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11화 (111/210)

◈ 111.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유리아는 두꺼운 옷깃을 여몄다.

팔라딘이라 할지라도 악명이 자자한 북쪽 숲의 칼바람은 조심해야 함이 옳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곳으로 오기 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지만.”

북쪽 숲까지 당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전에 있었던 마족 세력의 창궐로 인해 피폐해진 상태라 인근 일대는 신성 왕국의 인원들이 대부분 점거하고 있는바.

자신과 같은 도미니온 역시 몇몇 와있기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넘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문제는.

“저들과 어떻게 접촉하냐인데.”

유리아는 용사 베르너의 자취를 쫓아왔다.

마지막으로 흔적이 이어진 곳은 설화석을 캐러 온 한 상단의 말단 용병으로 고용되어 북쪽 숲까지 온 것이었다. 그마저도 길드의 기록이 남아있어서 망정이지 생존자가 한 명도 남지 않아 그 흔적이 끊길 뻔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이르렀다.

용사 베르너가 이곳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북쪽 숲의 마녀들과 조우했고, 종래엔 마녀를 따라 숲의 안쪽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무시무시하네.”

유리아는 붉어진 코끝을 문지르며 광활하게 펼쳐진 숲 위에 남아있는 전투의 흔적을 읽었다.

대체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었기에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흩날리는 눈발이 그 구덩이를 다 덮지 못한 것일까.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간략히나마 유추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용사 베르너 일행은 모종의 이유를 갖고 마녀와 접촉했고, 그 찰나를 노려 습격한 마족 세력과 맞서 싸워 격퇴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마녀라.”

유리아는 천천히 숲 안쪽에 펼쳐진 결계의 가장자리를 훑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북쪽 숲에 사는 것은 《영원》의 계보를 이었다고 알려진 그 후계들이었다. 마녀라 불리기는 했지만, 신성 교단은 잠정적으로 그들을 같은 영웅의 후예라고 인식하고 있는바.

그렇기에 현재까지도 중립적인 태도를 고수한 채 섣불리 접촉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이곳의 조사를 위해서 몇몇 추기경들이 대화를 시도했지만, 모조리 거절당했다고 했지.’

마녀라 불리는 그녀들이 굳이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모종의 이유가 있을 터.

교단에서는 《영원》에게 부여받은 사명이 있지 않을까 예측하였다.

퉁.

유리아는 결계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혹시라도 이쪽의 존재를 눈치채고 나오지 않아 줄까. 대화에 응해준다면 베르너라는 공통 화제로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어차피 막막한 상황이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것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용사! 베르너 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마나까지 실어 큰 소리로 안을 향해 외쳤다.

설마 소리까지 막아내는 결계는 아닐 터.

메아리는 곧 거세 바람을 타고 숲 내부로 흘러 들어갔지만, 한참이 지나도 고요하기만 할 뿐이었다.

“…오늘은 글렀나.”

못해도 사흘 정도는 더 이곳에 있을 예정이니 조급한 마음을 버렸다.

슬슬 해가 떨어지니 다시 도시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내일은 날이 밝으면 일찍부터 올 생각을 했다.

그렇게 몸을 돌렸을 찰나.

저벅.

등 뒤에서 들려온 낯선 인기척에 그녀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

왕궁 지하, 검은 현자를 비롯한 고대 영웅의 기록이 잠들어 있는 ‘보관소’는 예상과는 달리 제법 산뜻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물까지 흐르네요. 지하라고는 믿기지 않아요.”

“공기도 관리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감탄을 터트린다. 꾸며진 풍경 뿐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구조 자체에도 공을 들인 듯했다.

베르하임 국왕은 사뭇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궁을 운영하는 데 예산 편성 중 가장 크게 책정된 곳이 이곳일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관리하고 있네. 아무래도 왕국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니.”

“호오.”

감탄이 나온 것은 이진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건국 기록, 시시콜콜한 잡담, 그리고 타임 스태프까지. 엘레오노라의 말처럼 가장자리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나, 코끝을 스치는 깨끗한 공기는 어디 잘 관리된 박물관에 온 듯한 느낌을 들었다.

왕국의 건국과 같이 시작된 곳이니 족히 몇백 년은 되었다는 것인데 이렇게까지 잘 관리해온 것일까.

“솔직히 건국이 먼저 된 것인지 이곳이 먼저 설립된 건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엇비슷하게 지어졌을 테니 최소 구백 년의 역사는 지녔다는 것이지요.”

“구백 년이라.”

이진한은 베르하임 국왕의 이야기를 들으며 수북하게 쌓인 양피지 더미를 뒤적거렸다. 모두 최상급 보존 마법이 걸린 것으로 실수로는 파괴하기 어려워 보였다.

더욱이 검은 현자가 사용했다는 식기, 그리고 자질구레한 물품들, 그리고 남겨진 기록 등등까지.

그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왜인지 모를 익숙함이 등골을 훑고 느껴….

“…당연히 그런 건 없네.”

느껴지지는 않았다.

전부 다 처음 본 것들이었고, 생소하기 짝이 없다. 자신이 사용했다는 식기는 또 무엇인가.

직접 쓴 자서전이라는 것까지 남아있었지만, 애초에 이 세계의 문자를 쓸 수 있게 된 것도 대현자의 효과로 인해 얼마 되지 않았다.

“음.”

다른 이들이 관광이라도 온 것 같은 분위기로 보관소 안을 돌아다녔을 때, 이진한은 그 기록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고 꼼꼼히 확인했다.

애초에 베르하임 왕국에 온 것은 자신의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정말 자신 혼자 이 세계로 넘어온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다른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기록소에 보관된 주된 내용은 건국 당시 검은 현자가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었는지였다. 그 대목에서 이진한은 의미심장한 내용 몇 가지를 찾을 수 있었다.

「검은 현자께선 《지혜》의 상징이셨던 만큼 대륙에 존재하지 않던 온갖 기술들을 전수해주셨다. 본왕은 그것을 기반으로 도시를 발전시켜나갔고….」

대륙에 존재하지 않던 온갖 기술, 바꿔 말하자면 지구의 것일 수도 있단 이야기였다.

‘뭔가 있기는 확실히 있는 것 같은데.’

이 기록들을 토대로 몇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이곳의 검은 현자와 자신이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이진한’이라는 플레이어가 검은 현자로 활약한 것은 ‘월드’의 게임 안.

이 세계는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월드’와 상당 부분 설정과 역사를 공유했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설정을 공유하는 인물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터.

두 번째는….

‘내 기억이 지워졌다.’

근거는 있었다.

근원의 마탑에서 깨어났을 당시 얼마 있지 않아 시간의 풍파라는 이름의 제약이 이쪽의 몸을 갉아 먹기 시작했다.

단순히 캐릭터로 빙의해온 것이라면 그런 부류의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

이마저도 가정의 이야기였지만, 애초에 훨씬 더 이전부터 자신은 그곳에 존재했고 봉인된 상태로 잠들어 있다가 엘레오노라의 부름으로 깨어나 정지되어 있던 시간의 흐름을 한 번에 받게 되었다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다.

물론 두 가설 다 말 그대로 가설일 뿐 섣불리 하나를 확신하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무슨 생각하시는 중이세요? 옛날 일이라 그러워지신 거예요?”

“…그냥.”

슬쩍 곁으로 다가와 묻는 엘레오노라의 물음에 이진한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검은 현자인 것까지는 말했다만, 자세한 사정까지 털어놓을 관계는 아니지 않은가.

하물며 이걸 설명해야 하려면 이쪽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이야기까지 해야 했으니 골치 아프기 짝이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 왔는데 더 복잡해지기만 하네.”

그저 쓴웃음을 내쉬며 한숨을 흘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대변할 뿐이었다.

***

보관소는 제법 큰 규모였다.

전부 돌아보는 데까지 꽤 걸렸고, 마침내 마지막 제일 깊은 구역에 당도했다.

따로 구역이 구분되어 있으면서 내부는 횡하기 그지없다. 그저 벽 끝으로 검은 색의 아치형 문만 덩그러니 달려 있을 뿐이었다.

“여긴 별게 없네?”

“아, 이건 열리지 않는 문입니다.”

이진한이 그 앞에 서서 의문을 보내자, 베르하임 국왕은 뺨을 긁으며 말을 이었다.

“공식적인 기록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저 대대로 누구도 열지 못했기에 열리지 않는 문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듣기로는 검은 현자 본인께서 직접 이곳에 세우신 것이라 했습니다.”

“음.”

베르하임 국왕은 직접 아치형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기며 그 문이 열리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뒤이어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조심스럽게 그것을 당겼지만, 마찬가지로 문은 꿈쩍도 하지 않을 따름이었다.

“전전대 선왕께서 이 뒤에 무엇이 있는지 조사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지형적으로는 완벽하게 막혀 있고, 단지 문만 덩그러니 있는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습지요.”

“이 문을 직접 설치했다.”

물론 이진한에겐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 때문에 가볍게 문고리를 잡고 돌리자.

철컥.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손잡이가 돌아갔다.

“…어.”

90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처음 일어난 일에 베르하임 국왕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잠시간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홀로 무언가를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계승자님은 달라도 무언가 다르군요.”

“연다.”

혹시나 모를 상황에 이진한은 감각을 곤두세우며 천천히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뒤쪽에 있는 이들조차 긴장한 기색으로 문 너머를 바라보았고, 이내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시커멓네요?”

“어둠, 인가요?”

“음.”

검게 칠해진 것이 아니었다.

칠흑과 같은 공간이 그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의문을 표할 때, 이진한은 시야 한쪽에 떠오른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히든 스테이지 「도원경(桃源境)」에 입장하시겠습니까?]

도원경?

뜻 자체는 알지만, ‘월드’ 내에서는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이진한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치문 너머로 펼쳐진 어둠 사이로 팔이 쑥 빨려 들어갔고, 동시에 그 검은 물결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너희들도 와서 손 넣어봐.”

“으, 살짝 징그러운데요.”

엘레오노라는 싫은 기색을 띠면서도 천천히 손을 뻗었다.

미르엘 역시 담담한 기색으로 제 주인과 같이했지만, 그녀들의 손은 벽을 만지는 듯 가로막히고 말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둠 너머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베르하임 국왕 역시 마찬가지인바.

그것을 본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조건부 입장이 가능하다?’

자신과 이들이 다른 것.

초월지경을 이뤘다는 것 이외에 또 있을까?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발을 내디디고 싶었지만, 이때까지의 전적이 있었으니 섣불리 들어가는 것이 저어되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일단은 보류다.”

이진한은 망설임 없이 아치문을 닫았다.

저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 생각 없이 발걸음을 내디디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대현자의 눈으로도 읽히지 않는다. 평범한 것은 아니라는 소리인데.’

이진한은 슬쩍 위를 바라보았다.

“일레이나라면 알려나?”

학계의 저명한 마도사인 애머시스트의 자문이 필요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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