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17화 (117/210)

◈ 117.

-…보통 인간이 아니지 않느냐. 블랙 워커의 정점이라 불리는 놈이다.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겠지.

투르마크 얀카는 궁색한 변명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여자는 변함없이 한심하단 표정으로 혀를 차며 베르하임 국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용사는 이 안에 있겠지.”

“…용사?”

“너희들이 베르너라 부르는 그 남자 말이다.”

“…….”

베르하임 국왕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검은 현자의 계승자, 용사.

신성 왕국의 이단심문관 도미니온인 유리아가 했던 말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였다.

신성 왕국뿐만 아니라 마왕의 교단 역시 그리 여긴다면, 정말로 그가 용사라는 이야기인가.

“긴말할 것 없다. 그 남자를 내놓아라. 그렇다면 교단의 군세는 더 이상 진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간단한 이야기로군. 베르너 님께선 조금만 기다리면 이곳으로 오실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투르마크 엑스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 사이에 녀석을 빼돌리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믿지?”

“이쪽은 목숨을 걸었거늘, 믿지 못하는가.”

“때때로 있는 법이지. 인간은 다양하니.”

“자네는 마치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듯 말하는군.”

베르하임 국왕의 말에 엑스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대답할 가치가 없는 말이라는 듯 창을 들어 올렸고, 그 위로 농밀한 마기가 피어오르며 점차 주위를 잠식해나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경고다. 그를 내놓거나, 성문을 개방해라. 그렇다면 네 백성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겠노라 약속하지.”

“으하하하! 그것 또한 재미있는 이야기군.”

베르하임 국왕은 크게 웃음을 터트린 뒤 두 주먹을 쥐었다.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 하시게. 그게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니.”

“…놈!”

엑스가 서늘한 얼굴로 창을 내질렀다. 마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지며 성벽 쇄도할 찰나, 베르하임 국왕의 앞으로 활활 타오르는 불의 고리가 나타나 기다란 벽을 이루었다.

“…시답지 않은.”

성벽 위로 한 인영이 떠올라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야에 선명히 들어오는 보랏빛 머리카락. 그녀가 용사의 동료인 일레이나 유클리드임을 깨달은 엑스는 선명한 적의를 보이며 창을 내질렀다.

파아앗-!

날카로운 참격이 불의 고리를 흐트러트리며 그녀가 있는 하늘까지 쇄도했다. 베르하임 국왕은 그것을 보고 황급히 땅을 박차려 했으나, 앞을 막아서는 얀카에 의해 발이 묶이고 말았다.

“시답지 않은 게 누군데.”

일레이나는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참격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사계」를 앞으로 내세운 채 하나의 마법을 더 발동했을 따름이었다.

“…닿질 않는다고?”

엑스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여전히 날아가고 있는 자신의 참격을 바라보았다.

어디에 막히거나 방향이 바뀐 것이 아니다. 순식간에 허공을 뛰어넘어 저 여자의 몸을 꿰뚫었어야 할 참격은 목표물에 도달하지 못한 채 언제까지고 날아가는 중이었다.

서로 간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든 몇 발자국만 내디딘다면 금세 도달할 그런 정도. 하지만 참격은 끝내 도달하지 못한 채 힘이 다해 스러지고 말았다.

일레이나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태연한 모습으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실전에서는 처음 발동하는 마법이기에 손 위로 식은땀이 흥건해질 정도로 긴장했지만, 전장 아래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적들에게 오만한 시선을 보냈다.

“한 번으로 끝이야?”

고대 신의 잔재가 봉인된 지하실에서 하와와가 메피스토의 진입을 막기 위해 펼친 「무간」은 그곳과 이어진 모든 통로를 없앤다. 도달할 길이 없으니 닿지 못하는 공간이 되어버리는 개념.

하지만 공간이라는 현상 자체에 개입하는 것은 아직 일레이나의 경지로는 요원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공간을 없애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공간을 덧붙여 늘리는 것이라면 시도해볼 법한 일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사계」에 이은 일레이나류 오리지널 마법.

“「애드(Add)」”

다시 한번 펼쳐진 무한의 장벽이 곳곳으로 쇄도한 참격을 지연시켰다. 그 모습을 본 일레이나가 의기양양한 시선으로 밑을 내려다보자, 엑스의 눈에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

“그래, 그렇다 이 말이지.”

베르하임 국왕과 얀카는 다시 한번 치고받으며 거친 싸움을 이어나갔다. 그 옆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뎌온 엑스의 창끝으로 심상치 않은 마기가 휘몰아치며 전보다 수십 배는 더 많은 참격을 쏘아 보냈다.

“…어.”

「사계」를 다루던 일레이나의 손끝이 멈칫했다.

「애드」의 발현이 잘 된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아직 충분한 데이터가 쌓이지 않았기에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도 대략적인 수치는 가늠하고 있지만….’

당연히 무식할 정도로 쇄도하는 이 모든 참격을 버티기엔 어려워 보였다.

“읏!”

찰나에 판단을 내린 일레이나가 크게 왼팔을 휘두르며 방어 마법을 펼칠 찰나, 등 뒤쪽으로부터 들려오는 맹렬한 파공성에 헛바람을 내뱉었다.

베르하임 국왕은 저 마인들과 같은 이들이 적어도 여섯은 더 있다고 했다. 잠자코 있던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인가.

하지만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예상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파아앗─!

아직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수백 개의 새하얀 유성이 하늘을 가득 뒤덮으며 떨어져 내린다. 성벽 위에선 그 갑작스러운 현상에 고함을 지르며 대응하려 했지만, 일레이나는 유성의 발원지가 왕성임을 깨닫곤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싸우는 도중에 한눈팔면 안 되지.”

한계에 다다른 「애드」의 장벽 너머로 수십 개의 참격이 들이닥친다. 일레이나가 황급히 그것을 깨닫고 다시 몸을 돌릴 찰나, 전장으로 떨어진 유성우가 커다란 폭발을 일으킴과 동시에 한 인영이 그녀의 곁으로 내려앉았다.

웅웅.

용아청성창 위로 눈부신 신성력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창대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을 때, 새하얀 궤적이 허공을 찢어발기며 자신들 쪽으로 쇄도하던 참격을 모조리 분쇄해버렸다.

“이번엔 조금 일찍 왔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일레이나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등장한 이진한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으면서도, 입은 쉬지 않은 채 말을 쏟아냈다.

“아뇨. 한참 늦으셨는데요? 안쪽에 들어간 직후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시는 거예요?”

“…하하.”

이진한은 투정부리는 듯한 일레이나의 말에 쓴웃음을 짓고는 곧바로 그녀의 허리를 잡고는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꺄악!”

갑자기 무슨 짓이냐. 얼굴이 새빨갛게 된 일레이나가 따져 물을 찰나,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쳐 지나가는 날카로운 참격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다친 사람은 없지?”

“…네. 저들이 나타난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전까지는 수성전만 계속했으니까.”

“그런가.”

이진한은 옅은 미소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근 한 달 동안 도원경에 갇혀 신물이 나도록 수련만 했다보니 탁 트인 공간으로 나오자 감회가 색달랐다. 비록 코끝을 스치는 것이 피 냄새와 형용할 수 없는 악취라 할지라도.

“…언제까지 안고 있을 거예요?”

일레이나는 살짝 떨리는 손끝으로 그의 몸을 밀어냈다.

옷 위로 느껴지는 탄탄한 근육과 뜨거울 정도의 온기에 두근거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지만, 밑으로는 한창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더욱이 지켜보고 있는 눈도 많았기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이 앞에 있는 둘이랑 움직이지 않은 것이 여섯. 그리고….”

이진한은 그런 일레이나의 마음을 모르는지 날카로운 눈으로 전장을 훑었다. 북쪽 숲에서 싸웠던 투르마크 줄루와 같은 기운을 지닌 녀석이 여덟, 그리고 군세의 최후미에 심상치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필시 그것이 이 군세의 우두머리일 터.

‘메피스토 되는 존재라면.’

용아청성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는 많은 것을 잃었지만, 이번에는 단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이진한은 그런 각오를 불태우며 짧게 숨을 내뱉었다.

“일레이나, 너는 성벽 쪽을 부탁해. 혹시라도 달려드는 놈이 있으면 한순간이라도 좋으니까 발을 묶어줘.”

“…당신, 뭔가 여유로워졌네요.”

“저 안쪽에서 푹 쉬고 와서 그런가 봐. 하여튼 부탁한다.”

“끈덕지게 물고 늘어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일레이나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본 이진한은 씩 웃는 것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하늘에서부터 천천히 성벽 앞으로 내려섰다.

쿵.

그의 등장을 기점으로 치열하게 싸우던 베르하임 국왕과 투르마크 얀카는 서로 거리를 벌린 채 떨어졌다.

엑스 역시 얀카의 옆으로 물러난 상태.

그녀는 자신의 참격을 너무나도 쉽게 상쇄한 이진한을 바라보며 그 강함을 가늠하는 중이었다.

“용사 베르너.”

“어. 난데.”

“…마계의 일흔둘의 군주 한 분이신 자간(Zagan)님의 전언이다.”

마왕의 전언.

그것이 시사하는 의미에 베르하임 국왕의 두 눈이 크게 뜨였을 때, 엑스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무릇 용사란 우리와 대칭점에 있는 대칭점에 있는 존재지만, 서로 같은 목적을 지녔다면 손을 잡을 수도 있을 터. 여기서 61위계의 마왕 자간이 용사인 자네에게 제안하는 바이다.”

우리와 손을 잡자.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중간계의 절반을 주겠다.

“허.”

이진한은 헛웃음을 토해내었다.

마왕이 용사에게 막대한 보상을 대가로 손을 잡자는 이야기는 흔히 있는 것이었다. 가끔 그 역시 나라면 그냥 마왕의 손을 잡을 텐데, 라며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설마 자신에게 그러한 제안이 올 줄이야.

“마르바스보다 낫네. 녀석은 다짜고짜 날 죽이려 했으니까.”

“대답은?”

“하나만 묻자. 고작 61위계따리의 마왕이 무슨 능력으로 내게 중간계의 절반을 준다는 것이지?”

“…거기서 또 이런 말씀을 전하셨다.”

엑스는 자신이 섬기는 마왕이 모욕당해 화가난 듯했지만, 가까스로 그것을 눌러 참고는 평정을 가장했다.

“용사의 힘은 본디 마기와 상극. 특히 마왕에 이르는 존재일수록 더 치명적이다. 하지만 혼자의 몸으로 일흔둘에 달하는 마왕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자신은 중간계에 큰 뜻이 없다. 그러니 손을 잡고….”

“손을 잡고 다른 마왕을 죽이자?”

“그렇다.”

이진한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단순히 인간을 배신해 자신과 손을 잡자고 하는 줄 알았건만, 마왕끼리의 다툼에서 장기 말로 사용하겠다니.

“우리는 용사의 힘에 도움이 될 성물(聖物)을 적지 않게 보유하고 있다. 이것과 네 힘이 합쳐진다면 설사 마왕이라 할지라도 무찌를 수 있을 터.”

“내가 마음을 바꿔먹는다면?”

“맹약을 맺으면 된다. 그것은 설사 용사라 할지라도 거절할 수 없으니.”

이야기가 묘하게 돌아가자 베르하임 국왕이 긴정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진한은 가볍게 손을 내저은 채 엑스를 향했다.

“일단 정리하면 마왕이 내게 동맹하자고 손을 내민 것이지? 너넨 그 사자고?”

“그렇다. 만일 받아들인다면 메피스토 대공의 건은 불문에 부친다고 하셨다. 자간 님께선 인자하신 분이다. 목적을 위해선 조금의 허물 따위는 용서하기로 마음먹으셨다.”

“거절한다면 그 죄까지 물어서 죽이고?”

“용사의 혼은 더없이 귀한 것이다. 섣불리 죽일 리가….”

“야.”

이진한은 용아청성창을 까딱이며 말했다.

“그게 부탁하는 사람 태도냐?”

“….”

엑스의 표정이 모호하게 변했다. 자신은 그저 자간 님의 말을 전했을 뿐인데 갑자기 무슨 태도 운운이란 말인가.

“나 같으면 너희가 지니고 있다는 성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 손잡자고 엎드려 부탁하겠다.”

“우리를 모욕하지 말아라. 우리는 자간 님을 섬기는….”

“내가 만약 자간인지 지건인지 하는 마왕이랑 손잡는다면 너희를 죽이는 것을 조건으로 삼을 건데?”

“….”

엑스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 옆에 있던 얀카 조차 그것은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 모습을 본 이진한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자, 엑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리를 농락한 것인가.”

“마왕에게 전해라. 내가 말했던 대로 성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면 생각은 해보겠다고. 대신에 네놈들은….”

서걱─.

허공에 수놓아지는 용아청성창의 궤적은 마치 섬전과도 같았다. 극한에 다다른 베르하임의 「강권」을 수십 번 가격당하고도 멀쩡했던 투르마크 얀카의 팔이 순식간에 찢겨나가며 바닥을 구르는바.

이진한은 서늘한 안광을 내뿜으며 용아청성창을 손안에서 회전시켰다.

“한 놈도 살아 돌아갈 생각하지 마라.”

북쪽 숲에 살아가는 세 자매의 복수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으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