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으음. 비관측, 아니 불관측 계통의 공간인가요.”
연회장에서 실컷 관심을 즐기다 불려온 일레이나는 술에 취한 기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아치형 문 뒤쪽에서 일렁이는 어둠을 보자 단번에 정신을 차렸고 흥미롭다는 눈길로 그 위를 매만졌다.
“당신만 들어갈 수 있는 걸 보면 한정 조건도 걸려 있겠죠?”
“그런 것 같네.”
“일단 《영원》의 마법은 아닌 것 같네요. 적어도 제가 살펴본 논문에서 이러한 현상은 없었어요.”
일레이나는 이론적인 면에서는 이진한보다 더 《영원》에 대해 전문가였다. 그런 그녀가 하는 말이니 틀릴 가능성은 적을 터. 잠시간 턱을 쓰다듬고 있던 일레이나는 손 위로 어설픈 마나의 응집을 피워 올린 채 아치문으로 가져갔다.
“그게 뭐야?”
처음 보는 술식이었다.
일레이나 정도 되는 마도사가 구축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조잡한 구조인바.
그렇기에 이진한이 묻자 그녀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 나름대로 「삼라만상」을 해석해서 열화 판으로 만든 거예요. 실제 효용은 1%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나름대로 쓸모는 있어요.”
“열화 판이라.”
그렇게 듣고 보니 제법 비슷한 구석도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녀가 말한 것처럼 1%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 어디인가.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들어갈 것이냐, 말 것이냐. 일레이나는 그렇게 묻고 있었다.
“음.”
이진한은 상태창을 둘러보았다. 남은 시간은 【461:15:24】. 딱히 피곤한 것도 없고 여타 소모품 역시 마탑에서 전부 보충해두었다.
그야말로 만전의 상태라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걸리는 것은 이 뒤로 남겨지게 될 일행들이었다.
“이 안에 들어가면 아마 단시간 내에 못 나오게 될 수도 있어.”
“그러면 관광이나 하고 있죠, 뭐. 더 걸리면 수련이라도 하면 되고요.”
“맞아요. 저희 걱정은 마세요. 그렇지, 미르엘?”
“마음 놓고 다녀오십시오.”
그녀들은 혹시나 자신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어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 일행의 모습에 이진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베르하임 국왕을 바라보았다.
“얼마가 걸릴진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일행을 부탁하지.”
“맡겨주십시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확답을 받은 이진한은 고개를 들어 아치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검은 현자가 직접 설치했다는 아치문 너머로 펼쳐진 공간. 일렁거리는 어둠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도원경.’
그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가장 유력한 것은 밖에 보관하기 힘든 귀한 아이템 종류의 창고라는 것.
만일 이쪽에 또 다른 검은 현자가 존재했다면 그가 남긴 유산을 얻을 기회일 수도 있었다.
“들어간다.”
짧게 숨을 내뱉은 이진한은 한 번 일행을 돌아보곤 아치문 너머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설마 그사이에 이쪽에 무언가 위기가 닥쳐오겠는가. 그렇다 할지라도 그녀들과 연결된 아티팩트가 있으니 유사시엔 신호를 받을 수 있으리라.
웅웅─.
어둠을 넘자 공기가 요동치며 피부 위를 간지럽혔다. 이윽고 그 길이 끝났을 때, 이진한은 자신의 앞으로 펼쳐진 찬란한 빛줄기를 볼 수 있었다.
[히든 스테이지 「도원경(桃源境)」에 입장하셨습니다.]
[시간의 유예가 정지됩니다.]
[「도원경(桃源境)」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련의 장입니다.]
[도전자 「베르너」의 능력치를 측정합니다.]
[도전자의 특수성에 반응해 「도원경(桃源境)」의 구조가 변화합니다.]
[도전자는 시련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시련을 포기하는 즉시 퇴실 처리되며, 다음 입장까지는 xx:xx:xx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건.”
이진한은 크게 뜬 눈으로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치문의 내부는 마을 정도의 크기였다. 도원경이란 이름에 걸맞듯 어디 깊은 산속에서나 있을 분위기.
곳곳에 구름이 끼어있고,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마치 신선이라도 살고 있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저벅.
고요한 그 위로 이진한이 내디디는 발걸음 소리만이 고즈넉하게 울려 퍼진다.
그는 가늘어진 두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혹시나 있을지 모를 인기척을 찾아 헤맸다.
쐐애애액!
그렇게 얼마쯤 걸어갔을까.
마을 어귀에 도달했을 찰나, 한 줄기 파공성이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화살?”
쏘아진 화살은 발걸음을 멈춘 이진한의 바로 앞으로 박혀 들었다. 어찌나 강맹한 기세였는지 돌로 된 바닥을 뚫고 들어가고 여력이 남아 깃대가 부르르 경련을 토해냈다.
“너에게 출입이 허락된 공간은 거기까지다.”
“…허.”
이진한은 마을 어귀의 첨탑 위로 등장한 한 남자의 모습에 헛바람을 토해냈다. 기다란 장궁, 바람에 펄럭이는 검은 로브, 이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까지.
영락없이 자신의 모습과 닮은 모양새가 아닌가.
“그렇게 날 선 모습으로 대응하지 마. 몇백 년 만의 도전자인데.”
이진한이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고 있을 찰나, 지상에서도 몇 명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들 역시 모두 자신과 같은 생김새로, 차이점이라면 지닌 무구가 다르다는 점이었다.
제일 앞에 있는 이는 기다란 장검을, 그 옆은 도적의 것으로 보이는 짧은 단검을, 그 옆은 스태프를, 그 옆에는 십자가 목걸이를 쥐고 있었다.
“반갑다, 도전자여.”
그중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는 자신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나왔다.
“우리는 너에게서 비롯된 힘이자, 존재이니.”
그 말에 이진한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소드 마스터, 대마도사, 어쌔신 마스터, 보우 마스터, 그리고 용사를 비롯해 기타 클래스까지.
그들이 이루고 있는 구성은 대현자 클래스와 같았다.
“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그래. 이곳 도원경은 자신이 지닌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시련의 장. 너의 가장 큰 적은 너 자신이지. …본래라면 한 명이었겠지만.”
안경을 쓴 베르너는 슬쩍 주위에 있는 이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네 특수성에 반응해 이렇게 되었다. 뭐, 오랜만에 북적거리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군.”
“…하하.”
이진한은 너털웃음을 흘리면서도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아이템이나 얻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건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쳐왔다. 하지만 눈앞의 자신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아예 그것과는 궤가 다른 흐름이 펼쳐질 듯했다.
“언제까지 주구장창 이야기만 나눌 거지? 표정을 보니 실감이 나지 않는 것 같은데, 이럴 때 좋은 건….”
쿵.
주르륵 늘어서 있던 자신 중 한 명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극한에 다다른, 초월지경을 눈앞에 둔 기세.
검을 휘두르는 모양새까지 자신과 똑 닮아있는 것을 확인한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캉-!
농밀한 오러 블레이드가 서로 부딪치며 거친 소음을 내었다. 딛고 선 바닥은 균열이 일어났고, 마을을 뒤덮은 자욱한 구름은 그 여파를 이기지 못한 채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한 번에 다 덤벼올 건가?”
이진한은 소드 마스터 뒤쪽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각각 한 명이 자신의 힘에서 비롯된 존재들이라면 비슷한 격을 이룰 터. 이렇게 놓고 보니 참 많은 클래스를 익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러기엔 아직 네가 많이 모자라다. 지금은 한 명 한 명과 싸우며 네 한계를 느껴보도록.”
“…한계라.”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검을 맞대니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자신은, 자신들은 이쪽보다 딱 반 수 앞서 있었다. 그것을 극복해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일 터.
‘이런 기회를 저버릴 순 없지.’
시간의 유예까지 정지된 마당에 거리낄 것은 없다.
곧 도원경 안으로 거친 소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
“으음.”
일레이나는 기지개를 켜며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살을 즐겼다. 때는 이진한이 아치문 너머로 들어간 지 이틀째 되는 점심이었다.
베르하임 국왕은 이진한의 부탁대로 남겨진 이들의 편의를 성심성의껏 챙겨주었다.
잠잘 곳,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그 외 등등. 한 점의 모자람 없이 대우를 받았고, 둘째 날에는 베르하임 왕국이 자랑하는 청해(靑海)를 구경하러 프라이빗 비치에 놀러 나온 상태였다.
“교류생으로 이곳에 왔을때도 한 번 와보고 싶었는데, 그때는 일정이 빡빡했거든요. 오랜 염원을 이제야 푸네요.”
검은 일색으로 된 과감한 수영복이었다.
맨살의 비중이 높은 것은 태닝을 하기 위해서인지, 썬베드에 누워 보랏빛 머리카락을 살랑이는 뜨거운 바람을 한껏 만끽했다.
“…이렇게 여유롭게 있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베르너 님께 마음 놓고 다녀오시라고 했는데.”
푸른 원피스로 된 수영복을 입은 미르엘이 살짝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왕궁 쪽을 바라보았다.
고작 이틀이 지났다. 특수한 던전으로 판단되는 만큼 며칠이 넘게 걸릴 수도 있다고 했지만,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괜찮아요. 그 사람이니까 나중에 죽을 뻔했다고 엄살 피우며 털레털레 걸어 나오겠죠.”
“그렇지만….”
“당신, 그것도 병이에요. 휴식도 수련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거 모를 만큼 경지가 얕진 않잖아요?”
일레이나는 궤변에 가까운 말을 당당히 말해왔다.
“이왕 시간이 주어진 거 즐겨요. 또 언제 적들이 닥쳐와서 미친 듯이 싸우게 될지 모르는데.”
“미르엘~”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저 멀리서 혼자 바닷물을 첨벙이고 있던 엘레오노라가 손을 흔들었다.
자신의 머리카락 색처럼 새빨간 수영복을 입은 황녀는 한껏 바다를 즐기고 있는 모양새였다.
“자, 봐요. 당신 친구가 부르잖아요.”
“…알겠습니다.”
미르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사실 추운 북부 지방의 출신인 미르엘은 이런 따뜻한 바다는 처음 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익숙지 않아 근처를 서성인 것이었지만, 일레이나의 말 대로 귀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도 안 될 듯싶었다.
“음.”
일레이나는 다시 썬베드에 누워 두 소녀가 바닷물을 참방거리며 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말은 놀라고 했지만, 사실 가장 속이 복잡한 것은 그녀였다.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자 그 위로 불완전한 형태의 술식이 짜이며 「삼라만상」의 구조를 흉내 낸 무언가가 펼쳐졌다.
“…여기서 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이론은 그녀의 특기였다.
디바인 마인드로 뇌의 용적을 나누어 복합 연산을 통해 남들보다 수배 빠른 속도로 계산을 끝마쳤지만, 마법은 이론으로만 끝나는 학문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삼라만상」을 자신의 능력으로 구현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
하지만 굵직한 요소 몇 개를 빼고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들만 채워 넣거나, 그때마다 사용하고자 하는 요소들로 바꾼다면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결론을 내린 일레이나는 견적을 짜고 밤잠을 세우며 술식을 구축했다. 하지만 완성된 것은 이진한 조차 그것이 「삼라만상」의 열화판인 것을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조악한 무언가였으니.
“마법의 효율은 비약적으로 올라갔지만, 흉내조차 내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네.”
아직 이름조차 붙이지 않은 이 술식을 전개한 것만으로 마법의 출력이 2할 정도 상승했다.
학계에 제출하면 희대의 연구라 칭찬받을 만한 성과였지만, 그녀는 《영원》의 마법이 고작 이 정도가 아님을 알기에 속이 쓰릴 뿐이었다.
“그러면….”
댕 댕 댕 댕!
보완하기 위해서 어떤 부분을 건드려야 할까.
그 과정을 고민해볼 찰나, 왕성의 첨탑으로부터 격렬한 타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 역시 그것을 들은 듯 제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고, 마법의 구조를 손보고 있던 일레이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이 씨가 되어버렸네.”
어째서 불행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