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하루 뒤, 채비를 끝낸 그들은 마탑을 나섰다.
헨더슨은 칼리파를 통해 3황자가 은밀히 만나고 싶어 한다며 의중을 전해왔지만, 이진한은 일정이 있다며 단호히 거절하는 것으로 후일을 기약했다.
“다음에 돌아오시면 봬요!”
“그래. 그때까지 연구 열심히 하고 있어야 한다.”
탑주는 손수 검은 현자를 배웅하고자 마탑의 입구까지 나오려 했지만, 이진한이 질색하며 거부했기에 캐서린만이 떠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참고로 칼리파는 밤 동안 이진한이 요구한 물품들을 사 오느라 뻗어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도시를 돌아다녔을 그 모습을 상상한 일레이나가 크게 웃음을 터트린 것은 덤이었다.
“그럼, 가볼까.”
헨더슨의 보증을 받은 신분증으로 인해 이제 외모를 감추거나 행색을 숨길 이유가 없어졌다.
그렇기에 이전에 쓰던 신분증을 찢어버린 그들은 당당히 제국 텔레포트 게이트에 입성했고, 그대로 베르하임 왕국으로 향했다.
“이놈의 텔레포트 게이트는 몇 번을 타도 익숙해지지 않네.”
“그러니까요.”
이진한의 말에 일레이나 역시 공감한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텔레포트 게이트의 디자인이 특이하네요.”
“못 보던 양식입니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의 신경은 전이 이후 나타난 텔레포트 게이트로 쏠려 있었다.
“오, 그러네.”
주위를 둘러본 이진한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을 토해냈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각 지방, 국가의 발전과 부유의 상징이었다. 그 때문에 해당 지역의 문화와 양식에 따라 치장되기 마련이었지만, 베르하임의 텔레포트 게이트는 다른 곳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어디 백화점 입구라고 해도 믿겠는걸.’
검고 흰 타일과 깔끔한 패턴이 벽면을 장식한다. 그것은 중세 유럽풍의 디자인이 아닌 현대의 모더니즘 한 모습이었다.
텔레포트 게이트의 밖으로 보이는 도시 전경도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인 골조는 중세 유럽풍이긴 했지만, 그 위에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형태의 디자인이 깃들어 있어 제법 친숙한 풍경을 자아냈다.
“저쪽에서 마중 나온다고 하지 않았나요?”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했으니 연락이 갔을 겁니다. 분명 기다리고 있을, 아.”
엘레오노라의 말에 대답하던 미르엘의 두 눈이 커졌다. 텔레포트 게이트의 앞으로 서성이고 있던 남자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제너드.
페르포치아 왕국에서 바포메트가 잠들어 있는 던전에서 만난 용병이었다.
잿빛 머리카락에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는 여전했지만, 복장은 그때와 상당히 달랐다. 수염과 머리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의복도 고급스럽기 짝이 없다.
그는 예전에 보였던 거친 분위기와 달리 정중한 모습으로 허리를 숙여왔다.
“오랜만이네. 아니, 오랜만입니다.”
“베르하임 왕국 소속이었나?”
설마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그가 두 눈을 가늘게 뜨자 제너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소개하도록 하지요. 베르하임 왕국의 왕세자인 제너드 베르하임이라 합니다.”
“예전이랑은 분위기가 너무 다르군.”
“그때는 왕세자 제너드가 아닌 용병 제너드였으니 말입니다.”
이진한은 피식 웃었다.
가끔 이런 식으로 써먹는 복선 장치가 있긴 했지만, 설마 제너드가 이쪽 왕국의 왕세자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저쪽에서 오는 게 난 줄 알고 있었겠군.”
“모를 수가 없지요. 부왕께서도 그걸 아시고 절 보내셨습니다.”
제너드는 저 앞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눈짓했다. 말이 아니라 마나를 동력 삼아 움직이는 것으로, 형태만 조금 바꾸자면 자동차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범상치 않은 실력자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검은 현자의 계승자셨다니. 그런 면에서 본국을 찾아주신 것은 크나큰 영광일 따름입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 제너드가 옅은 미소와 함께 말해왔다.
이진한은 그런 그를 흘깃 바라보고는 때마침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베르하임 왕국에는 검은 현자의 기록이 남아 있나? 세간에 공표되지 않은 그러한 부류의.”
“음.”
제너드는 짤막한 침음성을 흘렸다.
섣불리 말하기 곤란한 듯 잠시 고민에 잠기더니, 이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있습니다. 검은 현자뿐만 아니라 다른 고대 영웅분들의 기록도 남아 있지요. 물론 그것들 모두 세간에 공표되지 않은 것입니다.”
“계승자라면 그것을 볼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다만….”
“이쪽에도 확인이 필요합니다. 베르너 님이 정말로 검은 현자의 계승자라는 것의.”
난감하단 표정으로 말해오는 제너드의 말에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일레이나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거, 실례되는 말인 거 알고 있죠? 《영원》의 계보를 잇는 이터널 학파의 학파장이자 마탑의 탑주이신 호베르투 대마도사께서도 인정하신 일이에요. 제국 역시 그 보증을 함께했고요.”
“그 점은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다만, 본국에 검은 현자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니 말이지요.”
“그건….”
“됐어.”
일레이나가 쌍심지를 켜며 쏘아붙이려 하자 이진한은 가볍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
조금 생각해봐도 쉽사리 믿기 힘든 일이다. 시험할 수단이 있다면 응해주면 그만.
내친김에 이쪽 왕한테 자신이 검은 현자 본인임을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뭐, 시험이라 치고 설마 다짜고짜 싸움이라도 걸어오겠어?’
마차는 곧 왕궁에 진입했다.
성문은 누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열렸고, 마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그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창밖을 바라보던 이진한의 눈에 감탄이 서렸다. 베르하임 왕궁의 모습은 현대 건축물을 보는 듯한 친숙한 디자인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곳곳을 걸어 다니며 순찰하는 기사나 병사 모두 마법 무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제국 군단과 비빌 수 있을 거라는 일레이나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던 듯해 보였다.
“도착했습니다.”
“…예상보다 성대한 환영이군.”
“무려 검은 현자의 계승자이니 말입니다.”
대전으로 향하는 길.
왕실 기사단으로 보이는 이들이 양옆으로 도열해 있었다. 귀족이나 왕족으로 보이는 이들이 궁 안쪽의 가장자리에서 이쪽을 바라보았고, 쭉 뻗어 나간 길 끝에는 신하들을 대동한 베르하임 왕국의 국왕이 자리했다.
‘…결계?’
넓게 펼쳐진 이 공간을 중심으로 강력한 결계가 펼쳐져 있다.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 경계심에 이진한이 일행에게 눈짓하자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차할 경우를 대비했다.
왕실 기사나 병사들이 아무리 좋은 장비를 맞춰 입었다고 할지라도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단순 스펙만으로도 동레벨은 압도적으로 찍어누를 수 있었고, 얼마 위의 상위 레벨까지도 자웅을 겨룰 수 있을 만큼의 수치였다.
“가시지요.”
먼저 마차에서 내린 제너드가 밖에서 이진한을 에스코트했다.
그는 가볍게 왕성에 내려섰고, 양옆으로 기사들이 도열한 길을 천천히 걸어가 국왕과 얼마간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Lv.954 「데르메오 베르하임」
검은 현자를 숭상하는 블랙 워커의 정점.
‘과연.’
정점이라고 칭할 만한 실력자였다.
검으로는 소드 마스터에 이르렀고, 마법으로는 마도사에 도달했다. 그 외 다른 클래스 역시 수준급의 경지로, 어떻게 본다면 자신의 하위 호환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환영하오. 검은 현자의 계승자라 불리는 이여.”
고요한 침묵 가운데 베르하임 국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몸이 근육질로 가득한 생김새대로 굵직한 목소리였다. 머리카락 역시 아들인 제너드와 달리 짙은 흑발인 것이 제법 인상적인 모습.
그 시선을 눈치챈 제너드가 슬쩍 옆으로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머리는 염색하신 겁니다.”
“…하하.”
얼마나 자신을 좋아하는 것인가.
절로 다 쓴웃음이 나오는 이진한이었다.
“베르너라 합니다. 이리 환대해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사뭇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전했다.
일국을 다스리는 왕이나 그에 준하는 위치에 있는 이들에겐 가급 적 예의를 차리는 것이 우호를 다지기에 좋았다.
“마경의 블랙 드래곤, 페르포치아의 리치킹, 그리고 고대 악마. 마르딘의 검호, 북쪽 숲의 악마까지.”
하지만 뒤이어 나온 말에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일까지 언급하는 것을 보니 이쪽의 행적을 세세히 조사한 듯싶었다.
“과연 검은 현자의 계승자라 칭할 만하다! 허나!”
베르하임 국왕은 서늘한 안광을 뿜어내며 이진한에게 시선을 보냈다.
쿵!
그의 몸을 뒤덮고 있던 상의가 갈가리 찢어져 나부낀다. 상처투성이면서도 흠잡을 곳 없는 근육이 밖으로 튀어나왔고, 그와 동시에 베르하임 국왕은 어디서 꺼내 들었는지 모를 창과 검을 쥐며 흉흉한 기세를 피워올렸다.
“예로부터 《지혜》의 검은 현자는 베르하임 왕국과 깊은 관계를 지내온바! 그 계승자임을 인정받고 싶다면 나를 꺾어야 할 것이다!”
“….”
설마 했지만, 다짜고짜 이런 말을 내뱉어오는 것인가.
이진한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국왕을 바라보다가 주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도열하고 있던 기사들은 이미 예상하였다는 듯 자연스러운 태도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왕성에서 지켜보던 귀족과 왕족의 태도는 더없이 자연스러운 것이, 어딘가 체념마저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원래 이런 놈이라는 건가.’
이곳까지 온 이상 피할 길은 없어 보였다.
더군다나 제너드의 말로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고대 영웅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만으로도 이 자리를 피하지 않을 이유는 차고 넘쳤다.
“물러나 있어.”
이진한이 눈짓하자 일행은 기사들과 같이 훌쩍 뒤로 물러나 결계 범위 밖으로 빠져나갔다.
‘뭐, 헨더슨보단 좋은 상대가 될 것 같네.’
가볍게 고개를 꺾은 이진한은 무시무시한 기백을 뿜어내는 베르하임 국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걸려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 주의라서. 왕이라고 봐주는 것은 없다.”
“바라던 바다. 물러나지 않는 싸움이야말로 계승자를 구분하기에 더없이 확실한 것이니.”
왼손엔 창이, 오른손엔 검이 쥐어졌다.
베르하임 국왕은 더없이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고는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노라고 알리듯 다시 한번 제 기세를 거세게 피워올렸다.
쿵.
내디딘 발을 중심으로 바닥이 움푹 파인다. 그가 내뿜는 기세를 이기지 못해 지반이 가라앉은 것이었다.
“주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왕실 마도사들이 사력을 다해 결계를 펼칠 것이니.”
콰아앙-!
우레와 같은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베르하임 국왕의 그 육중한 몸이 마치 포탄처럼 쏘아지며 이쪽을 덮쳐왔다.
척.
용아청성창을 쥔 이진한은 몸을 낮춘 채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뎠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척에 이르러 목을 노려오는 검은 창날로 튕겨냈고, 옆구리를 꿰뚫을 듯 세찬 파공성과 함께 찔러오는 창끝은 자루로 휘감아 그 힘을 상쇄시켰다.
그리 어렵지 않게 자신의 공격을 무위로 돌린 이진한의 모습에 베르하임 국왕의 두 눈에 진지함이 깃들었다.
‘과연.’
검은 현자를 추종하는 블랙 워커에게는 특별한 무술이나 비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무수히 많은 경험과 전장을 넘어오는 실전을 통해 강함을 기르는 것으로 베르하임 국왕 역시 젊을 적 세상을 떠돌며 수련한 적이 있었고, 그 아들인 제너드 역시 뒤를 따르고자 용병의 몸으로 활동한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지금껏 만나왔던 그 누구보다 기술의 완성도가 남달랐다. 단 한 순간의 움직임이었지만,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자연스러운 것. 즉, 아직 여력이 한참이나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검과 창을 쥔 팔 위로 근육이 꿈틀거리며 시퍼런 힘줄이 솟아올랐다. 기술은 완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힘 싸움은 어떨까.
물론 베르하임 국왕으로선 눈앞의 사내가 검은 현자 본인이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