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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14화 (114/210)

◈ 114.

이진한이 도원경으로 들어간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남겨진 이들은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 이틀째의 날부터 이곳 베르하임 왕도에 들이닥친 소란에 휘말렸다.

수만에 달하는 마물 군세가 갑작스럽게 땅에서 솟아난 듯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마르바스 교단이 음모를 꾸몄던 미들턴과 비슷한 양상.

이번 역시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으니 이번 역시 마왕을 섬기는 교단이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콰아아아앙-!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수만의 마물.

왕도는 유례없는 위기를 맞이한 듯싶었지만, 베르하임 왕국이 자랑하는 자동 방어 시스템이 접근하는 마물들을 처참하게 박살 내었다.

물론 워낙 그 물량이 많기에 간간이 성벽을 타고 다른 구역으로 밀려오는 이들이 있었다.

미르엘을 비롯한 그녀들은 왕성을 기준으로 서쪽 후문을 맡은바. 도와주겠다는 의지에 베르하임 국왕이 비교적 쉬운 구역을 할당해준 것이었다.

“발포!”

“성벽을 타고 오르게 하지 말아라!”

“뜨거운 물은 준비되는 족족히 쏟아부어!”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시간이 갈수록 정문이 아니라 다른 구역으로 닥쳐 들어오는 마물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수성(守城)의 베르하임이라는 위명답게 정문은 철옹성을 자랑하며 물샐틈없이 입구를 틀어막았지만, 그 이외의 모든 구역에선 치열한 교전이 일어나며 피 튀기는 싸움을 벌였다.

쿠우우웅.

각지에 지휘관으로 배치된 기사들은 병사를 운용하며 성벽을 침범하려는 몬스터와 싸워나갔다. 그러던 중 한 기사의 등 뒤로 성 아래서부터 솟구친 그레이 트롤 한 마리가 내려섰다.

“…큭!”

생각지도 못한 기습이었기에 기사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지만, 녀석은 마기로 인해 일반 트롤보다 몇 배나 강화된 상태. 떨어져 내리는 큼지막한 주먹에 곤죽이 되어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었지만, 그 사이로 쇄도하는 인영이 하나 있었다.

쐐애애액!

저 멀리 싸우고 있던 인영이 성벽을 박차며 탄력적인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기사의 앞으로 도달했다.

동시에 프로스트에서 발해진 서늘한 빛이 허공에 짙은 궤적을 그린다. 그레이 트롤은 이전이었더라면 정면에서 맞붙기 부담스러운 수준이었지만, 그간 고되었던 수행의 성과를 보여주듯 일련의 과정은 물 흐르듯 매끄러울 따름이었다.

저적─.

그레이 트롤의 손끝이 얼어붙는다. 물론 빙결의 권능이라 할지라도 단 한 순간 멈춰 서게 한 것이 전부였지만, 그 가운데 검 끝이 매섭게 휘둘러졌다.

서걱.

한 호흡에 내질러진 수십 번의 참격.

두꺼운 피부를 베어내고 단단한 근육을 파해 친다. 순식간에 넝마가 되어버린 그레이 트롤이 주춤하며 물러날 때, 엘레오노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쉬아아악!

녀석의 발밑으로부터 질풍의 칼날이 소용돌이를 일으켜 그 전신을 휘감는다. 마치 뱀처럼 타고 오르기 시작한 그것들은 미르엘이 헤집어 놓은 흔적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상처를 더욱 헤집어 놓았다.

결국 어지간한 기사들도 상대하기 까다로워하는 마물인 그레이 트롤은 그 치명적인 상처들을 이기지 못한 채 절명해버리고 말았다.

쿵.

쓰러지던 거구의 시체를 미르엘이 거친 발길질로 성벽 아래를 향해 차버렸다. 그러자 올라오던 몇몇 마물이 휘말려 함께 떨어져 내렸고, 이내 곤죽이 되어 녹색 체액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감사합니다. 미르엘 공, 엘레오노라 공.”

“별말씀을.”

목숨을 구함 받은 기사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해오자, 엘레오노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저었다.

미르엘은 여전히 몰려드는 마물들을 바라보며 검에 묻은 체액을 털어내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끝이 없군요. 미들턴 때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거기는 수십만 단위였잖아. 모르긴 몰라도 근처 몬스터는 전부 끌어모은 걸걸? 그래도 여기는 몇만 정도라 며칠만 더 버티면 된다고 하니까.”

“그나마 다행이로군요.”

구우우웅.

둘이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전장 위로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울음이 울려 퍼졌다.

몬스터 중 상위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신호.

그와 동시에 성벽 위로 솟구치는 한 인영이 있었다.

파아앗!

보랏빛 머리카락이 펄럭거리며 그 끝으로 진한 마력을 뿜어냈다.

가볍게 내민 손 위로 떠 오른 새하얀 입방체는 마치 심장처럼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더니 이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하며 마법의 술식을 이뤄내었다.

마도사 클래스 상위 마법 「유성의 진혼곡」

직접 구조를 짜서 발현한 마법이 아닌 「삼라만상」의 축소판, 명명하기를 「사계(四季)」를 통해 구현된 불의 비가 몇 배나 증폭된 위력을 선보이며 전장 위로 쏟아져 내렸다.

“흠.”

일레이나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리지널의 능력을 생각하자면 아직 어린애 장난일 정도로 조악한 수준.

하지만 자신의 경지로는 애초에 구현할 수 없었던 것을 가까스로나마 흉내 냈다는 사실에 스스로 생각해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게 「사계」인가요. 확실히 대단하시네요.”

“아직 볼품없어요. 그나저나 당신들도 날아다니던데요?”

일레이나가 다시 성벽 위에 내려서자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다가왔다. 조금 전의 일격으로 잠시 소강상태가 되어 일선에 여유가 생긴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더 싸웠을까, 끝없이 밀려오던 파도가 점차 멎어감을 느꼈다.

“오늘은 슬슬 물러가는 것 같네요. 다음은 예전처럼 새벽에 닥쳐오겠죠?”

“…그 사람은 언제 나올까요.”

“며칠씩이나 걸리는 것을 보니 꽤 고전하고 계신 듯합니다.”

“그러게요. 어지간한 놈들은 맨주먹으로 때려눕힐 텐데.”

그 만티코어도 수백 마리를 혼자 찢어 죽이지 않았느냐, 일레이나는 작게 웃음을 토해내며 말했다.

정작 그 본인은 도원경 안에서 신물 나게 두들겨 맞고 있을 뿐이었지만, 밖에 있는 그녀들이 알 방법은 없었다.

***

몬스터 군단은 동틀 무렵에 닥쳐와 일몰에 후퇴하기를 반복했다. 오늘 역시 그것과 같았기에 그녀들은 왕도 가장자리에 준비된 전용 막사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쉬는 중 미안한데, 잠깐 괜찮소?”

그러던 가운데 의외의 방문객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세자 제너스, 그가 로브를 뒤집어쓴 이와 함께 막사에 방문한 것이었다.

“손님이 찾아왔소.”

“손님이요?”

“마탑인가요? 아니면 아레나 길드 쪽?”

일레이나는 당연히 그 둘 중 하나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들을 찾아올 사람이 없을 테니.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왕세자는 고개를 저으며 살짝 의아한 얼굴로 답했다.

“둘 다 아니오. 원래라면 이쪽 선에서 잘라내었겠지만, 워낙 신원이 확실한 이라 말이오.”

그가 눈짓하자 뒤쪽에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이가 후드를 내리자 밖으로 드러난 푸른 머리카락이 바람에 찰랑인다.

유리아는 손을 들어 허공에 성호를 그리는 것으로 그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이터널의 애머시스트 경. 그리고 전 황녀이신 엘레오노라 님과 수호 기사인 미르엘 경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신성 왕국 이단심문관, 도미니온 소속 유리아.

그 이름이 나옴과 동시에 모호했던 장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챙-!

제일 먼저 미르엘이 프로스트를 뽑아 그녀의 목에 겨눴다. 엘레오노라는 질풍의 창을 날카롭게 벼렸고, 일레이나는 어느덧 자신의 오리지널 마법이 된 「사계」를 활성화했다.

조금이라도 유리아가 움직이는 낌새를 보인다면 가차 없이 공격할 모양새.

그 격렬한 반응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제너드 쪽이었다.

“무, 무슨. 다들 진정하시오!”

“가만히 있어요.”

“제너드 전하. 신성 왕국과 저희는 적대관계입니다. 이쪽을 우군이라 생각하신다면 따라주시길.”

이진한이 말하길 신성 왕국은 자신들을 악마 숭배자라 재단했다고 했다. 그 탓에 마탑에 방문했을 당시 달의 교단까지 엮여 공격받지 않았던가.

그때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자면 곧바로 공격을 가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일레이나가 많이 참았다고 할 수 있었다.

“…….”

유리아는 침중한 낯빛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신성 교단은 이들과 직접 적으로 척진 적이 없다. 그렇다는 것은 모종의 이유에서 기인한 것일 터. 그녀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암부 쪽에서 흘렸는가.’

암부와 조우했을 당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베르너가 악마 숭배자라 그 뒤를 쫓는다고 한 적이 있었다.

설마설마했지만, 그것이 와전되어 그들이 무언가 핍박받은 적이 있는 듯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 오해가….”

그렇기에 유리아는 사정을 설명하고 오해를 풀고자 입을 열었지만, 그녀들을 자극하는 꼴이 되어버렸을 뿐이었다.

척.

프로스트의 새하얀 검날이 스산한 한기를 내뿜으며 날을 세웠다. 아무리 유리아라 할지라도 목덜미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는 두 눈을 가늘게 뜰 수밖에 없었다.

“자, 자자. 조금만 서로 진정하시고 일단 이야기부터 나누지 않겠소. 유리아 경도 무언가 오해가 있어 풀고 싶다고 했으니…….”

옆에 있던 제너드가 진땀을 흘리며 중재하려 했으나,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다. 그런 와중 소란을 느낀 이들이 점차 몰려들기 시작했고, 종래엔 시찰을 돌고 있던 베르하임 국왕이 몸소 그 자리까지 행차했다.

“무슨 일이지?”

한 명과 세 명의 날 선 대치.

그리고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는 군중까지.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깨달은 베르하임 국왕이 자신의 기세를 피워 올리며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것이.”

슬쩍 그 옆으로 다가간 엘레오노라가 조용히 사정을 설명한다. 베르하임 국왕은 그 이야기를 전부 듣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본인은 베르하임의 국왕으로서 이 일에 대해 중재할 것을 선언하겠다. 이의가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바라는 바입니다.”

“좋다. 신성 왕국에서 왔다고 하였지.”

베르하임 국왕의 눈 위로 강렬한 기운이 서렸다.

“만일 진정으로 검은 현자의 계승자께 해악을 끼쳤다면, 설사 신성 왕국이라 할지라도 베르하임의 이름으로 단죄하겠다는 것을 미리 말해두겠다.”

“…계승자.”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유리아의 눈이 커졌다.

베르너가 검은 현자를 숭상하는 블랙 워커임은 조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그 비정상적으로 다채로운 능력들은 그러한 이유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생각했거늘, 설마 검은 현자의 계승자였다니.

‘베르하임 왕국은 예부터 검은 현자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지.’

심지어 국왕이 직접 계승자라고 단언할 정도면 상당히 진실에 가깝다는 이야기일 터.

허를 찔린 듯한 기분이었으나, 역시라는 생각이 뇌리에 팽배했다.

고대 영웅의 계승자와 용사란 존재의 관계성.

제법 재미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에 유리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여전히 자신을 적대감 서린 태도로 바라보고 있는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아마 당신들께도 흥미가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나지막한 확신을 가진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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