤에서부터 빼든 청색의 카타나가 기다란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얀카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분노에 취해 무작정 달려든 듯싶었지만, 실상은 더없이 냉정한 판단 가운데 공격한 것이었다.

‘팔 하나 정도는 기꺼이 내주마. 대신 네놈도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얀카는 자신의 재생력을 믿었다.

잘려 나간 신체 부위는 찰나에 복구할 수 있었으며, 몸이 조각조각 나도 한순간이면 원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

방금 역시 그저 팔이 잘려 나갔을 뿐인 것에 불과한 상처. 그것도 금세 회복하지 않았는가. 인간의 피륙에 불과한 그 부드러운 살결 따위는 자신의 손톱을 버텨내지 못하리라.

하지만 귓가에 들려오는 귀신의 비명 같은 기괴한 소리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귀살(鬼殺).”

푸른 궤적의 색이 옅어지며 무라마사의 위로 찬란한 빛을 내뿜는 신성력이 피어오른다. 그것이 어지간한 팔라딘의 것보다 더 농밀한 것을 깨달은 얀카의 눈이 더없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강한 신성력을 사용한다는 소리는.

촤아악!

늑대의 형상을 한 마인의 몸이 갈가리 찢어진다. 마기와 상극인 신성력이 체내를 파고들어 재생의 힘을 파괴하며 그릇된 존재의 유지를 부정한다. 황급히 둘 사이에 난입한 엑스의 존재가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소멸을 면치 못했을 터.

“흡!”

수십 번의 연격.

극한에 다다른 창사(槍士)가 혼신을 기울여 내지른 창끝이 경각에 달려 있던 얀카의 목숨을 구해낸다. 몸을 비튼 것으로 그 모든 공격을 가볍게 피해낸 이진한이 살짝 놀랐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창 솜씨가 제법인데. 저 늑대 새끼랑은 결이 달라.”

“…칭찬 고맙군.”

엑스는 한 번도 상대를 스치지 못한 창을 휘둘러 다잡는 것을 끝으로, 비틀거리며 주저앉은 얀카의 앞으로 나섰다.

“검과 창을 함께 쓰는 건가.”

“내키는 대로.”

이진한은 무라마사를 놓고는 다시 용아청성창을 쥐었다. 방금처럼 기습하는 것이 아닌 이상, 한 번에 두 가지 무기를 휘두를 필요는 없다. 날카로운 창끝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엑스는 옅게 숨을 내뱉고는 기습적으로 땅을 박찼다.

쉴 새 없는 공방의 연속. 물론 우위를 점한 것은 이진한이었을 따름이었다.

“…저 사람, 더 강해졌네요.”

성벽 위. 힘의 보존을 위해 「사계」를 해제한 채 그 앞에서 펼쳐지는 격전을 보고 있던 일레이나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게요. 안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어디서 무슨 수련이라도 하고 오신 건가?”

엘레오노라와 미르엘 역시 의문을 드러내었을 때, 전장 곳곳에 흩어져 있던 다른 여섯 마인의 기운이 이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베르하임 국왕도 그것을 눈치챈 듯 마나를 끌어모으며 싸울 준비를 하는 듯했다.

일레이나 역시 다시 한번 「사계」를 활성화하며 하늘로 날아오르려 할 때, 홀로 얀카와 엑스를 압도하던 이진한이 그녀에게로 흘깃 시선을 보냈다.

“…나서지 말라는 건가?”

“그런 것 같아요.”

얼마나 강해졌기에 여덟이나 되는 마인을 상대로 혼자 싸우려고 하는가. 그래도 혹시 모르기에 일레이나가 대비하고 있자, 이진한은 사방에서 새로이 등장해 자신에게로 닥쳐오는 마인들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악마화.”

쿵.

이전과는 사뭇 다른 존재감이 전장을 짓눌렀다.

몇 번이고 이진한이 악마화하는 것을 본 그녀들 역시 뭔가 달라진 분위기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뜬바.

넘실거리는 마기를 전신에서 풍기던 이진한은 말 그대로 양 떼 안에 풀어 놓은 사자처럼 막힘 없이 그들을 휩쓸고 다녔다.

타다다닥-!

모두가 그 엄청난 신위를 목도한 채 멍하니 있던 가운데 홀로 성벽 위를 박차며 달려오는 인영이 있었다.

소드 마스터와 동격으로 취급되는 팔라딘임에도 불구하고 이마에는 땀이 흥건하다. 푸른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있었고, 새하얀 피부는 이상하리만큼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게.”

도미니온 유리아는 손끝을 바들바들 떨며 전장에서 날뛰고 있는 이진한을 가리켰다.

일레이나는 그녀가 왜 그런가 싶었지만, 이내 무언가를 깨닫고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베르너 님을 용사라고 알고 있지.’

용사란 지극히 신성한 이름이다.

여신에게 선택받은 존재로 그 증표인 성검을 휘두르며 찬란한 빛으로 세상에 낀 어둠을 걷어내는.

하지만 지금 저 앞에서 펼쳐지는 모습은 용사라기보단, 악의 화신 같은 모양새가 아닌가.

독실한 신자인 유리아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다, 당신들 표정을 보니 이미 알고 있었군요. 저를 속이신 건가요. 이 어찌….”

큰 충격을 받은 듯 계속해서 주저리주저리 말을 뱉어내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면서 흠칫 몸을 떨더니 경계의 시선을 보낸다.

일레이나가 뭐라고 할까 고민하던 사이, 엘레오노라가 먼저 앞으로 나아가 유리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말씀드렸잖아요. 당신은 베르너 님을 용사라고 하시지만, 일단은 검은 현자의 계승자시라고요.”

“…계승자.”

“검, 창, 마법, 활 그리고 신성력과 마기까지 다루지 못하는 것이 없으시죠. 당신은 당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본 걸 부정하실 건가요?”

단순히 마기를 사용한 것으로 악마 숭배자라고 여기며 마녀사냥한 이들과 같은 실수를 범할 것인가.

엘레오노라의 주홍빛 눈동자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저는….”

유리아는 살짝 비틀거리며 성벽의 난간을 짚었다.

설마 용사로 생각했던 이가 마기를 사용하다니. 그것도 마검이나 그런 어쭙잖은 것이 아니라 정말 악마로 생각될 정도의 농밀한 마기가 아닌가.

하지만 검은 현자의 계승자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고대 영웅인 《지혜》는 세상 모든 것을 다룰 수 있기에 현자라고 불렸으니.

-크어어어어!

그때, 전장 위로 마기에 물든 이진한이 내뱉는 포효가 울려 퍼진다. 자신에게 덤벼든 마인의 목을 뽑고 팔다리를 자르고 그 시체 위에서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곁에 있던 마인들이 압도되어 주춤거릴 정도로 광기에 찬 모습이었다.

“…저것도 계승자인 영향인가요?”

“어.”

엘레오노라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무언가 그럴듯한 말이 없을까.

찰나에 옆쪽에 있던 미르엘에게 시선을 보냈지만, 그녀 역시 난감해하며 별 도움이 되지 않던바.

엘레오노라는 끝내 머리를 쥐어짜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오셔서 들뜨셨나 보네요.”

***

팍!

이진한은 거대한 몸뚱이에서 거칠게 뜯어낸 머리를 들고는 남은 마인들을 바라보았다.

“어디 동물원이라도 차렸나. 종류별로 다 있네.”

마인들은 모두 투르마크라는 성을 지니고 있었다.

북쪽 숲에서 싸운 줄루를 시작으로 얀카, 엑스, 위스키, 빅터, 유니, 탄죠, 시에라, 마지막으로 로메로까지. 총 여덟 마리의 마인이 마수로 변해 그에게 닥쳐왔었다.

몇 번의 격돌 끝에 남은 것은 원래 있었던 얀카와 엑스, 그리고 코끼리의 형상을 한 빅터와 뱀의 형태를 한 시에라 이 넷이 전부였다.

-어찌 용사가 이런 마기를.

-아까 전장에 떨어져 내렸던 것은 신성력이었다. 설마 마기와 신성력을 둘 다 다룰 수 있다고?

남은 이들 역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고대 신의 잔재를 흡수한 바포메트의 마기는 그들보다 몇 단계 위의 격을 뽐냈을뿐더러, 도원경에서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수련했던 이진한의 무력에도 한참 미치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아직 여유롭다.’

물론 보통의 상태였더라면 상대의 숫자가 더 많았기에 한층 더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바포메트의 힘을 빌려 그 간극을 채우자 압도적인 신위를 보일 수 있게 되었다.

툭.

바이콘의 형상을 한 유니의 머리를 바닥에 내던진 이진한은 마검(魔劍)을 들어 올리며 남은 이들에게 겨눴다.

“슬슬 그 무거운 엉덩이를 뗄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데.”

-….

마물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서로 시선을 마주친다. 그중 토끼의 형상을 한 엑스는 창으로 땅을 짚으며 날카로운 울음을 내뱉었다.

-맥스웰 님께서 나서신다면 네놈 따위는 순식간일 것이다.

“맥스웰이라.”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메피스토와 달리 맥스웰은 잘 알고 있지 못했다. 심지어 악마로서 정의가 뚜렷한 메피스토와는 달리 맥스웰은 그저 방정식 같은 이론의 기조로 가정된 존재가 아닌가.

“녀석은 메피스토보다 강한가?”

-당연한 소릴. 거짓과 기만의 악마 따위가 패력(敗力)의 악마와 나란히 어깨를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그렇다는 소리지.”

패력(敗力)의 맥스웰.

대충 들을 이야기는 전부 들었다.

거짓과 기만의 악마라 불리던 메피스토 역시 그러한 강함을 자랑했다. 그런 판국에 패력이라는 이름을 지닌 맥스웰은 얼마나 강하겠는가.

-그러니…!

이진한이 겁먹었다고 생각한 엑스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아직 협상의 여지는 남아있다. 사도가 몇몇 죽었지만, 그러한 것쯤은 대사에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얼굴 위로 그어지는 실선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서걱.

그라나다의 날이 흉포한 기세로 남은 마인을 도륙한다. 마기는 더 큰 마기를 삼킨다. 메피스토 급의 악마조차 격이 부족해 발버둥 치던 가운데, 그 하위 존재인 마인이 버텨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컥!

가슴을 찔린 얀카의 두 눈이 커졌다.

사지가 잘려 나간 것이라면 회복할 수 있지만, 체내를 파고든 마검이 존재의 근원이 되는 마기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커다랗게 부푼 몸집이 점점 쪼그라든다.

얀카는 두 팔을 쉴 새 없이 휘두르며 이진한을 공격했지만, 강철을 찢는 날카로운 손톱은 그 몸에 둘린 짙은 마기에 생채기조차 남기지 못했다.

-…매, 맥스웰 님.

“뭘 아련하게 부르고 있….”

귓가를 스치는 파공성에 이진한은 마검을 놓고는 두 팔을 교차했다. 그와 동시에 저 전장 끄트머리에서부터 느껴지는 무언가가 찰나 간에 닥쳐와 그 위를 후려쳤다.

콰아아아앙-!

싸움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이진한의 신형이 밀려났다.

어찌나 강력한 힘이었는지 그의 몸은 바로 뒤에 있던 성벽에 박혀 들은바.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그것으로 한계에 이른 듯 자글자글한 균열이 사방에 퍼져나갔다.

“…어후.”

묵직한 충격이었다. 바포메트의 짙은 마기조차 금이 가서 떨어져 내릴 정도의 힘에 이진한은 두 팔을 가볍게 털어내며 쌓인 충격을 해소했다.

“네가 맥스웰인지 하는 놈인가.”

“그렇다. 내가 바로 패력(敗力)의 악마, 맥스웰.”

피처럼 새빨간 머리카락이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하늘 위로 솟구친다. 전신엔 흉터가 가득한 근육이 울룩불룩했고, 꽉 쥔 주먹에선 가늠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내 아이의 부름에 달려왔노라.”

쿵.

그 전신에 휘몰아치는 마기의 격은 메피스토를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로 강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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