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아직 네겐 먼 이야기다. 나 역시 짐작만 할 뿐이지. 모든 클래스가 초월지경에 오르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가.”
이진한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러한 경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것부터 큰 수확이었다. 대현자의 말대로 일단 모든 경지의 초월지경을 달성하는 것이 급선무.
그러니 휴식을 끝내고 다시 검을 쥐었다.
“슬슬 다시 해볼까.”
당장 그의 목표는 검사 클래스의 초월지경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도원경 내에서 그랜드 소드 마스터와 수백 번의 대련을 통해 숙련도와 경험치가 대폭 증가했다. 이 정도면 이제 검호와도 검만으로 맞붙어 그리 크게 밀리지 않을 정도.
물론 경지의 차이가 있으니 이기진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이전처럼 허무하게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물론 다른 클래스 역시 이전과 비교하자면 확연한 성장세를 보였다.
스피어 마스터, 보우 마스터, 마스터 어쌔신, 주술사, 네크로맨서 등등 거의 모든 클래스가 이 한 달간 크게 상승했다.
단순하게 수치로만 따지자면 초월지경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
하지만 대마도사나 용사 때처럼 변화가 없는 것을 보니 한계를 돌파하는 데는 무언가 특별한 조건이 필요한 것이 틀림없었다.
“네가 굳이 그렇게 하겠다면 우리도 화답해주겠다만, 괜찮겠느냐. 슬슬 나가지 않는다면 그녀들이 위험할 터인데.”
“…위험하다고? 누가?”
이진한의 물음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질문한 대현자 쪽이었다.
“느끼지 못했나? 왕도의 밖으로 마물의 군세가 들이닥쳤다. 외부 시간으로 대충 일주일 정도 지났겠군.”
“그걸 왜 지금 말해!”
“그래서 시간을 줄이고자 쉬지 않고 대련했던 것 아니었나? 미들턴 때처럼 교단 놈들이 움직인 듯싶군. 마물의 숫자는 몇만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 가운데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몇몇 섞여 있다.”
이진한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표적으로 삼은 것일까. 설마 이곳까지 공격받을 줄은 몰랐기에 당장이라도 도원경을 나가 일행에게 달려가고자 출구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조급해하지 말도록. 네가 우려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은 말이지.”
“…출구를 열어줘. 가능하지?”
“가능하다.”
파아앗!
대현자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검은 포탈이 생성되었다. 곧바로 그 앞에 선 이진한은 잠시간 발걸음을 멈칫했고, 이쪽을 바라보는 수십의 자신들을 바라보았다.
“이다음엔 언제 들어올 수 있지?”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그리 멀진 않겠지.”
근 한 달간 얼굴을 마주 보고 있던 이들을 떠나야 한다니 묘한 아쉬움이 생겨났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것에 발목을 붙잡혀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 일렁이는 포탈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딜 찰나, 잠자코 있던 대현자가 고개를 들며 손뼉을 쳤다.
“아, 깜빡할 뻔했군.”
[대현자 클래스 전용 스킬 「무신(武神)」을 획득하셨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스킬의 이름에 이진한이 멈칫했다.
「무신(武神)」
예사로운 이름이 아니었다. 용사 클래스에 올랐을 때보다 더 전율이 흐르는 분위기가 아닌가.
천천히, 상태창 위에 떠 오른 스킬의 설명을 읽은 그의 두 눈이 더 없이 커졌다.
“원래는 해금되는 데 조금 더 걸리겠지만, 이쪽에서 조금 손을 써보았다. 그거면 충분할 테야.”
“충분하고말고.”
이진한은 숱한 대련을 치르기 위해 벗어놓았던 장비를 모조리 착용했다. 그러곤 검은 로브의 끝자락을 펄럭이며 포탈 안으로 발을 내디뎠고, 수많은 자신을 바라보았다.
“오래 기다리진 않을 거다. 곧바로 올 테니까 다음번은 다들 각오하고 있어.”
사라지는 풍경 가운데, 그들이 피식 웃는 것 같은 모습을 본 건 착각이 아니리라.
***
쿵.
묵직한 충격파가 천지에 퍼져나갔다.
베르하임 왕국이 자랑하는 자동 방어 시스템이 수복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
베르하임 국왕은 굳은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대지 위로 가득한 마물들이야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성벽 위에 있는 기사들은 굳건했고, 장병들은 아직 쌩쌩했다. 하지만 그 위에 군림하는 여덟 개의 기운이 문제였다.
‘한 명 한 명이 나보다 강하다.’
성벽의 난간을 짚은 손등 위로 식은땀이 서린다. 대체 어디서 이런 존재들이 나타난 것이란 말인가.
왕으로서 위엄을 보여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원초적인 두려움은 아무리 그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
“제너드. 왕성으로 돌아가 베르너 님의 동태를 살피거라. 우리의 활로는 그것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제너드는 몇 번이나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끝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검은 현자의 계승자는 자신들의 유일한 승기였다. 그러면서 굳이 제너드를 왕성에 보낸 것은 이 왕도에서 가장 안전한 것이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승자가 나온다고 할지라도 활로가 있을까.
그가 강한 것은 알고 있지만, 저쪽 역시 강함을 가늠할 수 없는 강자가 여덟 명이나 된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전하.”
“음.”
정문 쪽에서 일어난 소란에 후문 쪽을 지키고 있던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 그리고 미르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베르하임 국왕은 그녀들을 바라보며 전장을 가리켰다.
“짐작 가는 것이 있는가.”
“…베르너 님은 마인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길 저버리고 마족과 결탁해 그 힘을 받은 존재라면서요.”
“그것이 여덟인가. 쉬이 움직일 수 있는 전력은 아닌 듯 보이니 저쪽도 작정한 듯싶군.”
“그렇겠죠. 아무래도 왕국이 상대이다보니.”
그래도 여덟은 너무 많은 것이 아니냐. 일레이나는 투덜거리며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 한 명 한 명이 나보다 강할 걸세.”
“수성한다고 해도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하겠죠?”
“계승자께서 빨리 나오시길 바라는 수밖에.”
“그래도 최대한 버텨보죠.”
일레이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투지를 불태우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들 역시 예전보다 훨씬 성장했다. 엘레오노라는 어느덧 5클래스를 바라보고 있었고, 확연한 성장세를 보이는 미르엘은 익스퍼트 최상급 초입에 있었다.
자신은 변주를 가한 《영원》의 마법 중 일부를 독자적인 방식으로 개편하는 데 성공한바.
이전처럼 허무하게 패퇴할 생각은 없었다.
슈우우욱─.
그때, 전장에 흐르던 기류가 뒤바뀌었다. 분위기 따위의 추상적인 감상이 아니었다. 허공에 구멍이라도 난 듯 세차게 흐르던 바람이 어느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
그 너머에서 느껴지는 것은 가늠할 수 없는 미증유의 힘.
일레이나가 두 눈을 크게 뜨며 「사계」를 발동할 찰나, 베르하임 국왕이 먼저 성벽 위에서 뛰어올랐다.
콰아아아앙-!
재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의 막대한 기파가 전장을 가로지르며 쇄도했다. 마치 거센 폭풍이 소용돌이치는 듯한 그런 광경이었다.
“흡!”
베르하임 국왕이 기합을 토해내며 마력을 끌어올리자 대지가 요동치며 몰려든 토사가 성벽 앞에 두꺼운 벽을 세운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수십 겹의 배리어가 둘렸고, 그 위로 폭풍이 쏟아져 내렸다.
“전하-!”
성벽 위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애타게 울려 퍼진다. 그만큼 전장 위에 펼쳐진 광경은 살벌한 것이었다.
파가가각!
배리어는 찰나의 순간을 막아내지 못했고, 토사의 벽은 시시각각 깎여나갔다. 그 뒤에 서 있던 베르하임 국왕은 전신에 마나를 두른 채 두 팔을 교차했다.
쿵.
세 걸음.
그는 단 세 걸음 물러난 것으로 쇄도한 기파를 막아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자신과 상대의 격차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귀하는 누구시오.”
베르하임 국왕은 두 팔을 내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모세가 가른 홍해처럼 나뉜 전장의 위, 칙칙한 금발 머리에 시커먼 피부를 지닌 남자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구냐고?”
꽈드득.
뼈가 뒤틀리는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베르하임 국왕의 두 눈이 부릅 뜨였다.
남자의 몸이 점점 부풀어 오른다. 피부에는 짙은 잿빛의 털이 자라나기 시작했고, 전체적인 형상은 마치 늑대의 것과 닮아갔다.
-크르르.
흉흉한 안광 사이로 농밀한 살기가 담긴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가 자세를 잡았을 찰나, 남자는 귀청이 떨어질 듯한 포효와 함께 벼락처럼 쇄도해왔다.
-크헝헝!
인간의 형태를 벗어난 괴물이었다.
손가락 끝에서 자라난 강철보다 단단한 손톱이 허공을 길게 찢으며 휘둘러졌을 때, 베르하임 국왕은 짧게 숨을 내뱉었다.
검은 현자를 숭상하는 블랙 워커는 천변만화를 기조로 한다. 검, 창, 도, 마법 등등 분야를 가리지 않았고, 강해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극소수일 뿐.
아마 계승자인 베르너가 유일할 것이리라. 그리고 당연하게도 블랙 워커마다 강점을 삼는 분야가 있기 마련.
베르하임 국왕 같은 경우엔 권법이었다.
촤르륵.
그의 의지에 따라 무장이 활성화되며 짙은 묵색의 갑주가 전신을 뒤덮었다. 축으로 잡은 왼발을 강하게 디디고, 오른발로 반원을 그리며 기수식을 취한다. 반쯤 펴진 왼손의 엄지와 검지 사이로 적의 모습을 담겼을 때, 정권의 기수식을 취한 오른 주먹이 비틀렸다.
베르하임류 「강권(强拳)」
-……!
순수한 힘의 격류.
스물여섯의 사도 중 스물다섯 번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투르마크 얀카는 뻗어진 주먹 끝에서 느껴지는 파괴력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두 팔을 교차해 만들어낸 가드를 튕겨낸 주먹이 그의 몸으로 박혀 든다. 마수로 변한 얀카의 두 발이 잠깐이나마 땅에서 들렸을 정도로 강대한 위력.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들며 히죽 웃었다.
-이것으로 끝인가.
“…설마.”
베르하임 국왕은 짧게 고개를 저으며 힘껏 숨을 들이쉬었다. 그 흉부가 크게 부풀어 올랐을 때, 묵직한 주먹의 연격이 투르마크 얀카의 몸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먹힌다.’
자신도 상대도 서로 전력을 발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리꽂히는 주먹은 착실하게 데미지를 주고 있었다.
힘의 격차는 있겠지만, 순수하게 쌓아 올려진 무(武)의 무게는 이쪽이 더 무겁다. 강함을 대가로 마족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자에게 밀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놈!
더는 그 충격을 무시하기 힘든 것인지 투르마크 얀카 역시 공세로 나섰다.
잿빛 섬광이 들이닥치듯 그 발톱이 사방을 찢어발긴다. 형식도, 규칙도 없는 무식함의 극치.
그럼에도 극에 달한 힘이 뒤를 받쳐주자 강철조차 가볍게 찢을 만큼의 위력이 터져 나왔다.
“…흡!”
하지만 베르하임 국왕은 그런 빠르기만 한 눈먼 공격에 당해줄 만큼 무르지 않았다. 목을 향해 오는 열일곱 번의 참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낸 뒤, 다시 한번 준비한 「강권」의 위로 이전보다 한층 더 무거운 기세를 실었다.
‘녀석은 제 맷집을 믿고 이쪽의 공격을 피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자신감에 한 방 먹여줄 작정이었다.
쐐애애애액!
-……!
투르마크 얀카가 그 위험을 감지했을 때는 이미 늦었던바.
하지만 베르하임 국왕은 얼굴을 구긴 채 주먹을 거두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피잉─!
한 자루의 창이 마치 유성처럼 둘 사이를 가르며 성벽에 박혀 들었다. 그 위에 어찌나 강한 힘이 담겨 있던지 성벽 위에 둘려 있던 방어 마법을 무참히 깨부쉈고, 강철로 덧댄 그 철갑을 무참히 꿰뚫었다.
베르하임 국왕은 침중한 얼굴로 새로이 등장한 적을 바라보았다.
“얀카. 고작 인간 따위에게 쩔쩔매는 것이냐. 맥스웰 님께서 실망하겠군.”
녹색 머리가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장발의 여자였다.
그녀는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으로 성벽 깊숙이 박힌 창을 불러들였고, 이내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바라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