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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09화 (109/210)

◈ 109.

“…당신.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리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죠.”

일레이나가 날 선 눈빛으로 옆에 있던 제너드를 바라보았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 역시 마찬가지인 표정.

제너드는 살짝 움찔했지만, 자기가 뭘 할 수 있겠냐며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그리 타박하지 마십시오. 저 역시 그때 상황을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봤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왕께 상세히 설명했지만, 저리 강경하시니 어쩔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이게 가장 간편하고 합리적인 방법이라며 말해왔다.

“설사 제국에 실례더라 해도?”

“부왕께, 이 왕국에게 검은 현자가 갖는 의미가 바로 그러합니다.”

전부 다 감수하겠다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의라고는 반푼어치도 없는 그 모습에 일레이나는 기가 찼지만, 이미 벌어진 상황을 어찌할 수 없기에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싸움은 절정에 이르렀고, 그들은 두 손에 땀을 쥔 채 베르하임 국왕과 이진한의 경합을 바라보았다.

쿵.

창을 놓은 베르하임 국왕이 두 손으로 검을 다잡고 밑에서부터 쇄도하는 이진한에게 검을 그어 내렸다.

단순한 충돌일 뿐이었지만, 그 충격파만으로 대지에 균열이 일며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 한다. 힘과 힘의 첨예한 대립.

보통 그렇게 된다면 한쪽은 부러지기 마련이었으나, 둘은 한 치의 밀림 없이 서로 균형을 이루며 대립했다.

“무술은 흠잡을 것 없군. 마법이 주력이라고 들었는데 그쪽은 어떨까.”

화아악!

베르하임 국왕의 등 뒤로 시뻘건 불꽃이 피어올랐다.

마치 그에게 달린 꼬리처럼 꿈틀거리며 이진한에게 닥쳐왔고, 스치기라도 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마법의 경지로만 따지자면 수준급인가.’

일레이나와 비교할 수 없는 경지였지만, 그 강함이 깊이와는 직결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과 같이 실전적인 부분에 치우쳐져 있는 것으로, 위력을 극대화시킨 부류 같았다.

꼬리는 곧 불의 뱀이 되었다. 신화 속에 나오는 히드라처럼 여러 개로 갈라져 혀를 날름거리며 그를 집어삼킬 듯 입을 쩍 벌렸다.

대현자의 눈이 순식간에 그 술식과 구조를 파악한다. 나름대로 회심의 공격인 듯 높은 클래스의 마법이었지만, 그것을 무력화시킬 방법은 차고 넘쳤다.

대마도사와 마도사는 단 한 글자 차이였다.

하지만 그 격은 서로의 이름을 동일선상에 올려놓는 것이 애초에 성립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격차인바.

마음만 먹는다면 이미 발동한 마법조차 가볍게 흩어버릴 수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같은 불 속성 마법으로 우위를 보일 수도 있었으나, 이진한은 제법 흥이 올라 그 퍼포먼스에 응해주었다.

쿵.

그가 발을 내려찍자 땅밑으로 술식이 새겨지며 마법이 발동했다. 바닥에 생겨난 균열 사이로 물줄기가 솟구쳐 올랐고, 결계를 유지하며 싸움을 지켜보던 마도사 중 누군가 감탄을 흘렸다.

“물이 없는 이 땅에서 이만한 규모의 마법을 만들어내다니.”

촤아악-!

거세게 솟구친 파도와 불꽃의 줄기가 서로 부닥쳐 대립을 이룬다. 곧 뜨거운 열에 물이 기화되며 뿜어진 증기가 주변을 가득 채웠고, 연무장은 새하얀색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흠.”

베르하임 국왕은 찰박거리는 땅을 박차며 뒤로 물러났다. 무투로는 서로 균형을 이루었지만, 마법에서는 확실하게 뒤떨어졌다. 그렇기에 그는 호흡을 가다듬는 것으로 태세를 정비했고, 시야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 재차 공세를 이어나갔다.

쐐애액-!

자욱히 피어오른 증기 사이 몇 개의 암기가 날카롭게 허공을 꿰뚫었다.

이진한은 즉각 반응해 그것을 쳐내려 했으나, 용아청성창에 닿기 직전 암기가 먼저 폭발했다.

콰아앙-!

수백 수천 개의 조각이 마치 소나기처럼 거세게 떨어져 내린다.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스치면 치명상일 입을 터인 거센 공격.

증기가 찢겨나가며 거세게 바닥 위를 두드렸지만, 이진한은 오히려 용아청성창을 놓으며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오히려 좋아.’

새로 익힌 검술을 시험할 기회였다.

곧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매끄러운 곡선을 자랑하는 신도(神刀) 무라마사였다. 이제 손안에 착 감기게 될 정도로 익숙해진 그것은 새로운 주인의 의지에 따라 날을 세우며 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검성류 오의 아라크네(Arachne)

대현자의 눈이 방위를 나눈다. 거미줄처럼 잘게 쪼개어진 선들이 교차하고 궤적을 이뤄냈을 때 무라마사가 푸른 빛을 흘리며 그 위를 베어 갈랐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무수한 선이 모여 면을 이룰 정도로 농밀한 기운의 응집이 허공에 펼쳐진다. 무협지에서 흔히 말하는 검막의 발발이었다.

투타다다!

소낙비가 그 위로 떨어져 내린다. 하지만 어느 하나 짙게 깔린 푸른 장벽을 넘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

신기에 가까운 기예.

베르하임 국왕이 놀란 표정으로 두 눈을 크게 뜰 찰나, 이진한은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뻗었다.

“성대하게 받았으니 보답해야겠지.”

어느새 나타난 장궁의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두 대의 그 위에 걸렸다.

팽-!

한 줄기 바람 소리와 함께 잔뜩 머금은 힘이 폭발적으로 쏘아진다.

베르하임 국왕은 그것을 경시하지 않고 농밀한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어냈으나, 두 대의 화살은 검과 닿기 직전 그가 쏘아 보냈던 암기와 같이 터지며 방향을 가리지 않고 뿜어졌다.

“음.”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다. 그래도 마도사란 것은 허울이 아닌지 순식간에 두터운 배리어를 만들어내 쏟아지는 파편들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 전부를 감당해내기에는 배리어만으로 부족했을 따름이었다.

저저적─.

유리에 금이 가듯 배리어 위로 자글자글한 균열이 퍼진다. 그것이 부서지기 직전 베르하임 국왕은 두 팔을 교차하며 온몸에 오러를 둘렀다.

콰아아아앙-!

배리어를 찢고 떨어져 내리는 파편들에 그 주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지켜보고 있던 이들 역시 그 광경에 가슴이 철렁했는지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후우.”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베르하임 국왕은 두 팔을 내리며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한 방 먹었군. 그러면 이제 제대로 해볼까.”

두 팔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본격적인 싸움을 알려온다. 하지만 이진한은 짧게 고개를 저으며 손을 들었다.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해.”

“충분하다? 아직 누구도 서로에게 승복하지 않았거늘?”

“네 수준을 파악하는 건 이 정도면 되었다.”

대현자의 눈이 뜨였다. 동시에 억눌려 있던 그의 기세가 해방되었고 주체할 수 없는 마력의 폭풍이 장내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허억!”

연무장에 둘러진 결계가 출렁거렸다. 그 압도적인 격에서 오는 여파에 마법사들은 실신했으며, 남은 마도사들 역시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손끝을 떨었다.

캉.

장궁을 놓고 집어 든 용아청성창의 끝이 바닥을 때리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와 동시에 손가락 까닥할 수 없을 만큼의 압박감이 주위를 짓눌렀다.

모두가 질식할 것만 같은 얼굴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때, 이진한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베르하임 국왕이 아직 전력을 내보이지 않은 것은 짐작하고 있다. 자신이 악마화나 광폭화 같은 비기를 지닌 것처럼 그 역시 나름대로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것이어도 상관없다. 그것들 모두 합쳐도 닿지 못할 압도적인 격차로 찍어 누르면 그만일 뿐이었다.

대마도사 클래스 초월 스킬 「진홍의 보옥」

압도적인 밀도를 지닌 힘이 하늘 위에 떠 올랐다.

흡사 작은 태양을 보는 듯한 광경에 다들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것을 바라볼 뿐.

겨우 결계를 유지하던 마도사들 역시 털썩 주저앉아 인지를 벗어난 현상에 서서히 입을 벌렸다.

“…과연.”

데르메오 베르하임은 더없이 눈부신 것을 바라본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직전까지 경합을 벌였을 때는 제법 괜찮은 대결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지만, 정작 상대를 시험한 것은 저쪽이었다. 닿을 수 없는 격차.

그것을 목도한 베르하임 국왕이 내릴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철컥.

그는 검을 거두어 검집에 수납한 채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정중한 자세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한 나라의 왕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표한바.

이진한이 가볍게 손을 휘둘러 진홍의 보옥을 없앴을 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베르하임의 국왕 데르메오 베르하임이 검은 현자의 계승자를 뵙습니다.”

그 모습은 더없이 경건할 따름이었다.

***

베르하임 국왕은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그 때문에 연회 같은 행사도 국가적인 일이 아니라면 개최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오늘 왕성 연회장에는 그의 취임 이후 유례없을 정도의 커다란 연회가 열린바.

왕도 내에 있던 모든 고위 귀족이 참여했고, 그 면면이 연회장을 밝혔다.

“검은 현자의 계승자께서 본 왕국을 찾아주신 의미 깊은 날이다! 모두 오늘을 기념하여라!”

베르하임 국왕은 아예 기념일까지 만들 정도의 기세.

이진한으로선 흡족할 만한 대접이었다.

왕국의 굵직한 귀족들이 정중히 예의를 표했고, 차려진 음식도 거를 것이 없었으며, 내로라 하는 미모를 지닌 영애들 또한 한 번씩 눈도장을 찍고 가며 설레는 모습을 보였다.

“저와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으시면 연회 뒤에 찾아와 주세요.”

심지어 어디 자작 가문의 영애는 짙은 눈웃음을 지으며 유혹하는 모양새까지 보이지 않았는가.

이진한의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새어 나오자, 그 옆에 있던 엘레오노라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좋으신가 봐요?”

“이런 대접은 처음이잖아?”

변명처럼 내뱉어진 말이었지만,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때까지는 엘레오노라의 일로 도망 다니느라 변변찮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후에 반응이 바뀐 것도 이쪽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었기 때문.

그러니 지금 상황이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크흠.

그러던차 반대쪽에 있던 미르엘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이진한의 시선을 끌었다.

“엘레오노라 님의 말씀은 자신을 두고도 다른 여자한테 돌릴 눈이 있으시냐는 겁니다.”

“그런 거였어?”

“….”

정곡을 찌르는 미르엘의 말에 엘레오노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잘 손질된 불은 머리카락의 끝을 배배 꼬며 작게 중얼거렸다.

“…모처럼 제대로 꾸몄는데 아무 말씀도 없으셨잖아요.”

엘레오노라는 살짝 톤이 낮은 칙칙한 붉은 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어지간하면 소화하기 힘든 색이었지만, 옷이 어둡기 때문인지 그녀의 찬란한 붉은 머리카락과 뚜렷한 미모를 강조하기에 좋은 모양새였다.

“맞습니다. 칭찬은 신사의 소양이니까요.”

미르엘도 그리 말하며 제자리에서 가볍게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그녀 역시 평소 갑옷이나 실용성을 중시한 복장과는 반대로 푸른 파스텔 톤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바. 새하얀 피부가 돋보여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둘 다 잘 어울려.”

“형식적인 말씀이시네요.”

“미사여구가 너무 단조롭습니다.”

익숙지 않은 상황이라 어렵사리 칭찬을 내뱉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새초롬한 비난뿐이었기에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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