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베르하임 국왕이 안내한 곳은 일전 연회 가운데 이진한을 비롯한 그 일행을 초대했던 별실이었다.
엄중한 보안과 뛰어난 실력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어 조용히 이야기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
제너드도 동석하고 싶어 했지만, 주제가 주제인지라 쫓겨나고 말았다.
“자, 그럼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유리아 경은 어째서 베르너 님의 뒤를 쫓고 있었지?”
일레이나를 비롯한 세 여인의 시선은 여전히 적대적이었다.
잠시간 그녀들을 바라보던 유리아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상황이 복잡하게 된 것은 모두 제 탓이니.”
“네 탓이다?”
일레이나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묻자, 그녀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베르너 님께서 악마 숭배자라 와전된 것의 실상은, 암부와의 대치에서부터 기인한 것입니다.”
제국 암부는 검호의 죽음을 감추려 했다.
이진한의 흔적을 쫓아가던 와중 유리아는 그들과 부딪쳤고, 위기를 넘기기 위해 악마 숭배자란 변명을 내뱉었다. 실제로 그 흔적 사이사이 짙은 마기가 서렸던 증거가 남아있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말이었다.
“설마 그것이 신성 왕국의 판단으로 와전되어 제국 쪽으로 흘러 들어갈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로 사과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로만?”
“…추후 교단 측에서 정식으로 보상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확답을 받아낸 일레이나는 그제야 표정을 풀며 만족스럽다는 듯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 그녀를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쪽을 적대할 의사가 없다는 데 괜히 날을 세우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
“그러면 어째서 베르너 님을 쫓아오신 건가요?”
엘레오노라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인 표정.
유리아는 그 질문에 가슴을 손에 얹으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보았습니다.”
미들턴에서 마르바스 교단이 몬스터로 이루어진 군세를 일으켜 쳐들어왔을 때, 천지를 뒤덮은 어둠을 베어 가르는 찬란한 빛을.
신성하면서도 고귀한 그것은 여신이 내린 존재가 아니라면 설명되지 않는 것이었다.
“…용사, 라고?”
일레이나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용사라니. 고대 영웅 중 한 명이긴 했지만, 용사란 타이틀은….
‘아니, 그게 그건가?’
세상을 위험에서 구해내고 평화를 되찾아왔으면 그게 용사지 무엇인가.
더욱이 일레이나 역시 이진한이 미들턴에서 보였던 활약을 잊지 않고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본다면 용사로 착각할 법도 할 터.
“그리고 극비의 이야기이지만.”
유리아는 살짝 망설였다.
지금 내뱉을 발언은 교단에서도 정말 극비리에 처리되는 것.
아는 이는 교황과 고위 추기경, 그리고 자신 같은 도미니온을 제외하고는 정말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신탁이 있었습니다.”
“신탁이라니. 여신이 말씀을 내려주셨다는 소린가?”
베르하임 국왕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성 왕국이 공식적으로 신탁이 내려왔다고 인정한 것은 대륙 역사 가운데서도 몇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대륙이 큰 환란에 휩싸였으니 신탁이 정말이라면 예삿일이 아닐 터.
유리아는 사실이라는 듯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이 창궐할 때, 과거의 빛이 깨어나리라.”
그 말에 셋의 몸이 움찔했다.
어둠이 창궐한다는 것은 마계를 뜻할 터.
주목한 구절은 뒤쪽, 과거의 빛이 깨어난다는 부분이었다.
“…이건.”
“그렇죠?”
“그렇군요.”
그녀들은 시선을 맞춘 채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상당 부분 말을 생략했지만, 서로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고대 영웅, 과거의 빛, 깨어난다. 이토록 들어맞을 수가 없었다. 앞뒤를 모르는 이라면 다소 이상한 해석이 끼어들 여지가 있었으나, 적어도 이 자리에 있던 세 여인이 그 의미를 헷갈리는 일은 없었다.
“저는 그곳에서 빛을 보았습니다.”
유리아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마치 사랑에 빠진 듯한 소녀처럼 두 눈을 떴다.
평생 여신을 섬기며 흔들리지 않은 신앙심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자신조차도 두려울 정도의 존재였다.
하지만 그 찬란한 성검에서 피어오른 빛은 의심의 싹을 베어 갈랐으니, 그가 용사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용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온 건가.”
“예. 미들턴에 남은 마르바스 교단의 잔당을 처리하고 황급히 접촉하려 했으나, 이미 떠나셨더군요. 그래서 그 행적을 조사하며 뒤를 쫓았습니다.”
미들턴, 검은 현자의 유적지, 수도 노르디움, 데메드리오 왕국, 마르딘 영지, 노스 벨헤드렘의 북쪽 숲, 그리고.
“…이곳 베르하임 왕국까지 말입니다.”
선명히 빛나는 푸른 눈동자 위에는 강렬한 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
“…허억, 허억.”
이진한은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누웠다.
밖에서 일주일이 흘렀을 때, 도원경은 한 달가량이 지난 후였다.
그는 식사 시간을 제외하곤 단 삼십 분도 쉬지 않은 채 다음 대련을 이어나갔다. 설사 그것이 싸움이 아니라 스킬 운용이나 테크닉에 관한 이론일지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 달이란 시간을 갈아 넣으니 모든 클래스의 숙련도가 전체적으로 대폭 상승한바.
그랜드 소드 마스터는 질린 얼굴로 말했다.
“내가 충분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만 나가도 된다고!”
“아니면 좀 쉬도록. 너, 이곳에 들어온 뒤로 지금까지 한숨도 눈을 붙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처음 봤을 땐 틱틱거리던 신궁조차 우려를 드러낼 정도의 강행군이었다.
“흐흐.”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그들의 말대로 이진한의 정신은 거의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가만히 있자면 연신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고, 어지럼증이 도는 것이 시야가 핑핑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낮은 웃음을 토해낸 뒤 자리를 박차며 몸을 일으켰다.
“한 번 더.”
“….”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클래스의 이진한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녕 정신이 마른오징어가 될 때까지 쥐어짤 작정인가.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한 달 동안 각자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번까지 대련을 치렀다.
물론 결과는 전패(全敗).
단 한 단계의 차이라곤 하지만, 그것은 깊은 절벽 사이처럼 매울 수 없는 깊이가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 단계까지 훈련이 끝났다. 네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성장은 모두 이루었어.”
“훈련은 삼 단계까지 있다며.”
“…지금 상태로는 삼 단계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잘못 생각했어. 의지나 욕구의 문제가 아니다. 전제 자체가 잘못되어 있으니 이쪽의 실책이라 할 수 있겠군.”
“불가능한 게 어디 있어.”
손에서 불덩이를 만들어내고, 검에서 오러를 줄기차게 뿜어내는 세계관이다.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도 하다 보면 되지 않겠는가. 더욱이 이 몸의 스펙은 같은 인간 중에서도 최상급. 어지간해서는 안 될 일이 없었다.
“정신체라도 무리하는 것은 좋지 않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쓰러질 수도 있어.”
“난 그렇게 나약하지 않….”
“하와와의 일 때문에 그러느냐.”
“….”
심중을 꿰뚫는 대현자의 말에 이진한은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곤 제자리에서 입을 우물거리더니, 이내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자꾸 까먹는단 말이야. 너흰 나였지.”
“현재의 사고까지 읽을 수 있다는 건 아니다. 다만, 과거의 기억과 지금의 행동에서 유추했을 뿐이지.”
대현자 다운 날카로운 통찰력에 이진한은 한숨을 내쉬며 근처에 있던 바위에 걸터앉았다.
“너는 내가 이 세계에 오게 된 이유를 뭐라고 생각해?”
“모른다. 이때까지의 기억과 정보, 그리고 잔재들로 추론한다고 해도 주어진 것이 너무 미약해 결과로서 규합되지 않는다.”
“불확실한 것이라 해도 좋으니까.”
상관없으니 말해달라.
그 태도에 대현자는 한숨을 내쉬곤 말을 이었다.
“일단 기초 가설부터 세워야겠지.”
“기초 가설을 세운다?”
“나 혼자 왔던가, 아니면 여러 사람이 함께 넘어왔던가.”
“…그럼 뭐가 달라지나?”
“상당히.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시점이다.”
“시점?”
“천년이란 시간이 키워드다. 고대 영웅의 기록은 너무나도 뚜렷해. 누군가 의도적으로 남길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이 실존했다는 이야기겠지.”
“그게 우리였고?”
“만일 그렇다면 어째서 그때의 기억이 없는지, 또 어째서 천년 후에 다시 깨어난 것인지가 난제다.”
“아예 그런 상태로 넘어왔다는 건 안 되나? ‘월드’가 업데이트되면서.”
“게임과 이 세계를 구분 짓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으니 혼연일체라 생각하는 것이 맞겠지.”
“…그게 무슨 황당무계한.”
“어디까지나 가정의 이야기다. 잠자코 들어보도록.”
대현자는 이진한의 입을 막은 채 설명을 계속했다.
“나는, 우리는 ‘월드’에서 이쪽 세계로 넘어오게 되었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니 누군가 모종의 의도를 지닌 채 벌인 짓이란 것은 명백하지.”
최소 인원이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포함해 고대 영웅이라 불리는 일곱이었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은 숫자가 함께 넘어왔을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 대륙에 있는 유적지와 기록들을 보자면 그 설이 유력해 보였다.
“누가, 왜. 이게 가장 중요하겠군.”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라는 항목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유추할 수 있다고?”
같은 대현자끼리 이리도 차이가 나는 것인가.
이진한이 두 눈을 끔뻑거리며 어서 말해보라 재촉하자, 대현자가 한심하단 시선으로 말했다.
“성능의 차이가 아니라 사고의 차이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떠먹여 주길 바라는 것이냐.”
“그래서 뭔데.”
“…고대 악신의 토벌.”
“그것 때문에 우릴 이 세계로 불러왔다고?”
“꼭 고대 악신일 필요는 없다. 이곳에도 그와 비슷한 존재가 있었겠지. 그리고 그것을 쓰러뜨리기엔 자신들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으니 다른 외부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것일 테고.”
“그래서 나를 비롯한 랭커들을 소환한 건가.”
“말하지 않았느냐. 불린 것은 우리뿐만이 아닐 수도 있다고.”
“너무 근거 없는 추론이긴 한데.”
“때로는 간단하게 생각한 것이 명쾌한 해답이 될 수 있지.”
“…그건 좀 멋진 말이네.”
이진한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현자가 내뱉은 말을 기억했다.
“그런데 고대 악신은 토벌되었잖아. 만약 정말 그런 목적으로 불러왔다고 하면 어째서 아직 이 세계에 남아있게 된….”
“두 가지다. 남기를 희망했던가, 버림받았던가.”
섬뜩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무작정 불려와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수없이 긴 세월을 지내다 천년 뒤에 깨어났다는 말인가.
“…후자는 아니길 바래야겠네.”
“나도 그렇게 빌고 있다.”
짧게 한숨을 내쉰 이진한은 이제 휴식은 충분하지 않냐는 시선으로 대현자를 바라보았다.
“수련의 삼 단계는 너와 싸우는 것이겠지?”
“나는 아무런 전투 능력이 없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대현자의 눈은 그가 아무런 전투 능력을 지니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미르엘이랑 싸워도 무참히 패배할 정도의 수준. 하지만 이진한은 씩 웃으며 어깨를 돌렸다.
“날 너무 무시하지 마. 저기 있는 녀석들이 전부 너와 합쳐질 것 아니야.”
모든 클래스의 초월지경.
그리고 그것들을 통제하는 대현자.
자신이 바라는 이상향이었고, 그것이야말로 도원경이 보여주고자 하는 궁극의 목표였다.
“…그런가. 너 역시 나였지.”
“그래.”
대현자는 씩 웃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초월지경이라는 것에만 그리 집착하지 말도록.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보다 더 위의 경지가 있으니 말이지.”
“…그보다 더 위가 있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에 이진한의 두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