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
미르엘의 수련이 역동적이었다면 엘레오노라의 수련은 정적이기 그지없었다.
이진한이 가르치고자 하는 마법은 실전에 특화된 공방 위주의 스타일.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온갖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려면 극한의 상황에서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했다.
그렇기에 처음엔 간지럽히는 것으로 그녀의 신경을 흐트러트리려 했다.
“아하하핳하핳!”
보이지 않는 손이 옆구리와 등을 간지럽히자 엘레오노라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숨을 헐떡였다.
어찌나 흥분하던지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지고 머리카락이 산발이 될 정도로 경련한다. 살짝 재미있어진 이진한은 그 강도를 높이다가 이내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하아, 하아.”
힘껏 몸부림친 탓에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있었고 옷가지는 전부 흐트러진 지 오래.
그 관능적인 모습은 이진한으로서 계속 바라보고 있기에 멋쩍은 것이었다.
“….”
양옆에서 각자 수련하고 있던 미르엘과 일레이나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봐왔다.
“음흉합니다.”
“천년이 지나도 남자는 남자군요.”
“오해다! 정신력을 기르기 위한 수련이야!”
이진한으로서는 억울한 상황이었다.
다 엘레오노라를 위한 수련 방법이 아니던가. 물론 살짝 재미있어서 즐기긴 했지만, 더러운 사심 따윈 한 점도 섞여 있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괘, 괜찮아요. 계속해주세요.”
겨우 진정이 되었는지 바닥을 짚으며 일어나던 엘레오노라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해왔다.
그 모습을 보곤 살짝 죄악감을 느낀 이진한은 잠시 고민하더니 짧게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방식을 바꾸자.”
잠시 뒤, 엘레오노라는 꾸벅꾸벅 고개를 끄덕이며 쏟아지는 수마에 휩싸였다.
정신력을 기르기 위해 닥친 시련이 굳이 간지럼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마법으로 끊임없이 졸리게 만든 가운데, 그녀는 이제 필사적으로 제정신을 유지하며 끊임없이 마법을 되새겨야 할 것이었다.
일레이나의 경우엔 「삼라만상」의 술식을 전해준 것 이외에는 따로 손이 들어가지 않았다.
분광십이검의 초식을 수련하는 미르엘과 졸고 있는 엘레오노라와는 조금 떨어진 자리. 그녀는 마치 수행 중인 수도승처럼 고고한 모습으로 명상 중에 있었다.
한점의 흐트러짐 없이 내면에 집중해있다. 그것은 고작 소음 따위로 쉬이 흐트러뜨릴 수 없는 것으로, 이진한이 엘레오노라에게 바라는 정신력의 완성형에 가까운 경지였다.
‘「삼라만상」의 술식.’
일레이나는 자신의 심상에 커다란 벽을 세웠다. 그 위로 「삼라만상」의 모든 술식을 기록했고 처음에서부터 차근차근 그것을 살폈다.
‘베르너 그 사람은 내가 이걸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삼라만상」으로 만든 이 공간의 현상 개변이 가능할 거라 말했지.’
지금 자신의 경지에서 그건 불가능했다.
최소 초월지경에 도달한 대마도사가 《영원》의 연구에 통달했을 때, 최소 검은 현자의 수준에 이르렀을 때 가능한 이야기.
하지만 이것을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마법의 경지가 무섭도록 성장할 것임은 분석했다.
필요한 것은 시간과 노력.
시간은 만들면 되었고, 노력은 항상 해오던 것이었다.
일레이나류 비전 마법 「디비전 마인드」
인간이 자신의 뇌를 전부 사용하지 못했지만, 경지를 뛰어넘은 초월자들은 그 상한선이 대폭 올라가기 마련.
마도사 경지에 이른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 덕분에 고속 술식과 복수 영창 발현이 가능한 것이었다.
일레이나는 예전부터 그 부분을 파고들었다. 인간이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용량에는 한계가 있는바.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실용성이 좋은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더없이 효율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한 번에 사용할 수 있는 총량을 100이라 치면 20씩 잘게 쪼개는 것으로 뇌에 향하는 부담을 줄인다. 그렇다면 100이 아니라 150, 잘만하면 200 이상까지도 상한선을 조절할 수 있었다.
물론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이야말로 그녀를 애머시스트라는 이명을 얻게 해준 비전 마법이었다.
애초에 일레이나는 천재라 불리는 부류였다. 거기에 더해 자신이 만들어낸 오리지널 마법으로 뇌의 사용량이 증폭되니 일반 마도사의 몇 배나 되는 이해력을 이용해 삼라만상의 술식을 분석해나가기 시작했다.
“후우.”
가볍게 수련을 마친 이진한은 땀에 흠뻑 젖은 상태로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미르엘은 그 몸에 때려 박아준 분광십이검의 초식을 수련하고 있다.
엘레오노라는 여전히 꾸벅꾸벅 졸면서 정신력을 향상하고 있고, 일레이나는 귀기 어린 기백을 내뿜으며 명상 중이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가늘어진 눈이 일레이라를 향했다.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이었다.
그녀는 식사나 생리현상 때를 빼고는 전부 한자리에 앉아 명상을 매달렸다.
당연히 대현자의 눈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파악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스스로 이름 붙이길 「디비전 마인드」.
이쪽에 말해오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로 자신만의 비전 마법이리라. 심상을 무수히 쪼개고 공장처럼 술식을 분석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자신도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듯했지만, 대현자가 정보와 연산을 대신 처리해주는 마당에 비효율적인 일이 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487:24:51】
그렇게 총 이틀이 넘는 시간이 흘러갔다.
500시간 선은 가볍게 깨어져 나갔지만, 그래도 일행은 괄목할 만한 성취를 이루었다.
쉬시식-!
빛살처럼 휘둘러지는 검을 따라 백금색 머리카락이 나부끼며 찬란한 궤적을 만들어냈다.
미르엘은 이제 검을 휘두르는 것이 제법 태가 났다.
분광십이검의 요지는 속도. 그녀는 처음 이진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왔다.
“분광십이검의 속도를 살리려면 힘을 포기해야만 하나요?”
“당연한 거 아니야? 힘까지 잔뜩 실은 검을 빠르게 휘두를 수만 있다면 그건 무적이지.”
“하지만 상대의 방어력이 뛰어날 땐 어떻게 하죠? 단순히 속도로만 압도하기에는 한계가 있잖아요.”
이진한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의문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둘러싼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 그렇기에 신중히 단어를 고른 뒤 천천히 설명했다.
“그 정도까지에 생각이 도달했으면 이제 생각을 좀 바꿔야겠지. 속도 위에 힘을 싣는 방법을.”
“…조금 전에는 둘이 양립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조금 전까지는 그랬지.”
스릉.
이진한은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그 끝을 날카롭게 세우며 왼발을 내디뎠고, 오른쪽으로 허리를 비틂과 동시에 검을 쥔 손을 마치 활시위를 당기는 것처럼 한계까지 뒤로 젖혔다.
핑─!
마치 화살이 쏘아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자신의 머리 옆을 꿰뚫는 날카로운 검에 미르엘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백금색 머리카락이 폭풍에라도 휘말린 듯 세차게 나부낀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매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이게 힘이 없어 보여?”
“…아니요.”
“지금부터 속도는 곧 힘이다. 이 생각을 중심으로 삼아. 네가 해야 할 첫 목표는 속도를 살린 채 검 끝에 힘을 집중하는 거다.”
일정 기준의 속도를 넘어섰다는 것은 분광십이검 초입에 도달했다는 것. 이진한은 곧바로 미르엘에게 다음 과제를 부여했다.
“….”
엘레오노라 쪽은 여전히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앞으로는 선명한 마나의 잔향이 하나의 형태를 이루며 결과를 맺어내기 시작했다.
수마에 동화된 것인지, 아니면 이제 그 상태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신력이 강해진지는 모르겠지만, 이전보다는 확실히 성장한 것만큼은 확실했다.
“너는 어때?”
“조금은 이해했어요. 한 0.001% 정도?”
일레이나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디비전 마인드를 극한으로 활성화해도 그것이 한계였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능력으로 거기까지 이해한 것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우습게도 그걸로 경지가 올랐어요.”
“그만큼 《영원》이 대단하단 거겠지.”
“그렇죠?”
똑똑-.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찰나, 누군가 수련실의 문을 두드렸다.
캐서린이 찾아온 것이리라. 일레이나는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고, 그 뒤에 쭈뼛거리던 태도로 서 있던 칼리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칼리파? 여긴 왜?”
“탑주님의 명을 받고 왔다.”
칼리파는 이진한을 바라보곤 흠칫하더니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건.”
하지만 이내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일레이나의 개인 수련실이었을 터인 공간이 마탑의 최상층, 「태초의 레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무슨 용무지? 탑주가 보내서 왔나?”
“…아! 그렇습니다. 더불어 헨더슨 경의 전언도 들고 왔습니다.”
이진한의 부름에 칼리파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는 듯 짤막한 추임새를 내뱉곤 허리를 곤두세웠다.
“주신 자료를 무사히 3황자 전하께 전달했고, 베르하임 왕국 측과 이야기를 무사히 끝마쳤다고 합니다. 최소 국빈급으로 대우받으실 수 있으리라 자신하셨습니다.”
“헨더슨 경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탑주에겐 내일 떠날 예정이라고 해두고.”
“…알겠습니다.”
한순간 일레이나를 바라보는 칼리파의 시선에 미련이 서렸다. 하지만 이진한을 의식한 것인지 입술을 우물거리기만 했고 다시금 고개를 꾸벅 숙인 채 힘없는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나갔다.
“…재 너 좋아하나 보다?”
“윽, 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애도 아니고 좋아한다고 그렇게 구박했겠어요?”
“원래 남자는 나이 먹어도 유치하게 굴어. 대충 눈치 보니까 나 때문에 말도 못 걸어서 미련이 뚝뚝 떨어지던데.”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해도 어림없죠. 얼굴도 제 취향 아니고, 하는 행동거지도 옛날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요. 아, 차라리 고백해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 보기 싫은 낯짝에 주먹이라도 꽂을 명분이 생기잖아요?”
“…혹독하네.”
“그리고 「삼라만상」의 구현에 성공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제가 탑주 자리에 앉게 될 테니까요. 저 녀석은 어디 마구간에 말똥이라도 치우게 두죠.”
이진한은 칼리파의 명복을 빌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일 출발하는 건가요.”
연신 고개를 꾸벅거리고 있던 엘레오노라는 용케도 그것을 들었는 듯했다.
“응. 다들 이전보단 훨씬 나아졌으니까.”
시간의 유예가 있는 이상, 한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다행인 점은 근원의 마탑을 나온 직후보다 상황이 훨씬 좋아졌다는 것이었다.
“베르하임 왕국이라. 오랜만이군요.”
“가본 적 있어?”
일레이나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습 마법사일 때 상위 성적자들은 교류회를 보내줬거든요. 왕국의 규모 자체는 제국과 맞닿은 데메드리오 왕국과 별 차이가 없는데, 기술 발전 쪽에선 비교할 수가 없어요.”
“기술 발전?”
“네. 데메드리오는 완충 지대라는 개념으로 살아남고 있는 반면에, 베르하임 왕국은 마도 공학의 정수를 이루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만만치 않은 국력을 지니고 있어요. 그쪽 인원을 전부 해도 절반도 채 되지 않겠지만, 잘만하면 제국 한 개 군단이랑 비벼볼 만할걸요?”
“그 정도라.”
마도 공학.
그토록 심금을 울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더군다나 베르하임 왕국은 천 년 전 검은 현자가 초대 왕을 도와 건국했다고 알려진 곳이라 하였다. 자신은 그런 적이 없지만, 고대 영웅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만으로도 갈 가치는 충분했다.
‘그쪽 국왕이라면 내가 검은 현자라고 밝혀도 괜찮겠네.’
검은 현자를 거의 종교에 가까이 숭배하는데, 이쪽이 그 본인이라고 밝히면 신처럼 떠받들어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