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감사합니다, 계승자님.”
이진한은 자신에게 박살 난 휘몰아치는 불꽃 기사단의 기사들을 신성력으로 치료해주었다.
‘이대로 돌려보냈다간 또 무슨 후폭풍을 몰고 올지 모르니.’
달의 교단이 인정한 데다가 그 기적을 자신의 몸으로 경험한다. 그것만큼 인식을 바꾸기 쉬운 일은 없었다.
실제로 얼굴을 곤죽 내버리고 관절을 부숴버린 것은 이진한이었지만, 그 치료를 받는 기사들은 상서로운 빛에 모두 감격을 토해내며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희가 큰 착각을 했군요. 신성력을 이리 능수능란하게 다루시는데, 악마 숭배자일 리가 없지요. 달의 교단 역시 그리 말했으니까요.”
헨더슨은 말짱해진 얼굴로 머리를 긁었다. 살살 이쪽의 눈치를 봐오는 것이 어떻게 하면 그의 기분을 풀어줄 수 있을까 고심하는 눈치였다.
거기에 이진한은 쐐기를 박았다.
“악마 숭배자가 아니긴 하지만, 난 마기도 다룰 수 있어.”
파아앗-!
시커먼 마화(魔火)가 그 손 위에서 일렁인다. 선명할 정도로 이질적이고 기분 나쁜 그 기운에 나름대로 화기애애해지던 분위기가 착 가라앉으며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수단으로서 다룬다는 이야기다. 모든 것을 다룰 수 있기에 현자라 불린 것이니, 그 계승자에겐 당연한 이야기다. 만일 내가 악마 숭배자였다면 신성력의 가호를 얻지 못했겠지.”
“…그렇군요.”
왼손엔 마화를, 오른손엔 찬란한 빛을.
그 기적을 목도한 헨더슨은 진지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력은 신을 믿는 힘이었다. 만일 그가 정말로 악마 숭배자였더라면 이토록 순수한 신성력을 손에 넣지 못했을 터였다.
“어찌 되었든 계승자께는 저희가 큰 실례를 했습니다.”
치료가 전부 끝나자 헨더슨은 제 기사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그 앞에서 사죄를 표했다.
참고로 이진한이 자신을 검은 현자라 알려준 것은 호베르투 뿐이었다. 그것도 《영원》의 계보를 잇는 마탑주라 귀띔한 것이지, 초월지경도 찍지 못한 일개 기사단 부단장 나부랭이에게까지 굳이 알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신성력과 마기, 그리고 마법과 무술까지 그리 자유자재로 다루니 오스칼 제국 암부 측에서 오해할 만도 했겠군요.”
“아니, 그건 고의로 한 것이다.”
“고의로, 말입니까?”
의아한 표정을 보니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 듯했다. 그렇기에 짧게 한숨을 내쉰 이진한은 그간에 있었던 일을 짧게 설명했다.
엘레오노라 그리고 미르엘과의 만남.
갖가지 시련과 여행. 여기에 오기까지의 여정까지.
“…….”
이야기를 모두 들은 헨더슨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다. 오히려 그 격렬한 반응에 이진한이 더 당황할 정도였다.
“…저는 3황자 전하의 계파에 속해 있습니다.”
“그렇다고 들었다.”
“이 건에 대해서도 암부 측에서 3황자 전하께 정보를 전달해 계획된 것입니다. 만일 최악의 경우 저를 포함한 기사단 전부, 그리고 호베르투 탑주와 달의 교단 성직자들까지 사망했다면.”
“제국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겠지. 그들에겐 자존심이 걸린 일이니.”
“베르너 님이라면 제국이 전력을 투입해도 쉬이 잡긴 어려웠을 겁니다. 아마 더 큰 손해를 입었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최초의 일을 획책한 3황자 측 평판에 큰 피해가 가겠군.”
“평판뿐이 아닙니다. 저와 휘몰아치는 불꽃의 기사단이 전멸한 것을 설욕하기 위해 이쪽에서 선봉대를 꾸렸을 테고, 결과적으로 막심한 피해를 불러 일으켰을 테지요.”
이야기가 거기까지 오자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이들 역시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3황자 전하 측 세력을 약체화시키기 위해 꾸민 일일 수도 있군요.”
“…그렇습니다. 애머시스트 경도 알다시피 3황자 전하께선 오스칼 제국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아마 그분이 황위에 등극하시게 되면 그쪽과의 국교가 줄어들게 되겠지요.”
“반면에 1, 2황자는 친화적이고요.”
제법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다.
얼굴이 울긋불긋하게 변한 헨더슨은 당장이라도 뛰쳐 나가 자신들에게 정보를 전달해준 제국 암부를 수색해 쳐 죽이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진한은 가볍게 손을 뻗어 그의 뒷덜미를 붙잡는 것으로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이쪽 계산은 끝내고 가야지?”
보상은 무엇으로 충당할 것이냐는 말이었다.
헨더슨은 순식간에 냉정을 되찾았다. 여기서 더 어떻게 보상해야 그의 마음이 풀릴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혹시 원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그리 어려울 건 없어. 내 보증 좀 서주라.”
“보증, 말입니까?”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는지 그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정확히는 신분증이다. 나를 포함해 이 둘의 것까지.”
이진한은 꺼내든 양피지 위에 셋의 인적을 적어나갔다.
보상으로 신분증을 택한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제 돈이나 재화 같은 건 터질 정도로 많다. 바로 직전 호베르투한테도 적잖게 받기로 약속했으니 제국과는 관계를 터놓는 것이 더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어렵지 않습니다. 이건 제 선에서도 충분히 처리 가능한 이야기겠군요. 휘몰아치는 불꽃의 부단장, 이 헨더슨의 이름으로 보증하지요.”
헨더슨은 곧바로 수하를 보냈고,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적어준 대로 신분증을 발급해왔다.
“자, 너희들 것까지.”
출신은 이곳 리베라 제국의 수도 폴포아르텔.
성은 뚝 떼어버렸다. 그 이외 정보는 이전과 같은 것으로 그쪽까진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이것만 있으면 서대륙 어느 곳이든 어렵지 않게 공식적으로 통과할 수 있을 터.
“이건 너무 사소한 것들이라 보상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혹시 다른 것은 없으신지요.”
“음.”
재화와 보물은 괜찮다. 그들에게 구할 수 있는 건 관계, 동맹, 배경 같은 무형의 추상적인 것들 뿐. 그러던 차 이진한은 문득 좋은 것이 떠올랐다.
“베르하임 왕국과 연결해주었으면 한다.”
“베르하임 왕국 말입니까. …아, 그곳은 검은 현자님을 개국 공신으로 모시고 있다지요.”
“그곳에 볼일이 있다. 창구는 있겠지?”
“물론이지요. 굳이 저희가 나서지 않아도 계승자임을 밝히시면 아마 극진한 환대를 할 겁니다. 이 인적 사항으로 연락을 넣어놓겠습니다.”
이진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목적지인 베르하임 왕국은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닌 곳으로, 검은 현자가 초대 건국 왕을 도와 설립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특히 왕가 창고에는 검은 현자뿐만이 아니라 다른 고대 영웅들에 관해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기록까지 남아 있다지 않는가.
‘이건 안 갈 수 없지.’
어디까지가 게임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이곳으로 넘어온 것은 자신뿐인가 아니라면 다른 이들도 함께인가.
만일 함께 왔다면 같은 시간대로 왔는가.
아니면 과거 혹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풀리지 않은 의문은 아직도 수없이 많았다.
적어도 그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면 베르하임 왕국에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건은 전부 상세히 정리해 3황자 전하께 직접 보고드리겠습니다. …계승자께서도 저와 함께 전하를 만나 뵙는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터인데.”
속이 훤히 보이는 그 말에 이진한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자신을 회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그들도 막연하게 깨닫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단순히 만나는 것으로 큰 힘이 될 수 있을 터.
고대 영웅의 이름은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큰 무게를 지닌 것이다. 그 계승자와 친밀한 관계라면 단순히 그것만으로도 여론이 꿈틀거릴 수 있을 정도였다.
“번거로운 일은 사양이다. 대신 고급 정보가 있는 편지 한 장을 써주지.”
“고급 정보입니까.”
이진한은 일필휘지로 양피지 위에 글을 적어갔다.
주로 관련된 것은 오스칼 제국 황실에 관한 것으로, 그들 뒤에 마족이 자리하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성의 표시는, 이거면 충분하려나.”
더불어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쑥 빼냈다.
미스릴보다 단단하고 항마력이 높은 것으로, 그 어느 광석보다 희귀하고 값비싼 블랙 드래곤의 비늘이었다.
“…이, 이건!”
헨더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함을 토해냈다.
“마경에서 쓰러뜨린 블랙 드래곤의 비늘이다. 처음 보는가?”
“가공되지 않은 것은 처음 봅니다. 하지만 분명 사체는 남지 않았다고….”
“남지 않았지. 드래곤이란 종족은 본디 죽음을 맞이하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순수한 마나로 흩어져 버린다. 이건 그 전에 빼내어 놓은 것들이다. 이거 하나만 해도 튼튼한 갑주 하나 만들기엔 충분하겠군.”
성룡의 비늘로 만든 갑주.
벌떡 일어난 헨더슨보다 살짝 더 큰 크기니 재료로 쓰기엔 충분하리라. 잘만 만든다면 오러도 버텨낼 것이고, 어지간한 마법도 별 충격 없이 무효화 하거나 튕겨낼 수 있을 터.
이진한 본인도 만들 수 있는 장비였지만, 지금 착용하고 있는 게 훨씬 좋은 스펙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 애들한테나 만들어줄까? 하얀색으로 칠해서 만들면 미르엘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애초에 마탑으로 방향을 잡은 것도 그녀들의 장비를 세팅해주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호, 혹시 드래곤 하트는….”
“드래곤 하트?”
옆쪽에서 우두커니 바라보던 호베르투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것에 이진한은 가볍게 손을 뻗어 인벤토리서부터 「블랙 다이아몬드」를 소환했다.
“허어억!”
“블랙 드래곤 벨라시온의 하트를 핵으로 심었지. 자루는 그 뼈를 갈아 가공한 거다.”
“드, 드래곤 하트를 통째로 사용하신 겁니까?”
“원래 통째로 쓰지 않아?”
“보통 인간이 그걸 다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보통 두, 세 개로 나누지요.”
“나눌 수도 있는 거구나.”
이진한은 씩 웃으며 「블랙 다이아몬드」를 까딱거렸다. 어쨌든 나누거나 말거나 자신은 잘 사용할 수 있었으니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일단 이쪽의 이야기는 끝이다. 더 할 말 있나?”
“…없습니다. 귀중한 구경을 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사안은 꼭 3황자 전하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축객령을 내리자 헨더슨은 이전보다 더 정중한 태도로 인사하고 수하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찍어 누른 것보다 벨라시온의 드래곤 하트로 만든 「블랙 다이아몬드」를 보여준 뒤가 더 인정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현자님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만일 머무실 예정이라면 마탑에서 가장 좋은 방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마 며칠은 있을 거다. 신세 좀 지지.”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말씀하시지요.”
그들은 호베르투의 배웅을 받으며 탑의 정상에서 밑으로 내려왔다.
숙소는 호베르투가 자신할 만한 수준으로 이전에 묵었던 하기스의 편안함보다는 몇 배는 좋은 수준인바. 간단히 짐을 풀고는 곧바로 일레이나의 연구실로 향했다.
“…이건, 대단하네.”
숙소를 보았을 때보다 더 놀란 반응이 토해져 나왔다. 과연 제국을 대표하는 마탑인 것인지 엄청난 설비들이 곳곳에 자리했다.
‘마탑주 제자니 당연한 건가. 학계에서는 애머시스트라 불릴 정도로 유망한 인재였으니.’
대현자의 눈조차 분석을 버벅댈 정도의 기구들이 즐비한바.
그 광경에 일레이나는 사뭇 자랑스럽다는 태도로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어때요? 제 인생의 대부분이 녹아 있는 공간이에요.”
“자랑스러워 할만하네요. 제국 황실 마도사의 연구실에 가본 적이 있는데 이곳에 발끝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예요.”
“흐흥, 그렇죠?”
미르엘에 이르러선 너무 복잡해 보여서 섣불리 손조차 대지 못하고 있는 모양새.
그 가운데를 돌아다니던 이진한은 슬쩍 고개를 돌리며 일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이거 전부 써도 되는 거지?”
“마음껏 쓰세요. 어차피 이제 이것들을 사용할 연구는 끝났으니까요.”
“흠.”
“…근데 뭘 하실 생각인가요?”
또 무슨 기상천외한 걸 만들어낼까.
그런 기대를 담아 묻자, 이진한은 말하지 않았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너희 장비 세팅한다고 했잖아.”
“…장비? 언제요?”
“말 안 했나?”
“네.”
“지금 했으면 됐지 뭐.”
이진한은 머쓱함에 뺨을 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