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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100화 (100/210)

◈ 100.

쿠궁.

마탑의 엘리베이터가 신음을 내며 상승하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는 세밀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에 본래라면 잡음 하나 나지 않은 채 고요함이 흘렀을 터.

지금은 그 안에 휘몰아치는 이진한의 기세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출렁이는 것이었다.

“…….”

칼리파는 머리채를 붙잡힌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신음을 억눌렀다.

반쯤 부러진 이빨이 덜렁거리며 간헐적으로 피가 흘러나왔지만, 이 남자는 자신이 조금이라도 소리를 낸다면 정말로 죽일 기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아프다고 곡소리를 낸다면 그거야말로 미친놈일 것이다.

딩동.

산뜻한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는 아무런 제지 없이 최상층에 도달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이진한은 발을 내디뎠고, 마찬가지로 머리채를 잡힌 칼리파 역시 일그러진 얼굴로 질질 끌려갔다.

“태초의 레어? 별….”

이진한은 문 위에 적힌 이름을 보곤 코웃음을 쳤다.

인간 주제에 대마도사에 올랐다고 자신이 드래곤이라도 된 줄로 착각하는 것인가.

초월지경에도 급이 있다. 어쭙잖은 녀석이라면 한 트럭을 모아 놓는다고 할지라도 마경에서 싸웠던 벨라시온의 콧김조차 견뎌내지 못할 것이었다.

쿵.

이진한은 거친 발길질로 문을 찼다.

그 위로 온갖 가호 마법이 걸려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발길질에 마법들이 무참히 깨어져 나가며 칼리파의 동공만 더 떨리게 했을 뿐이었다.

“아주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군. 애초에 계획된 일이라는 건가.”

안쪽으론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마탑의 크기는 작지 않았지만, 내부에 이런 초원이 있을 규모는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마법으로 공간 자체를 확장했다는 것일 터. 확실히 초월지경의 대마도사다운 스케일이었다.

물론 그것 가지고 준비니, 계획이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척.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낸 기사들이 반원 형태로 문을 포위하며 기세를 피워올렸다. 그 뒤로는 어디 교단인지 모를 성직자로 보이는 이들이 후위를 구축한바.

마법사도 아니고 기사와 성직자라는 조합은 미리 준비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조합이었다.

“그대의 이름을 듣고 싶소.”

팔라딘 중 한 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정광이 어린 눈동자와 함께 엄숙한 태도로 가볍게 성호를 그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갈루크(IGALUK) 님을 모시는 달의 교단. 그대가 악마 숭배자라는 제보를 받고 검증을 위해 이곳에 나와 있소.”

“…….”

이진한은 팔라딘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저 너머 사뭇 여유로운 태도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던 두 인영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일레이나.”

그중 하나인 이터널 학파의 학파장이자, 마탑의 탑주로 보이는 노인의 발치에는 익숙한 보랏빛 머리카락을 한 여인이 속박된 채 쓰러져 있었다.

고작 하룻밤 사이 꽤 마음고생을 한 것인지 수척해진 얼굴이다.

그녀는 입을 벙긋거리며 이쪽에 무어라 말해왔지만, 공간이 차단된 탓에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미안해요.

하지만 이진한은 어렵지 않게 그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이진한은 잠시 눈을 감으며 긴 한숨을 내뱉고는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분노가 임계점을 돌파하면 오히려 차분해진다고 했던가.

자신을 앞에 두고 무어라 떠들고 있는 팔라딘을 보아하니 오히려 유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정리해보자.’

악마 숭배자.

이들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성대하게 맞아준 것은 이쪽을 악마 숭배자라 착각하고 있어서인 듯했다.

이갈루크니, 달의 교단이니 전부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지만, 제국과 함께 움직일 정도니 제법 규모가 큰 곳일 터.

악마 숭배자라고 오해받는 것도 짚이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검호와의 싸움이나 북쪽 숲에서의 흔적을 따라 추적한다면 그리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다행이라면 이쪽은 용사 클래스가 있었다. 이토록 농밀하고 찬란한 신성력이라면 그들의 의심을 지우고, 인정받기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리라.

더군다나 지금 단계에서 제국이나 교단 같은 곳과 척지는 일은 가급 적 피해야 한다. 피해야 하지만…….

쿵.

“죽이지만 않으면 되겠지.”

조금의 마찰이 있어도 교단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이쪽이 용사라는데 어쩌겠는가.

그렇기에 이진한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앞에서 일장 연설을 이어가고 있던 팔라딘의 얼굴에 냅다 주먹을 꽂아 넣었다.

“…어, 어어어.”

오죽했으면 그 반대 손에 머리채를 붙잡혀 있던 칼리파가 더 놀랄 지경이었으니.

이진한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칼리파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뒤지기 싫으면 닥치고 있으랬지.”

“잠…!”

무어라 빌기도 전에 제 몸을 감싸는 막대한 힘에 칼리파는 비명을 내질렀다. 곧 입구를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 위로 내동댕이쳐진 그는 의식을 잃었고, 이진한은 가볍게 손을 털며 부러진 코를 부여잡고 있는 피투성이의 팔라딘을 바라보았다.

“잘나신 교단 나으리를 공격했으니 이제 빼도 박도하지 못하게 악마 숭배자가 된 건가?”

“…이놈!”

팔라딘은 조금 전까지의 엄숙한 분위기는 어디 가져다 버렸는지, 두 눈에 쌍심지를 켜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아니, 뽑아 들려 했다.

콰직.

새하얀 갑주에 휩싸인 팔이 꺾여선 안 될 방향으로 꺾여버린다. 순식간에 그 품으로 파고든 이진한이 관절을 반대 방향으로 툭 쳐 버린 결과였다.

“…끄, 아아악!”

“엄살은.”

피식 웃어준 그는 몸부림치는 팔라딘을 툭 차 제 동료들에게 굴려주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인 추한 얼굴.

다른 이들 역시 분노한 표정을 지었고, 더러는 신성력을 피워 올리며 그를 향한 전의를 불태웠다.

‘이번엔 기사들인가.’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기사들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오기 시작한다. 뒤쪽에 있던 추기경과 팔라딘이 그들에게 가호를 내려준 것인지 은은한 푸른 빛이 그 몸에 감돌았다.

수준은 대충 익스퍼트 상급에서 최상급 정도. 휘몰아치는 불꽃을 상징으로 삼고 있는 기사단인 듯했다.

“수하들 아프게 하지 말고 직접 나서지?”

이진한은 기사단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마탑주 옆에서 거만한 태도로 팔짱을 끼고 있는 거한은 그 말에 피식 웃은 채 턱 끝으로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기사들은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들고는 사방에서 그를 향해 쇄도해왔다.

“경고는 충분히 했다.”

검을 뽑을 필요도 없었다.

이진한은 가볍게 주먹을 말아쥐었고, 쏟아지는 검 사이로 가볍게 나아가며 어깨를 비틀었다.

콱-!

핏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부러진 이빨이 나부낀다. 한 명이 아니었다.

이진한이 지나친 모두 순식간에 얼굴이 뭉개지며 같은 모습으로 바닥에 엎어졌다.

“범상치 않은 상대라는 건 알았지만, 이리 가볍게 저들을 제압할 줄은.”

“아무래도 우리가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기사들의 뒤쪽으로 전열과는 확연히 다른 기세를 지닌 다섯이 있었다. 각각 휘몰아치는 불꽃의 일 번대부터 오 번대의 대장으로, 모두 소드 마스터에 이른 강자들이었다.

쉬아악-!

전열에 선 기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이진한이 두 눈을 가늘게 떴을 때, 사방에서 닥쳐 들어오는 다섯 줄기의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휘몰아치는 불꽃의 일 번대 대장….”

“휘몰아치는 불꽃이니, 일 번대 대장이니 하는 건 관심 없고.”

멋들어진 태도와 함께 자신을 소개해오려는 기사의 모습이 이진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손을 뻗었다.

옆구리며 어깨며 오러 블레이드에 휩싸인 검이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고작 소드 마스터의 공격력으로는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가호조차 꿰뚫어 낼 수 없는 노릇.

오히려 이진한은 그 안으로 몸을 욱여넣으며 자신을 일 번대 대장이라 소개한 이의 팔을 붙잡았다.

“흡!”

대장이라는 직함은 허투루 딴 것이 아닌 듯 그는 수하들과 달리 힘껏 팔을 비틀며 이진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

옆에 있던 동료들이 재차 공격해오며 가세했으나, 이진한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툭 발을 걸었다.

휘릭.

멀쩡하던 하늘과 땅의 관계가 순식간에 역전된다. 물 흐르듯 뒤바뀌어버린 머리와 다리의 위치에 기사가 두 눈을 크게 떴을 때, 이진한은 팔을 접으며 팔꿈치로 갑주의 가슴 부분을 가격했다.

콰직-!

격투가 클래스 스킬 「합기(合氣)」

제 몸을 강타한 무지막지한 충격에 일 번대 대장은 핏발선 눈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근접전은 검과 창으로만 하기에 잘 쓰지 않은 클래스이긴 했지만, 대인전 가운데 효율을 따지자면 합기만 한 것이 없었다.

순식간에 한 명을 무력화한 이진한의 손이 마치 뱀이라도 된 것처럼 바로 옆에 있던 기사의 팔을 옭아맸다.

그는 기함을 토해내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이진한의 무릎이 안면을 찍어버렸다.

“…이런!”

순식간에 대장 두 명이 무력화되었다.

즉, 자신들로는 상대할 수 없는 강자라는 것.

기사들이 그 사실을 깨달으며 주춤 물러났을 때, 거대한 궤적이 질풍처럼 허공을 가로지르며 그 사이로 들이닥쳤다.

쉬아아아악-!

이진한은 두 팔을 교차했다. 거대한 소가 들이박는 듯한 충격에 몸이 붕 뜨며 얼마간 뒤로 쭉 밀려났다.

“호오.”

하지만 상처 하나 없이 몸을 툭툭 털어내며 자세를 푸는 그의 모습에 휘몰아치는 불꽃의 부단장 헨더슨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대단하군, 맨몸으로 그걸 막다니. 과연 검은 현자의 계승자다워.”

“…….”

이진한은 가늘어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은 현자의 계승자, 그 말이 나왔음에도 다들 안색의 변화가 없다. 즉, 자신이 오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계승자라.’

또 어디에서 정보가 와전된 듯싶었다.

혹시 일레이나가 이쪽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그리 말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행색과 행적을 보고 유추한 것일까.

어찌 되었든 검은 현자의 계승자임을 밝히며 자신의 무고를 주장하려는 계획 하나는 어그러졌다.

“확실히 놀랍군. 아직 젊어 보이는데 그러한 경지라니.”

헨더슨의 옆으로 걸어 나온 호베루트는 감탄 어린 표정으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드래곤 슬레이어니 고대 악마를 쓰러뜨렸느니 어느 정도 과장이 섞여 있다는 것은 감안하더라 할지라도 지금 자신의 앞에서 풍기는 이 기세는 감히 얕볼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 한들.”

쿵.

호베르투는 가볍게 스태프의 끝으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온갖 기하학적인 문양이 그를 중심으로 떠올랐고, 공간이 요동치며 이진한을 향해 날 선 의지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대현자의 눈이 그것을 분석했다. 전체적으로는 《영원》의 것과 비슷한 술식.

후대를 표방하고 있어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몰라도 제법 그럴듯하게 흉내를 낸듯싶었다. 특히 이 공간 전부 자체가 그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아니, 이건 삼라만상을 공간이란 이름으로 형상화한 것인가.”

“오호.”

툭 튀어나온 감상에 호베루트는 입가를 늘어뜨렸다.

“그런 것도 알고 있는가. 그렇군, 자네가 《현자》의 계승자라면 나는 《영원》의 계승자라 볼 수 있지.”

짐짓 당연하단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파스스-.

순식간에 그의 모습이 분열하기 시작한다. 열, 오십, 백을 넘어선 숫자의 호베르투가 천지간에 생겨났고, 그 하나하나가 모두 상위 마법의 술식을 펼치며 이진한을 내려다보았다.

“어떠한가. 이것이 《영원》의 마법이라네. 내가 펼칠 수 있는 건 그분의 극히 일부뿐이지만. 나는 고대 영웅 중 《영원》이 최강이라 감히 선언한다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마법에 구속되어 바닥을 기고 있던 일레이나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자신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압도적인 격차.

이진한이 질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호베르투가 질서를 관장하는 「태초의 레어」에 한해서라면 그조차 승부를 장담할….

“웃기고 있네. 이게 《영원》의 마법이라고? 어설프게 겉껍데기만 흉내 낸 것이?”

이진한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수백 쌍의 눈동자를 보며 이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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