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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04화 (104/210)

◈ 104.

현재 일행의 장비는 모두 테마의 통일성이 없는 것들이었다.

의류는 본인들이 원래 지닌 것으로 이진한을 만나고 바뀐 것이라고는 한두 가지 아티팩트와 무기 정도였다.

미르엘의 프로스트, 그리고 데메드리오 왕국의 마법 상점이었던 가녀린 오크에서 산 엘레오노라의 완드와 일레이나의 스태프까지.

가격 대비 좋은 성능임은 틀림없었지만, 이진한의 눈엔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다 돈만 있으면 흔히 구할 수 있는 기성품이잖아. 자고로 아이템이란 오더 메이드지. 스펙은 장비에서부터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다.”

“저는 프로스트가 마음에 드는데….”

미르엘이 제 검을 쓰다듬으며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프로스트가 좋은 검이긴 하지. 그러면 그건 강화하는 쪽으로 하자.”

“저, 저도 지금 스태프가 좋은데요?”

그간 제 스태프에 정이라도 쌓인 것일까.

일레이나도 황급히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이진한은 그런 그녀를 보며 별 어려운 것 없다는 식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도 그렇게 해줄게. 새로 만드는 쪽의 스펙보다 대충 두 배 정도는 떨어지겠지만.”

“…음, 그건 너무 성급한 결정 아닐까요. 사실 생각하고 있긴 했어요. 제 실력과 비교해 이 스태프가 조금 떨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응, 늦었어.”

“아앗!”

일레이나는 거의 엎어지다시피 그에게 매달렸고, 한참의 실랑이 끝에서야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엘레오노라 너는?”

“저는 문제 없어요. 완드 형태라면.”

“오케이.”

본인들의 허락을 받은 이진한은 연구실 한쪽에 자리한 마력 화로로 다가가 그 앞에 재료들을 쭉 늘어놓았다.

“일단은 미르엘 것부터.”

“아, 검을….”

“아니, 갑주부터 만들 거야. 검은 그 나중이고.”

“갑주부터요?”

미르엘은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왕실을 나올 때부터 착용하던 것으로 여러 마법과 가호가 걸려 있는 상등품이었다. 값어치만 해도 거의 만 단위 골드에 해당할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인데 또 만들 필요가 있을까.

“그리 오래 안 걸리니까 잠깐만 기다려봐.”

마경 벨데르에서 용살검을 제작했던 블랙 스미스 클래스의 스킬이 오랜만에 빛을 발했다.

대충 한 시간쯤 여러 재료를 섞고 합성하며 두드렸을까, 눈 부신 빛이 절정에 이르자 손바닥만 한 작은 보석 형태의 결정이 연성 되었다.

“보석? 갑주를 만든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갑주야. 원래는 여기에 끈을 달아서 아킬레스의 목걸이라고 부르는 거다.”

영롱한 황금빛 색을 띤 보석을 움켜쥔 이진한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는 미르엘에게로 다가갔다.

“1단계는 일상형. 가벼운 의복 형태야. 초급 물리저항, 마법저항, 저동회복, 자동수복 등등 여러 부가적인 마법이 걸려 있다.”

“1단계요?”

“2, 3단계도 있어. 2단계는 이거.”

철컥.

보석에 마나를 불어넣어 발동하자 이진한의 몸 위로 순백의 갑주가 뒤덮었다.

“2단계 기본 전투형 플레이트 아머. 방어력이랑 기동성이 균형을 이룬 형태야. 움직이며 싸우기엔 불편함이 없을 거다. 1단계의 상위호환이라 생각하면 돼.”

“3단계는….”

“3단계는 결전 형태. 모든 스펙이 한계까지 끌어 올려진 최상의 상태다.”

쿵.

2단계보다 훨씬 육중해진 갑주가 전신을 뒤덮는다. 물샐틈없이 몸을 감싼 그것은 어지간한 공격에도 뚫리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방어 일변도다. 물론 공격도 할 수 있지만, 생각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을 거야. 대충 활용해본다면, 상대의 큰 공격은 3단계로 버티고, 견뎌낸다면 2단계로 바꾸어서 기동성을 올리는 거지.”

“…그렇게도 활용할 수 있군요.”

“익숙해지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것만큼 좋은 건 없을 거다.”

미르엘은 들뜬 표정으로 새하얀 갑주를 바라보았다. 기사들이 꿈에도 그리던 마법 갑옷이 아니던가. 단계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는 것이라니.

제국 내에서도 그런 기능을 지닌 갑옷은 보지 못했다.

“…만약에 제가 빼앗기거나 잃어버리면 어떡하죠?”

“걱정하지 마. 네 몸에 각인할 거니까.”

“각인이요?”

“그래. 네 피부 위에 직접. 그러니까….”

이진한의 몸이 움찔했다.

각인은 해당 아이템을 귀속하는 것이었다. 그가 지닌 용아청성창이나, 흑백쌍린 같은 것도 이미 각인으로 인한 귀속을 끝마친 것으로, 그 덕분에 바포메트의 현현으로 용아청성창이 던전 밑에 파묻혔을 때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 각인이라는 것은 어디에든 새길 수 있는 것이었지만, 갑주의 각인은 지정된 위치가 있었다.

“어디에 새겨야 하죠?”

“…그, 네 가슴 위에.”

“…네?”

목 아래와 명치의 사이.

갑옷의 각인은 그사이 공간에 하는 것이 고정이었다.

게임에선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이 세계는 현실이 아니던가.

순간 그 위치를 깨달은 미르엘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지만, 이내 결연한 표정을 짓고는 떨리는 손으로 상의의 앞섬을 잡았다.

“자, 잠깐만요. 꼭 그 위치에 새겨야 해요? 이거 수작 부리는 거 아니에요?”

“수작이라니! 진짜야! 옛날부터 그랬어!”

이진한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항변했다.

자신은 다 미르엘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한 점 부끄럼 없노라며 당당함을 피력했지만,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무조건 그의 편을 들던 엘레오노라조차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아니에요, 할게요. 이런 좋은 갑옷까지 만들어주셨는데, 그런 사소한 것쯤은.”

미르엘은 진지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얼굴의 색은 전혀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했지만,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앞섬의 단추를 풀었다.

새하얀 피부가 그 위로 드러난다. 숨길 수 없는 볼륨에 이진한은 짧게 한숨을 토해내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뻗어 그 위에 각인을 새겨나갔다.

“…읏.”

피부에 닿은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미르엘의 몸이 움찔거린다. 본능적으로 흘러나온 뜨거운 숨결이 이진한의 정신을 어지럽게 했지만, 그는 야수의 심장으로 오 분간의 대치 끝에 겨우 모든 각인을 새길 수 있었다.

“후우….”

이진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떼었다.

미르엘도 마찬가지로 탈진한 모양새로 가슴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저 이제 다른 사람한테 시집 못 갈 것 같아요.”

“그래, 알았으니까 발동해봐. 각인 쪽에 마나를 집중한다고 생각하면 돼.”

철컥.

그와 동시에 새하얀 갑주가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2단계, 3단계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확인한 이진한은 흡족한 미소를 흘렸고, 그 단단함을 두드리며 미르엘에게 말했다.

“1단계에 적용할 평상복은 내가 임의로 해놓았어. 다른 옷을 추가하고 싶으면 안쪽 슬롯에 적용하면 돼. 나중에 하는 방법 알려줄게.”

파앗-!

갑옷이 해제되고 미르엘이 평상복 차림으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처음과 다른 옷으로, 검붉은색으로 치장된 고혹적인 분위기의 드레스였다.

“이런 옷이 취향이신가요?”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검붉은색의 드레스는 백금빛 머리카락, 그리고 새하얀 피부와 어우러져 더없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다른 평상복도 있어. 그건 네가 선택하는 것에 따라 다르고….”

이진한은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를 바라보았다.

“이제 너희 걸 작업하자.”

그녀들의 것은 미르엘의 갑옷과 같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블랙 드래곤의 비늘을 원하는 색으로 염색하고, 모양과 형태, 그리고 재질을 가다듬어 의도한 형태로 재조립한다. 그 끝에서 완성된 것은 윤기가 흐르는 두 벌의 로브였다.

“일레이나는 검은색이었지? 엘레오노라는 하얀색이었고.”

“네. 저는 그다지 부끄럽지 않으니 천천히 해도 돼요.”

“저, 저는 조금 부끄럽긴 한데….”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 역시 앞섬의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그것을 본 이진한은 짐짓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

“너희는 각인 안 해도 돼!”

“왜 우리는 각인 안 해줘요?”

“…그건 갑주만 하는 거야. 전용 아이템이니까.”

“왜 우리는 갑주 안 해줘요?”

“너 저거 입고 움직일 자신 있어?”

“마법으로 보정 받으면요.”

“참 잘도 움직이겠다.”

일레이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툴툴거렸고, 엘레오노라 역시 살짝 아쉬운 듯한 기색을 보였다.

그들의 불평을 가볍게 흘려넘긴 이진한은 다시금 인벤토리를 뒤적거렸고, 이내 새빨간 드래곤 하트 하나와 기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호베르투는 드래곤하트를 쪼개서 쓴다고 했지.’

이진한은 결정화된 드래곤하트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만일 그것이 이쪽에 통하지 않는다면, 아까운 재료 하나 날리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건 무슨 보석이에요?”

엘레오노라가 궁금한 듯 물었다.

“이건 내가 예전에 사냥한 드래곤의 하트다. 레드 드래곤 필리오스의 것이지.”

“화룡 필리오스! 들어본 적 있습니다! 검은 현자의 영웅담에 기록된 거예요!”

뒤쪽에서 갑주를 확인하고 있던 미르엘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말해왔다.

“아, 그 화룡의 것이군요.”

“저도 읽은 적 있어요.”

엘레오노라와 일레이나 역시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봐왔기에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것을 움켜쥐었다.

화룡(火龍) 필리오스.

필드 보스급 몬스터로 현자 타임 길드원 세 명과 함께 때려잡은 녀석이었다. 설마 이것까지 기록되어 있을 줄은 몰랐기에 살짝 모호한 기분이 들었다.

‘수복된 마나는 대충 절반 정도.’

마경에서 벨라시온을 상대할 때 부족한 마나를 충당하기 위해서 드래곤하트의 힘을 끌어내었다. 그때 이후로 방치해놓았는데, 벌써 절반 정도까지 충전된바.

이 정도면 그녀들이라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인벤토리에 잠들어 있는 드래곤하트는 몇 개 더 있다. 그러니 이진한은 망설임을 지우곤 용살검을 꺼내 그 끝을 푹 찔렀다.

콰직.

결정화된 화룡의 드래곤하트가 갈라졌다.

비율은 7대3.

이진한은 아까 꺼낸 나무줄기 역시 일부 토막 내 하나는 스태프용으로, 하나는 완드용으로 가다듬었다.

“어? 그건 무슨 가지에요?”

“뭔가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지네요.”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도 마법사답게 심상치 않았음을 느낀 듯했다.

그는 그 위에 나뭇잎을 뚝 떼어 가루로 만든 뒤 펴 바르며 입을 열었다.

“세계수의 나뭇가지야. 스태프나 완드용으로는 최상급이지. 너희들이 지금 다룰 수 있는 것 중에 이것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거다.”

이 윗급은 이제 드래곤본이 있었다.

블랙 다이아몬드의 자루처럼 그 뼈를 세공해 스태프로 만들면 효율이 몇 배는 더 올라간다. 하지만 그 정도 되는 물건은 초월지경에 오른 대마도사 급이나 다룰 수 있는 것.

아직 그녀들에게는 한참 먼 이야기였다.

파아앗─.

잘게 갈린 세계수의 나뭇잎 가루가 가지 안으로 천천히 흡수된다. 그것은 속성을 부여하는 역할로 각각 그녀들의 속성에 맞춰 화염과 바람의 영향을 더했다.

“…얼마나 부려 먹으려고 이런 것까지 만들어줘요?”

“드래곤하트가 들어간 완드라니.”

완성된 스태프와 완드를 쥐여주자 일레이나와 엘레오노라는 황홀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쓰다듬었다.

서로 크기는 다르지만, 빨간 결정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니 꼭 쌍둥이 같은 기분이었다.

“적어도 두세 배는 더 빨아먹을 테니까 각오해.”

“…수련, 열심히 해야겠네요.”

“저도요.”

그렇게 해서 큰 장비들은 대략적인 세팅이 끝났다.

…참고로 마지막에 시행한 프로스트 강화 작업에서 한번 거나하게 삐끗해버려 검날을 부러뜨릴 뻔했던 것은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저렇게 마음에 들어 하는 데 부러뜨리기라도 했으면 아마 미르엘은 오열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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