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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10화 (110/210)

◈ 110.

“저 사람. 은근히 관심받기 좋아하네요.”

“은근히가 아닌 것 같은데.”

일레이나는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터널 학파의 애머시스트라는 명성은 이곳에서도 통하는 것인지 왕국의 명사로 보이는 이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었다.

잠시간 그 올블랙 차림의 고혹적인 모습을 감상하던 이진한은 문득 깨달았다는 듯 일행을 둘러보았다.

“너희는 안 돌아다녀도 돼? 말 걸어오는 사람 많을 텐데.”

황녀 엘레오노라와 수호 기사 미르엘이 아닌, 검은 현자의 계승자와 동행하는 동료로서 이름을 알릴 좋은 기회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녀들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여기서 몇 발자국만 떨어지면 금세 둘러싸일걸요? 아까도 잠깐 밖의 구경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십수 명이 쫓아와서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긴.”

둘의 푸념을 들은 이진한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동료인 것을 제외하고도 그녀들의 외모는 이곳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것이었다. 시선을 끌어모으는 것은 당연한 일로, 지금 역시 그녀들을 흘깃흘깃 바라보는 시선이 적지 않았다.

“연회는 어떠십니까.”

그러던 차 연회 준비를 위해 자리를 비웠던 제너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역시 베르하임 왕국의 왕세자로서 한껏 치장한 모습으로, 이전 페르포치아에서 보았던 거친 용병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덕분에 잘 즐기고 있다.”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국왕의 호출인가?”

무언가 용무가 있는 듯한 그 모습에 이진한이 묻자 제너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별실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어떻게 할래.”

“따라갈게요. 베르너 님이 사라지면 다들 몰려올 테니.”

“동행하겠습니다.”

일레이나는 여전히 이야기 중이다. 잠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진한은 제너드를 바라보았다.

“가지.”

“바로 모시겠습니다.”

안내된 별실은 연회장과는 살짝 거리가 있는 장소였다. 왕궁의 심처라 할 수 있는 곳으로 결계가 쳐져 있는 것인지 발을 내디디자 연회장으로부터 들려오던 왁자지껄한 소음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앞쪽으로 가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같이 가진 않나?”

“저는 왕세자로서 연회가 끝날 때까지 그곳을 관리해야 하는 지라.”

제너드도 이곳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갈지 심히 궁금한 눈치였으나, 아쉽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떨궜다.

그의 팔을 툭 쳐준 이진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일레이나가 찾으면 이쪽으로 갔다고 말해줘.”

“알겠습니다.”

제너드가 떠난 뒤 그들은 별실 안쪽으로 향했다. 길목마다 묵직한 기세를 지닌 기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진한 일행이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기사들은 모두 정중한 모습으로 예의를 표해왔다.

“…베르하임 왕국에서 검은 현자가 갖는 의미가 남다르다는 말이 진짜였네요.”

“왕실 기사들도 거의 국왕에게 보이는 것과 동급의 예를 표하고 있습니다. 이건 놀라운 모습이군요.”

그렇게 얼마쯤 걸어갔을까, 주변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지닌 구역이 나타났다. 입구를 지키던 기사가 정중히 입구를 열자 익숙한 얼굴이 그 안에서 기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으하하, 어서 오십시오. 계승자님.”

베르하임 국왕이 손수 그들을 인도하며 내부로 들였다.

“별실이라고 해서 가볍게 이야기만 나눌 공간인 줄 알았는데.”

이진한은 안으로 발을 들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테리어는 평범했지만, 시설 면에서 예사롭지 않다. 어지간한 마법으로는 간파할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철저한 보안 처리가 되어있던바.

별실이라고 부르기에는 그리 가볍지 않은 공간이었다.

“세상에는 듣는 귀가 많아서 말입니다.”

“뭐, 나쁘지는 않군.”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베르하임 국왕은 씩 웃었다.

이전의 싸움에서는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었으나, 이진한이 계승자임을 증명하자 태도가 완벽하게 달라졌다.

구태여 높임말까지 사용하며 윗사람을 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일국의 왕으로서 위엄이 상할 수 있기에 그러지 말라고 했으나, 국왕은 꿋꿋하게 그것을 고수하려는 듯했다.

“연회는 좀 어떠셨습니까.”

“덕분에 재미 좀 있었지.”

“다른 이들이 귀찮게 굴지 않았나 걱정입니다. 가급 적이면 실례되는 행동을 삼가라고 했는데, 공식적으로 계승자가 등장한 것은 처음인지라.”

이진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베르하임 국왕을 꺾은 것만이 아니라 검은 현자를 상징하는 증표 몇 가지를 보여주었다.

덕분에 계승자라는 이야기는 공신력을 얻었고, 베르하임 국왕 역시 왕국 전역에 공식적으로 ‘베르너’라는 인물이 검은 현자의 계승자임을 공표했다.

“그런데 저는 막상 계승자님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말입니다.”

“그렇군.”

데르메오 베르하임은 어릴 적부터 귀에 박히도록 검은 현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왔다.

《지혜》의 검은 현자.

세상을 멸망시키려던 악신을 쓰러뜨린 고대 영웅 중 한 명으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 있어 현자라 불린 존재.

악신을 쓰러뜨린 후에는 초대 국왕을 도와 베르하임 왕국을 건국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때문에 검은 현자라는 이름은 이 왕국에서 신이나 마찬가지였고, 그 유산은 천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곳곳에 남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베르하임 왕국이 다른 지역보다 한층 더 기술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점에서 기인했다.

“궁금합니다. 계승자께서는 어떤 분이신지.”

하지만 데르메오 베르하임이 알고 있는 것은 말 그대로 그의 행적에 관한 것.

심지어 그것도 중간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거의 세뇌된 것 같은데.’

자신을 바라보는 그 이글거리는 시선에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잠자코 있는 상태. 그녀들과는 베르하임 국왕에게 이쪽의 정체를 밝혀 협력을 구하자고 했지만, 지금 모습을 보니 굳이 그럴 이유까진 없을 것 같았다.

“알고 있는 정보와 같다. 세간에 처음 나온 것은 오스칼 제국에 있는 근원의 마탑에서였지.”

이진한은 자신이 검은 현자임을 드러내지 않은 채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 함축된 내용으로, 이너털 학파의 마탑에서 탑주인 호베르투에게 했던 것과 같은 양상이었다.

“…어느 것 하나 흘려들을 수 있는 요소가 없지만, 굳이 꼽자면 두 가지가 있겠군요.”

오스칼 제국 황실의 오염과 마족 세력의 성행.

굳이 따지자면 그 두 개는 같은 맥락으로 이어져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이거 인사부터 다시 드려야겠소. 설마 엘레오노라 황녀와 그 수호 기사가 계승자님의 동료였다니.”

오스칼 제국의 황녀라는 신분은 일국의 국왕인 그라 할지라도 가벼이 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닌바.

더불어 계승자의 동료라는 점에서도 존중받기에 충분했다.

“…지금은 황녀가 아닌 엘레오노라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음, 실언이었군. 부디 용서해주길 바라오.”

베르하임 국왕은 곧 세간에 퍼진 그녀들에 대한 소문이 어떤지를 깨닫고는 곧바로 말을 철회했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감사를 표한 그는 다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본 왕국을 찾은 이유는 역시….”

“검은 현자에 관한 기록을 보고 싶다.”

“단순히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남기신 유산을 비롯해 다른 고대 영웅분들의 기록까지 상당량 보존되어 있습니다.”

베르하임 국왕은 큰 자부심을 보이며 제 가슴을 두드렸다.

“…세간의 소문이 사실이었군.”

“옛적부터 심심치 않게 흘러나갔으니요. 간혹 유산을 탐한 정신 나간 종자들이 습격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더없는 호재에 이진한은 화색을 띄웠다.

솔직히 검은 현자의 유산에 대해서는 그리 큰 기대가 가지 않았다. 자신은 그런 적이 없으니 어차피 가짜일 가능성이 클 터.

하지만 기록 쪽은 설사 거짓이 섞여 있다 할지라도 얻는 것이 있을 테니 반드시 확인해봐야 할 요소였다.

“피곤하실 터이니 내일….”

“아니, 지금 당장 부탁하지.”

지체할 이유가 없다. 강한 의지를 드러내자 베르하임 국왕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준비하도록 하지요.”

***

검은 현자를 비롯한 고대 영웅의 기록과 유산이 보관된 곳은 왕궁의 지하였다. 직전 그들이 이야기를 나눈 별실보다 더 엄중한 보안이 그곳을 통제하고 있었고, 위쪽보다 더 뛰어난 기사들이 배치되었다.

“이곳에 출입이 허락된 것은 당대 국왕뿐입니다. 왕세자 역시 아직 들어오지 못했지요.”

“외부인은 내가 처음인가?”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그럴 겁니다.”

“저희가 동행해도 괜찮나요?”

엘레오노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 역시 고대 영웅을 동경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바. 하지만 왕국이 엄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것이라면 엄청난 값어치를 지닌 유산일 터.

이진한이야 계승자이니 상관없지만, 단순히 동료라는 것으로 함께 해도 괜찮은 것인가.

“걱정하지 마시오. 왕이 허락하겠다는데 누가 거부하겠소.”

“배려에 감사드려요.”

“일레이나가 분통을 터트리겠군요. 그녀도 이쪽에 관심이 많을 텐데.”

미르엘이 작게 웃음을 토해냈다.

일레이나는 아직 연회를 즐기고 있는지 아직 이쪽으로 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에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자기 운명이지. 두고 봐라, 나중에 분명 투덜댈걸?”

“운이 나쁘네요.”

그렇게 도란도란 떠들며 얼마쯤 갔을까 커다란 대문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지나온 길목과는 달리 그곳을 지키고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는바.

베르하임 국왕은 손가락 끝에 상처를 내곤 그 위에 피를 묻혔다.

“혈계 전승으로 이어지는 술법입니다.”

“흠.”

엘레오노라의 목걸이와 비슷한 계열의 술식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은 그 위에 묻은 피를 천천히 흡수하더니 이내 듣기 싫은 소음을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무슨 사원 같군. 그래도 예전의 그 유적지보단 훨씬 그럴듯한 모습이야.”

문틈 사이 안쪽으로 보이는 풍경에 이진한은 짤막한 감상을 입에 담았다.

“페르포치아 왕국에 있는 검은 현자의 유적지 말입니까. 저도 그곳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학술적으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곤 하지만, 살풍경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어서 실망을 많이 했었지요.”

“…아, 거긴 고생 좀 했었죠.”

미르엘은 그때 일을 기억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고생 좀 했다? 거기에 무언가 있었소?”

베르하임 국왕이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까 그의 이야기 중에 검은 현자의 유적지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엘레오노라는 그것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마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어서 말씀하지 않으신 걸 거예요.”

“그곳에 베히모스라 불리는 고대 마수가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베르너 님과 함께 퇴치했지요.”

“…베히모스?”

곧 이어진 이야기들에 베르하임 국왕은 입을 떡 벌렸다. 그야말로 영웅 서사 중에 한 부분이지 않은가.

‘내가 국왕만 아니었더라면.’

계승자의 동료로 함께 다닐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조금 이른 왕위 승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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