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Lv.952 「호베르투 이터널」
Lv.912 「헨더슨 앤듀르」
확실히 그간 봐왔던 이들 가운데서 실력자로 꼽힐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대마도사도 아니고, 초월지경도 아니었으며, 제대로 된 《영원》의 마법조차 물려받지 못했다.
‘제대로 된 게 뭐야.’
「태초의 레어」.
헛웃음이 절로 새어 나오는 작명이다. 드래곤은커녕 헤츨링을 상대로도 질 것 같은 녀석이 레어를 칭하다니.
“…껍데기만 흉내 냈다, 라.”
호베르투는 무표정으로 그 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눈동자엔 숨길 수 없는 분노가 일렁이고 있다. 마치 심각한 모욕을 받은 것처럼 가라앉은 분노가 차가운 빛을 발했다.
“사뭇 《영원》에 대해 조예가 있는 듯하지만.”
쿵.
스태프의 끝이 다시금 바닥을 찍는다. 그러자 백여 명의 호베르투가 발하는 술식이 눈 부신 빛을 내뿜으며 마법의 발현을 알려왔다.
“어디 한 번 그 자신감이 혀를 따라오는지 보자꾸나.”
“…이런.”
헨더슨은 쓴웃음을 지으며 슬쩍 뒤로 물러났다. 단단히 열받은 그의 모습에 자신이 나설 차례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실제로 허공을 가득 뒤덮고 떨어져 내리는 눈부신 빛무리는 자신이라도 피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빼곡한 것이었다.
촤르륵─.
일레이나의 몸을 휘감은 것보다 더 수준이 높은 봉인 마법이었다. 마치 필름을 닮은 그 구조가 수십, 수백 겹이 겹쳐져 그 몸을 구속했고, 그것을 지켜보던 일레이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뭐 저런 무식한…!’
자신의 몸을 휘감은 하나만 하더라도 그 압박감에 숨을 제대로 내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것이 무려 수백 겹이라면 아무리 그라도….
“말했잖아. 어설프게 껍데기만 흉내 낸 것이라고. 그딴 수준으로는 내 터럭 하나 건드릴 수 없다.”
이진한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구속당하고 있는 처지에 무슨 허세인가.
호베르투는 어처구니가 없는 시선을 보냈지만, 곧 그가 품에서 꺼낸 작은 큐브를 보곤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건?”
“봉파자라는 건데 들어는 봤는지 모르겠군. 메피스토라는 악마가 말하길 《영원》이 만든 아티펙트라고 했었지?”
“네놈 역시 악마와 내통한…!”
봉파자(封破者).
《영원》과 관련된 문헌에 있는 이름이었다. 온갖 봉인과 결계를 농락하는 힘을 지닌 아티팩트로 역사의 어느 부분 소실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호베르투는 그것보다 먼저 메피스토라는 악마를 거론한 것에 중점을 두고 그가 악마 숭배자라는 것에 무게를 실었다.
“성급하네. 내통이 아니라 죽이고 빼앗은 건데.”
이진한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봉파자를 들어 올렸다. 그 위로 가볍게 마나를 주입하자 저장된 술식이 활성화됐고, 어디에 속박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제 주인처럼 자신을 옭아맨 봉인을 무참히 찢어발겼다.
“큼.”
호베르투는 짤막한 신음을 토해냈다.
자신의 마법조차 파훼하는 것이 의심할 여지 없는 진품이었다. 《영원》의 후계를 자처하는 이상 욕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
그렇기에 그의 눈에 탐욕이 깃들었다.
“새끼, 눈 희번덕거리는 거 봐라. 좋은 건 알아가지고.”
이진한은 씩 웃으며 봉파자를 쥔 손 위로 빈손을 들었다.
“그런데 봉파자는 이렇게만 쓰는 게 아니더라.”
이진한은 혹시나 도움이 될 것이 있나 싶어 예전에 해두었던 메모의 기록들까지 전부 찾아보았다.
그 끝에서 단락 적이나마 《영원》의 마법에 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던바. 곧 그 위로 「삼라만상」이 발동되며 봉파자와 공명을 알려오기 시작했다.
“기묘한 조화로구나. 허나 이 공간은 내가 주도한 질서에 따라 흘러간다. 설사 《영원》께서 만드신 아티팩트라 할지라도 그 흐름을 거스를 순 없다.”
호베르투는 절대적인 자신감에 차 있었다.
《영원》이 직접 돌아온다면 모르겠지만, 천여 년도 더 전에 만든 아티팩트로는 이 세계를 어찌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호언장담과는 다르게 그 직후 펼쳐진 상황에 눈가가 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파스스─.
하늘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공간을 구축한 마법의 술식이 해제되는 것이었다.
호베르투는 황급히 마나를 끌어내며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모두 부질없는 시도에 불과했을 따름이었다.
“메피스토는 단순히 결계를 부수는 용도로 사용했지. 하지만 봉파자의 의의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능력은 단순히 봉인이나 결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좀 더 고차원적인, 현실에 묶여 있는 현상까지에도 간섭할 수 있었다.
“개화하라.”
《영원》 오리지널 마법 「삼라만상(參羅萬像)」
호베르투의 마법처럼 흉내만 낸 것이 아니었다. 비록 그 수준은 원조와 비교해 초입에 불과한 수준이었지만, 분명 《영원》의 것과 동일한 오리지널 마법이었다.
쉬아아악-!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주변 공간이 순식간에 무채색으로 뒤바뀐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인지의 부조화가 일어나고, 이곳이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몽롱해졌다.
“대단한데.”
이진한은 짤막하게 감탄을 토해냈다.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 자신인 신에 가까운 권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호베르투도 비슷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고작 제 분신 백여 개를 만들어내는 것이 끝이었으니 어찌나 그렇게 창의성이 없을 수 있을까.
“네, 네놈….”
주도권을 빼앗겼다. 이 공간 자체를 완벽하게 장악당해버렸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운 것인지 호베르투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손끝을 덜덜 떨었다.
쿵. 쿵. 쿵.
그러면서도 스태프의 끝으로 연신 바닥을 내리찍고 있는 것이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듯했다. 노인의 모습으로 그러고 있으니 측은지심이 들었지만, 이진한은 고개를 꺾으며 웃음을 흘렸다.
“아까의 그 자신감은 어디 갔지?”
쉬아아아악-!
그와 동시에 다시금 눈부신 빛줄기가 공간을 베어 갈랐다.
호베르투 옆에 있던 헨더슨이 나선 것이었다. 검 끝으로 농밀한 오러 블레이드를 피워 올린 그는 살짝 경직된 표정으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호베르투 되는 대마도사가 저리 당황할 정도이니 필시 큰 이변이 발생한 것일 터.
즉, 상황을 오래 끈다면 좋지 않아진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헨더슨은 직접 나서서 무력으로 찍어 누르려 했으나 자신의 공격에 대응해 이진한의 손에 쥐어진 한 자루의 창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콰아앙-!
푸른 궤적이 허공에 이어지며 쏘아지던 오러 블레이드와 부닥쳤다.
헨더슨은 당연히 그가 밀려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여파가 가라앉은 후 너무나도 멀쩡히 서 있는 이진한의 모습에 가늘어진 눈으로 검을 다잡았다.
“그렇군. 검은 현자는 마법으로만 특출나지 않았다. 검, 창, 활, 독 등등 모든 분야가 수준급에 이르렀다고 했지. 그 계승자도 마찬가지인가. 그저 비유인 줄로만 알았거늘.”
“누구 마음대로 비유래.”
휘릭.
용아청성창을 가볍게 회전시켜 옆구리에 낀 이진한은 몸을 숙이며 무게중심을 앞으로 옮겼다.
“그런 극단적인 자세로….”
헨더슨이 보기엔 무모하리만큼 저돌적인 모습이었다. 자신은 휘몰아치는 불꽃의 ‘철벽’이라 불리는 남자.
그런 요행으로 이 단단함을 뚫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인가.
쿵.
하지만 이진한이 한 발자국 내디디는 순간 상황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엄청난 힘에 바닥이 우그러들고, 한계까지 응축된 추진력이 굽혀진 무릎을 밀어낸다. 단 한 걸음, 그는 단 한 걸음 만에 푸른 궤적을 길게 이으며 헨더슨의 앞까지 쇄도했다.
“…윽!”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헨더슨조차 경기를 일으키며 뒤로 물러났을 정도의 속도.
그래도 기사단의 부단장이라는 이름은 허투루 거머쥔 것은 아닌지 그 상황에서 카운터를 날리며 쏟아지는 참격에 대응했다.
저저적-!
무채색 공간의 벽과 바닥이 육면체로 썰려 나가며 파편이 흩날린다. 멍하니 있던 호베르투는 그것에 얻어맞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고, 이내 코앞에서 대치 중인 이진한과 헨더슨을 바라보았다.
“…놈!”
파아앗-!
대마도사에 근접한 방대한 마나가 솟구치며 마법의 발현을 알린다. 하지만 헨더슨과 창을 맞대고 있던 이진한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발을 굴렀다.
“너, 이제부터 여기서는 마법 못써.”
「삼라만상」의 이치가 이진한의 의지를 재단했다. 그러자 호베르투를 중심으로 몰려들었던 마나가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고, 그 자리에는 늙고 유약한 노인만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이, 이게. 나는….”
“탑주! 가세하시오! 이러다간!”
검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힘이 예사롭지 않다. 헨더슨은 잔뜩 경각심 어린 표정으로 호베르투를 향해 일갈했지만, 이미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뿐이었다.
“휘몰아치는 불꽃 기사단이라고? 리베라 황실 산하 기사단인가? 누가 시켜서 날 잡으러 왔지?”
“이익!”
기긱, 기기긱─.
창대가 검날을 짓누른다. 힘의 격차에서 오는 압력에 헨더슨의 무릎이 점차 굽혀졌고, 이진한은 시퍼런 광망이 서린 눈동자로 그의 심지를 꿰뚫어 보았다.
“악마 숭배자? 이갈루크라고 하는 달의 교단이라면 모를까 제국의 기사단까지 나설 일은 아니야. 더군다나 탑주가 자신의 제자를 인질로 삼으면서까지 날 이곳으로 꿰어내려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의혹투성이였다.
사실 정말로 이들이 악마 숭배자를 처단하겠다는 위명 아래 모인 걸 수도 있겠지만, 세상이 그리 예쁘게 만은 돌아가지 않는 법.
분명 누군가의 시커먼 저의에 맞물려 움직였을 가능성이 컸다.
“부단장님!”
헨더슨의 위기에 기사와 교단의 성직자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이진한은 그들을 한 번 흘깃 본 것만으로 공간을 조작해 그곳과 이곳의 거리를 무한대로 늘려버렸다.
“말할 생각이 없다 이거지?”
“…악마 숭배자와 타협할 생각 따위!”
흐하합, 하는 기합과 함께 헨더슨은 자신을 내리찍던 창을 떨쳐내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나 태세를 가다듬었다.
그러면서 여전히 땅에 누워있는 일레이나를 바라보더니 재빨리 그녀의 신형을 붙잡아 들어 그 목에 검을 들이댔다.
“네게 중요한 여인이라지.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이 여인이….”
“누구보고 여인이래.”
“…헉!”
헨더슨은 자신의 손에 잡힌 호베르투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그의 몸을 놓았다. 참고로 원래 인질로 잡을 셈이었던 일레이나는 이진한의 품에 안겨 있을 따름이었다.
“…소용없네. 삼라만상의 통제권을 빼앗긴 이상 저 남자는 이곳에서 신이나 다름없으니.”
“그런 말만 내뱉을 상황이 아니잖습니까! 뭐라도 해보십시오!”
자조 어린 호베르투의 말에 헨더슨은 분노에 찬 얼굴로 윽박질렀다. 압도적으로 찍어 눌러도 모자랄 판에 이 꼴사나운 모습은 무엇이던가.
찌이익-.
이진한은 그 둘이 말다툼을 하거나 말거나 일레이나의 몸을 구속한 봉인을 찢어발겼다. 하룻밤 사이 많이 지친 것인지 일레이나는 힘없이 허물어져 내렸고, 그는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몸을 품에 안았다.
“고생 많았어.”
“…아니에요. 또 민폐만.”
보랏빛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자신이 이곳으로 목적지를 정해놓고 이런 상황을 겪게 만들고 민폐를 끼쳐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다.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다 저놈들 탓이지.”
이진한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 의지에 반응한 공간이 요동쳤고, 곧 무채색 하늘 가운데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어.”
그 심상치 않은 전조에 말다툼하던 헨더슨과 호베르투의 몸이 경직된다.
이진한은 여전히 훌쩍이는 일레이나를 다독이며 싸늘한 얼굴로 그들에게 고했다.
“일단 심문은 반쯤 조져놓고 시작할 거다.”
귀청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뇌성이 그들 한가운데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