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05화 (105/210)

◈ 105.

【540:57:20】

장비의 세팅은 어느 정도 끝났다.

세부 조율은 그때마다 맞춰서 하면 될 일이었고, 어차피 대부분 숙련도의 문제라 경험이 쌓이면 문제 될 것은 없었다.

“….”

미르엘은 지금 당장이라도 강화된 프로스트의 힘을 시험해보고 싶은 눈치였다.

세계수의 나뭇잎으로 빙결 속성이 곱절로 강해졌기에 이제 비슷한 레벨 대에선 적수가 없을 터.

다수의 상대로도 효율적인 싸움을 벌일 수 있을 것이었다.

“저 너머로 나가면 제 개인 수련장이 있어요. 먼저 가 있을래요? 저는 손님이 있어서.”

일레이나의 시선이 연구실 문으로 향했다.

살짝 열린 틈 사이로 주황빛 단발 머리카락이 살랑인다. 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흥미 어린 시선으로 안쪽을 바라보다가 이진한과 시선을 마주치고 화들짝 놀라 문 뒤로 몸을 감췄다.

“아는 사이야?”

“네. 원래 제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수습 마법사예요. 캐서린! 들어와도 돼!”

“…어.”

캐서린은 잠시 쭈뼛거리더니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빠른 걸음으로 이쪽에 다가왔다. 그러곤 힘껏 고개를 숙이며 큰소리로 외쳤다.

“거, 검은 현자의 계승자이신 베르너 님을 뵙습니다!”

“…벌써 소문이 났어?”

일레이나의 의문에 살짝 얼굴을 든 캐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탑주께서 내외부에 공인하셨어요. 지금 소문이 쫙 퍼져서 다들 그 이야기밖에 하지 않는걸요.”

“그런 것 치고는 조용한데.”

“혹시라도 허튼짓한다면 탑에서 내쫓겠다고 엄포를 내놓으셨거든요.”

호베르투는 지금 자신의 레어에 틀어박혀 봉파자를 해석하는 데 심취해 있었다. 그 가운데 이쪽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배려까지 해주다니 검은 현자라 밝힌 것은 잘 선택한 듯싶었다.

“연구 과제를 봐주기로 했거든요. 얼마 걸리진 않을 거예요.”

“일이 있으시다면 굳이 저한테 시간을 쏟지 않으셔도….”

“아니야. 약속은 지켜야지. 그렇죠?”

일레이나가 시선을 보내자 이진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하고 와.”

오랜만의 재회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의 손을 보려면 제법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수습 마법사의 연구 과제라고 해봤자 그리 어려운 수준은 아닐 테니 그녀 말대로 금방 끝나리라.

“연구 열심히 해.”

“…네! 일레이나 님을 본받아서 멋진 마도사가 될게요!”

이진한의 격려에 캐서린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의욕을 드러냈다. 그 탓에 들고 있던 연구 자료가 우수수 떨어져 허둥지둥했지만, 그마저도 그에게는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자, 가자.”

이진한은 곧 두 여인과 함께 일레이나의 개인 수련장으로 향했다. 개인에게 할당된 것 치고는 꽤 넓은 규모였지만, 마법사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곳이라 이들에겐 살짝 애매한 크기였다.

“벽은 단단하군요. 마음 놓고 움직이진 못하겠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습니다.”

“잠깐만 기다려봐.”

이진한은 곧 「삼라만상」을 발동했다.

마탑의 최정상, 태초의 레어에 펼쳐진 공간 마법은 「삼라만상」의 하위호환이었다. 이미 대현자의 눈이 술식 해석을 끝낸 상황이라 조건만 갖춰진다면 이곳에서도 발동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더럽게 비효율적이고, 속도도 느린 데다가 틀을 흔들 정도의 충격을 가하면 금세 깨져버리겠네.’

잠시 실전에서도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펼쳐도 초월 마법 한두 방만 떨어뜨리면 금세 무너질 것 같아서 보류해두었다.

슈우욱-!

「삼라만상」이 공간을 규정하고 재구축하기 시작한다. 청록색 벽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이전에 보았던 무채색 공간이 끝도 없이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이 되었다.

“와.”

“이것도 《영원》님의 마법인가요?”

“응. 아주 기초적인 거지만, 같은 초월지경의 대마도사라고 해도 어지간해선 흉내조차 내지 못할걸?”

발동 조건은 딱히 어렵지 않다. 대신 「삼라만상」은 기본적으로 습득한 상태여야 하며 그 술식이 미치도록 어려울 따름이었다. 자신 역시 대현자의 눈이 그 해석을 대신 해주지 않았더라면 사용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터.

“…그러면.”

짝-!

가볍게 손뼉을 두드린 이진한은 또다시 풍경을 바꿨다.

머릿속에 있는 어떤 이미지로든 공간을 재구축할 수 있다. 문득 현대의 풍경이 떠올랐지만,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있기에 적당한 초원을 선택했다.

“바람도 부는군요.”

“최정상보다 더 진짜 같아요.”

미르엘은 뺨을 훑는 바람을 느끼며, 엘레오노라는 발밑의 풀과 흙을 쓰다듬으며 신기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일단 가볍게 반응이랑 내구도 테스트부터 해볼까?”

“…네?”

쉬악-!

이진한의 주먹이 별안간 허공을 때렸다.

설마 그가 자신을 공격할 것이리라 생각지도 않고 있던 미르엘은 일말의 반응조차 하지 못한바.

파아앗-!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가격당하기 직전, 아킬레스의 각인이 발동했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최소 단위인 찰나를 넘어선 틈.

순백의 갑주가 순식간에 그 몸을 뒤덮었고, 외부에서 쏟아지는 충격에 주인을 보호했다.

쿠웅-!

묵직한 충격파가 그곳을 중심으로 터져 나왔을 때, 엘레오노라는 몸을 낮추며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붙잡는 것이 최선이었다.

“…푸.”

미르엘은 격한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들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자신이 몇 번이고 나가떨어져 한참을 구르다 멈춰 섰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괜찮아?”

“…제가 무슨 실례라도 저지른 적이 있었습니까?”

“미안, 이런 건 말 안 하고 의미가 있는 테스트거든. 아프거나 그런 곳 있어?”

“….”

미르엘은 그 갑작스러운 공격에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가슴 부위를 더듬어보자, 조금 움푹 들어간 것을 빼곤 단 하나의 타격도 없음을 깨달았다.

“아뇨, 정신적으로 패닉이 온 것만 빼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네요.”

“…미안해. 지나쳤던 것 같네.”

“이번엔 조금 심하셨어요.”

미르엘이 갑주를 해제하고 원상태로 되돌아오자, 엘레오노라 역시 쌍심지를 켜며 이진한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했다.

거의 귀에 피가 날 정도로 혼난 그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미르엘의 곳곳을 살폈다.

“그래도 잘 발동했네.”

“…뭘 테스트하신 거예요?”

“자동 반응. 사용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받은 공격이 일정 이상의 수준을 넘으면 3단계까지 곧바로 발동되는 기능인데, 딱 그 정도 수준만 힘을 실었거든.”

“상처 하나 없으니 잘 발동했다?”

“그렇지.”

“저는 갑자기 공격받아서 무서웠는데요?”

“…미안하다니까.”

미르엘의 투정에 이진한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사죄의 의미로 좋은 걸 알려줄게.”

“좋은 거요. 베르너 님은 갑자기 때려놓고 보상해준다며 무마하시는 분인가요.”

갑자기 공격해서 꽤 삐진 듯했다.

잠시간 어쩔까 고민하던 그는 에라이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검을 뽑아 들고는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쉬시시식!

수많은 잔영이 허공에 어우러진다. 마치 빛무리가 공간을 베어 가르는 것처럼 화려하고 쾌속한 모습에 부루퉁해 있던 미르엘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 그건 무슨 검법인가요?”

“분광십이검이라 하는 무공이다.”

이진한은 원래 미르엘에겐 검호에게서 체득한 검성류 검법을 재구축해 전수하려 했지만, 그건 워낙 수준이 높았던지라 그조차 사용하기 버거울 정도였다.

그렇기에 인벤토리를 뒤지며 고심하던 중 옛날에 보관해놓았던 무공비급 몇 권을 발견했고, 그중 쓸만한 것을 미르엘에게 전수하자고 했다.

“분광, 십이검?”

“분광검법이라고도 하지. 너에겐 좀 생소한 이름일 거야. 옛날 검술이니.”

월드는 중세 판타지 ‘풍’을 표방할 뿐 엄격한 설정을 지키지 않았다.

무협의 설정도 나왔고 좀비나 바이러스 같은 아포칼립스 테마 등 갖가지 설정이 즐비한바.

심지어 나중엔 SF 같은 우주 배경의 업데이트도 예정되어 있었다.

“빛을 쪼개는 열두 가지의 검이라고 한다. 지금 네 가벼운 움직임과 딱 들어맞을 거야.”

지금까지의 교정으로 많이 완화되었지만, 미르엘은 아직 대검을 쓰던 때 힘으로 검을 휘두르던 버릇이 남아있었다.

분광십이검을 수련하려면 그런 부분을 전부 버려야 할 터. 이제 막 체질이 바뀌기 시작했으니 앞으로 혹독한 수련이 이어질 예정이었다.

“엘레오노라 너는….”

이진한은 본디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에게 「삼라만상」에 기초한 마법을 가르치려 했었다. 물론 이것을 배운다고 할지라도 당장 뭘 할 순 없었다. 최소 초월지경에 오른 대마도사 정도는 되어야 그것을 운용할 수 있을 테니.

그렇기에 그녀의 선택을 물어볼 생각이었다.

“선택지가 두 가지 있어.”

“두 가지요?”

“《영원》과 《지혜》.”

“그건….”

“각기 장단점이 있지. 《영원》의 마법은 한 번 경지에 이르면 무적이야. 평범한 방법으로는 상대가 없어. 하지만 내 마법은 변화를 기조로 해. 상황을 분석하고 변수를 갈구하고 상대를 파악하는. 사용자의 창의성과 반사신경이 아주 중요하지. 기존 마법사처럼 어느 한 곳에 고정되지 않고, 사방으로 움직여서 아마 체력 단련도 필수일 거야.”

엘레오노라는 깊은 고민에 잠긴 듯했다.

그렇게 얼마를 침묵했을까,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저는 베르너 님의 마법을 배울게요.”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내 마법은 그때 당시에도 아류 취급을 받았는데.”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강해질 수만 있다면.”

“그래, 알았어.”

엘레오노라는 강해지고 싶었다.

더는 약해서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고통받는 것은 사양이었고, 그 옆에 우뚝 서서 도움이 되고 싶었다.

일레이나라면 모를까, 그쪽 연구에 문외한이던 자신이 《영원》의 마법을 배운다는 것은 무리인 이야기였다.

“…오.”

그때, 수련장의 문이 열리며 엘레오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문 뒤의 풍경이 자신이 알던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잠시간 멈칫거렸지만, 이내 그것이 탑의 최정상 층과 같은 모습을 띠고 있어 감탄을 내뱉었다.

“「태초의 레어」에 펼쳐진 마법인가요?”

“정확히는 이쪽이 오리지널이지. 그쪽은 수준을 낮춘 하위 마법이야.”

“정말이지 대단하군요. 이런 공간까지 재구축할 정도라니.”

“앞으로 네가 배울 거야.”

이진한은 「삼라만상」의 마법을 띄우며 씩 웃자, 일레이나는 두 눈을 반짝이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일레이나. 너는 만약 《영원》의 연구가 끝나면 뭘 할 생각이지?”

《영원》의 연구가 끝난다면 일레이나 역시 마법의 새로운 체재를 연 대마도사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일레이나는 그 물음에 사뭇 당당한 태도로 대답했다.

“제 마법을 더 발전시켜야죠. 《영원》의 계승자면 …어디 보자, 그래. 《무한》이 적당하겠네요.”

“같은 거 아니야?”

“다르죠. 영원은 끝없이 지속되는 거라면, 무한은 끝없이 늘어나는 거라고요. 더 상위호환이죠.”

“욕심이 크네. 영원을 따라잡는 것만으로도 정점에 오를 텐데.”

“…외람된 질문인데, 《영원》이랑 싸우시면 누가 이겼어요?”

“전적은 내가 더 우세하다. 아, 물론 마법으로는 그녀가 더 강했어. 나는 그 이외의 분야에서 유리함을 점했지. …그리고 필승전략을 곁들여서.”

“필승전략?”

“…그건 업계 비밀이라 말 못 해주지.”

이진한이 말을 얼버무리자 일레이나는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죽어도 못 말하지.“

필승전략이라고 해도 그리 거창한 것은 아니다. 전날 불러내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다음날 PVP를 신청하는 것이었다.

이쪽 역시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마법은 특히 이성과 냉정이 중요한 분야.

물론 그녀는 정점에 달한 랭커였으니 그 상태로도 어지간한 상대는 찜쪄먹었지만, 자신과 싸운다면 열에 아홉은 패배를 맞이했다.

이진한은 자신과 《영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필승전략이 숙취라는 것은 영원히 함구하기로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