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헨더슨은 작금의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터널 학파의 대마도사 호베르투.
이갈루크를 모시는 달의 교단의 성직자들.
휘몰아치는 불꽃 기사단의 대장을 비롯한 정예 기사들과 부단장인 자신까지.
대륙 어딜 보아도 이 정도 전력이면 쓰러뜨리지 못할 적이 없다 자부했다.
호베르투 역시 설사 정말로 드래곤이 나올지라도 이 영역 안에선 꼼짝 못 하게 만들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검은 현자의 계승자라곤 했지만, 말이 좋아야 계승자지 그 본인이 아닌 이상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블랙 워커라 불리는 부류는 검은 현자를 동경해 그가 했던 것처럼 모든 클래스의 부류를 익히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부질없게도 대다수가 일류의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고, 현실과 재능의 벽에 가로막혀 이도 저도 아닌 것으로 끝나지 않았는가.
검은 현자는 검은 현자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호베르투의 마법이 전부 깨어지고, 자신마저 힘으로 찍혀 눌리자 산산조각이 나서 깨어져 나갔다.
“끄아아아아아악!”
시퍼런 낙뢰가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려 대지 한가운데를 때린다. 그 직전 헨더슨은 호베르투를 밀쳐 영역권에서 밀어냈고, 홀로 그것을 감당했다.
휘몰아치는 불꽃을 상징하던 갑주가 순식간에 녹아들고 피부가 시커멓게 타들어 가며 자글자글한 흉터를 일으킨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이진한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꼴에 의리는 있는가. 그래, 그게 네 목숨을 살렸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낙뢰가 바람에 쓸려 사라지듯 가라앉았다. 그 가운데 몸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 올리던 헨더슨은 크게 다리를 내디디는 것으로 비틀거리던 걸음을 다잡고는 여전히 형형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기다란 흉터가 새겨진 울대 위로 힘줄이 꿈틀거린다. 헨더슨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고통이 온몸을 아우르는 가운데도 핏발선 눈으로 이를 악물었다.
“휘몰아치는 불꽃의 부단장!”
파아앗-!
눈부신 오러 블레이드가 검 끝을 타고 피어올랐다. 주인의 의지를 타고 소용돌이치는 것이, 마치 그의 외침처럼 휘몰아치는 불꽃을 보는 듯했다.
“제국의 철벽(鐵壁)!”
헨더슨은 검을 끌어당겼다.
상대는 자신들과 싸움에서 한 톨의 마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즉, 이쪽에 보고된 업적은 모두 자신의 순수한 힘으로 세운 것이라는 이야기인바.
그 사실이 증명하는 것은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이었다.
검은 현자의 계승자는 악마 숭배자가 아니다.
오히려 이쪽에서 받들어야 할 고대 영웅의 유지를 계승한 강자. 하지만 그렇다 한들 이리 순순히 승리를 내줄 순 없었다. 자신은, 휘몰아치는 불꽃의 부단장은 제국의 철벽을 상징한다. 자신이 쉽사리 무너져 내린다는 것은 제국에 위신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평생을 걸고 지켜온 숭고한 신념.
그것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할….
“어쩌라는 거야. 소리 지르면 힘이라도 세지냐?”
순식간에 거리를 격하고 들어온 이진한이 그 품을 파고든다.
헨더슨은 그것을 예상한 듯 일생을 건 참격을 휘둘렀고, 자신에게 닥쳐온 적을 정확히 절반으로 베어 갈랐다.
‘잡았다!’
쓰러뜨리진 못했어도 치명상은 입혔으리라.
자신의 생에 이토록 완벽했던 일격은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 눈이 부릅떠졌고, 신기루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이진한의 신형을 볼 수 있었다.
“검호(劍虎)도 내 앞에서는 함부로 못 까불었어.”
힘껏 말아쥔 주먹이 안면을 때린다.
헨더슨은 그 공격을 보진 못했지만, 목에 안간힘을 주고 버텨내려 했다. 적어도 꼴사납게 쓰러지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뒤통수에 큰 충격이 부닥쳤다.
쿵-!
안면을 얻어맞고 날아간 헨더슨의 몸이 무채색 바닥과 충돌한 끝에 몇 번이고 퍼덕거리며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끝에선 온몸을 잘게 경련하는가 싶더니 이내 축 늘어지며 수하들과 같이 멈춰버린다. 그것을 보며 손을 툭툭 털어낸 이진한은 고개를 돌려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던 호베르투를 향했다.
“…다, 당신은.”
턱이 잘게 떨린다. 동공에 서려 있던 어렴풋한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고, 메마른 혀가 움직이며 언어를 조합해냈다.
“누구 십니까.”
이터널 학파의 학파장이자, 마탑의 주인이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며 물었다.
“…….”
천천히 다가온 일레이나는 처음 보는 스승님의 모습에 두 눈을 살짝 떨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굳건한 의지가 담긴 눈으로 그의 곁에 섰다.
이진한은 씩 웃으며 그녀를 제 품에 안고는 순식간에 수십 년은 더 늙어버린 듯한 초췌한 몰골의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이 세상에는 단 세 명만이 존재했다.
이진한이 그렇게 만들었으며, 그가 바라는 한 언제까지고 그 상황이 이어질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 불쌍한 중생에게 자신들이 누구에게 싸움을 걸었는지를 알려주었다.
“내가.”
시커먼 날개가 이진한의 등 뒤로 활짝 펼쳐졌을 때 호베르투의 두 눈이 더 없이 커졌다. 마치 까마귀의 것 같은 깃털이 흩날렸을 땐 무릎을 짚고 선 두 손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왔고, 종래엔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 이진한의 입을 기대감 서린 두 눈으로 바라봐왔다.
“《지혜》의 검은 현자다.”
“…아.”
그 짤막한 탄식 안에 삼라만상의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
푸른 하늘이 펼쳐진 초원이었다.
그 가운데 이진한과 일레이나, 그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엘레오노라와 미르엘까지 함께 탁자에 둘러앉아 느긋한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입맛엔 좀 맞으시는지요.”
“괜찮네.”
“허허, 다행입니다.”
곁에 선 호베르투는 마치 집사라도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차나 과자가 빈다면 곧바로 가득 채워 넣었고, 사뭇 정중한 모습으로 다시 물러날 따름이었다.
“…….”
일레이나는 살짝 불편 모습이었지만, 좋은 게 좋은 것 아닌가. 머지않아 이 상황에 적응하고는 다람쥐처럼 볼을 부풀리며 지난 밤의 허기를 달랬다.
“그나저나 의외네요. 잔뜩 화가 나서 들어가시길래 마탑 윗부분은 날아갈 줄 알았어요.”
“맞습니다. 밑의 사람들이 휘말리지 않도록 대피시켜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누구를 재앙신으로 아나. 나도 사리 분별은 할 줄 알아. 당연히 적당한 수준으로 조절했지.”
마탑 자체가 뒤흔들릴 정도로 힘을 발했다면 분명 밖에서도 큰 소란이 있었을 터다. 그렇기에 이진한은 의도적으로 힘을 조절했다. 가장 강한 위력을 지닌 초월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다수를 상대로 좋은 효율을 보이는 대단위 공격 스킬도 아꼈다.
‘…그게 적당히 조절한 거라고?’
호베르투는 고개를 내리깔며 입을 벌렸다.
제국의 내로라 하는 기사단의 정예 기사들을 아이 농락하듯 두들겨 팬 것도 모자라 삼라만상의 주도권까지 빼앗아 간 것이 적당히 조절한 것이라니. 그렇다면 본심을 발휘했을 때는 얼마나 더 대단하다는 것인가.
“그래서 이제 좀 진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진한은 자신의 맞은편에 의자 하나를 만들어냈다. 눈치껏 그것이 자신의 자리라는 것을 깨달은 호베르투는 천천히 걸어가 그 앞에 앉았고, 한없이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입니까.”
“원흉은 누구지?”
“처음은 헨더슨 경의 연락이었습니다. 오스칼 제국 측의 암부에서 정보를 보내왔다고 하더군요.”
“…제국의 암부가?”
“예. 신성 왕국이 주제도 모르고 현자님의 뒤를 캐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암부 쪽에서 그들의 자문받은 결과 현자님께서 악마 숭배자라는 의심을 짙게 하고 있다고, 하하. 말도 안 되지요.”
검은 현자가 뭣 하러 악마를 숭배하겠는가.
실제로 호베르투와 헨더슨을 굴복시키고, 자신을 두려움에 떤 시선으로 바라보는 달의 교단 성직자들에게 다가가 더없이 찬란한 신성력을 피워 보였다.
곧 찾아갈 테니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덤이었으니, 눈앞에 확실한 증거를 보고 자신들이 헛된 의심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성직자들은 깊이 뉘우치고는 그대로 후일을 기약하며 자리를 떠나갔다.
“신성 왕국이라.”
달의 교단에서 이야기를 잘 전달해준다면 좋겠지만, 신성 교단은 다른 교단을 존중하되 유일신을 받드는 기조인지라 인정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악마 숭배자라는 오해는 직접 그들과 접촉해서 풀어야 할 듯싶었다.
“그 빌어먹을 놈들은 언제까지 이쪽을 귀찮게 할 생각인지.”
“그러니까 말입니다. 마르딘에서 전부 갈려 나가 더는 이쪽에 손을 써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움직여오다니.”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분개를 토해내며 제국 암부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다. 슬쩍 그들을 바라보던 호베르투는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분들은?”
“모르는가? 오스칼 제국의 황녀인 엘레오노라와 그 수호 기사인 미르엘이다.”
“…그 소문의? 처형당하지 않았습니까?”
제국 암부가 거기까지 이야기를 전달해준 것은 아닌지 모르는 기색이었다. 그렇기에 이진한은 짧게 사정을 설명했고, 호베르투는 감탄을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적으로도 고대 영웅분들은 오스칼 제국 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다져왔지요.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 혈족이 현자님을 깨어나게 했다니 참으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은.”
말은 참 잘한다.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압도적인 우위로 찍어누르고, 자신이 《지혜》의 검은 현자임을 밝히자 호베르투의 태도는 순식간에 180도 뒤바뀌었다. 마치 자신의 간과 쓸개라도 내어줄 것처럼 충성스러운 모습으로 변했고, 묻는 모든 질문에 자신의 지식을 쥐어짜 대답했다.
“그러면 저와 헨더슨 경은 영락없이 농락당해버린 것이군요.”
“더불어 나와 척질뻔하고.”
“괘씸한 놈들입니다.”
호베르투의 눈동자 위로 불꽃이 일렁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대 영웅 중 한 명인 검은 현자 본인이다. 이제 그의 마음에 한 점 의심 따윈 남아있지 않은바.
그런 중요한 존재와 겨우 암부 따위가 흘린 정보에 속아 넘어가 대적하다니.
“이해는 해. 수많은 업적을 세운 이가 악마 숭배자였으며, 자신들이 그것을 밝히고 단죄했다면 크나큰 명예를 얻을 수 있으니까.”
“…좀스럽기 그지없는 생각이었습니다. 눈앞의 이득에 멀어 감히 영웅께 대적했으니.”
“뭐, 보상은 실컷 받았으니까.”
이진한은 일레이나가 하룻밤 동안 마음고생 한 값을 실컷 받아내었다. 마탑에 축적된 온갖 재화뿐만 아니라 실추된 그녀의 명예를 비롯해 후에 호베르투가 물러나고 그 탑주의 자리로 일레이나가 앉을 수 있도록 이야기까지 마쳐놓은 상태였다.
물론 구두로만 하지 않았다. 깨뜨릴 수 없는 맹약으로 이쪽의 정체를 발설하지 않는 조항을 비롯해 여러 가지 제한을 걸었고, 호베르투는 담담히 그것을 모두 받아들였다.
‘마탑으로서도 손해 보는 일은 아니다.’
재정이야 썩어 나는 게 돈이었다.
마탑주의 자리야 어차피 자신의 제자 중 한 명이 할 것이었으니 고민할 거리를 줄인 것인바.
그런 것으로 검은 현자의 비호 아래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역대 마탑 주의 업적 중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었다.
“일단 이곳의 주도권은 다시 돌려주고.”
「삼라만상」을 조작해 태초의 레어 주도권을 호베르투에게 넘겨준 이진한은 마침 문득 떠올랐다는 듯 품에서 봉파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것은….”
“이것도 주지. 나보단 《영원》의 계승자에게 있는 편이 이치에 맞을 테니까 말이야.”
“현자님….”
호베르투는 더 없이 감격스러운 모습과 함께 잘게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봉파자를 매만졌다.
《영원》이 직접 남긴 유산이다. 재화로만 따져도 헤아릴 수 없는 값을 받을 것이었으며, 그 계보를 이은 자신들에게 있어서는 대체할 만한 것이 없었다.
“….”
일레이나는 살짝 아쉬운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자신 역시 《영원》의 연구를 전공으로 하는바.
나중에 조금이라도 빌려 살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스승의 손으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무어라 할 수 있을까.
애초에 메피스토를 쓰러뜨리고 그것을 쟁취한 것이 그 본인이거늘.
이진한 역시 그 아쉬움을 눈치챘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단물은 다 빼먹었으니까.’
봉파자의 술식은 이미 「삼라만상」 안에 저장되었다. 일레이나에게는 그 「삼라만상」 자체를 전수해줄 생각이니 더는 필요 없을 터.
쓸모없어진 아티팩트로 호베르투의 마음을 끌어올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었다.
“이제 저 녀석들을 처리할 차례인가.”
이진한이 슬쩍 문가를 바라보자, 커다란 대문이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저절로 열리며 문밖으로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벌을 서고 있는 휘몰아치는 불꽃의 기사단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탑주는 이쪽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공격한 것에 대한 값으로 막대한 보상을 약속했는데, 너희는 뭘 해줄 수 있지?”
그들에게 다가간 이진한은 창백해진 얼굴로 침묵하고 있는 헨더슨을 툭툭 치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