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9.
호베르투가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자 칼리파는 씩씩거리면서도 입을 닫았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올 거라는 걸 알고 계셨네요?”
“미들턴을 떠났다고 했으니 어렵지 않은 유추였지. 이리 오래 걸릴 줄은 몰랐지만.”
“아, 조금 사정이 있었거든요. 이미 아시겠지만…….”
“그 예의 드래곤 슬레이어의 파티에 합류했다고?”
“네, 하하.”
일레이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최대한 태연히 있으려 했지만, 절로 배어 나오는 자랑스러운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후학을 짓밟는 마탑의 비틀린 구조나 업계를 뒤덮은 적폐를 제외하면 호베르투라는 인물은 충분히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라 생각했다.
작금 이 시스템은 몇백 년도 더 전부터 이어진 것으로 아무리 마탑주이자 대마도사인 그라 할지라도 섣불리 손을 데었다간 큰 반발을 살 것이 분명했으니.
“제법 재미있는 경험이라도 한 듯싶구나. 차 한잔하면서 이야기해주지 않겠니. 칼리파, 너도 앉으려 구나.”
“…예.”
칼리파는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얌전히 그 옆에 앉았고 일레이나 역시 허공에 생겨난 찻잔을 쥐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론 모든 속사정을 털어놓지 않았다.
엘레오노라나 검은 현자 같은 이야기는 전부 제외했고, 세간에서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 것들로만 입에 담았다.
“흠. 필시 범상치 않은 자구나.”
“…대마도사라니. 고작 이십 대 중반의 나이로?”
호베르투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을 때 칼리파는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일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아까 내게 했던 말을 되돌려줄게. 세상이 얼마나 넓은 데 네 기준으로 재단하려고 하니?”
“…일레이나의 말이 옳다. 하지만 이 경우는 조금 특별하겠구나. 듣자 하니 그 인상착의와 능력으로 보아 블랙 워커로 예상된다고 하던데 네가 생각하기엔 어떻느냐?”
블랙 워커(Black Worker).
고대 영웅 중 한 명인 검은 현자를 섬기며 그를 모방하는 추종자들.
검과 마법을 비롯한 할 수 있는 모든 분야를 섭렵하려 하지만, 정말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별 볼 일 없는 수준이었다.
“음.”
일레이나는 말을 고르는 척 시간을 끌었다.
이미 그녀는 이진한이 검은 현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가볍게 내뱉을 만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적당히 둘러댈 내용을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계승자라 했어요.”
“계승자? 현자의?”
“네. 사실 설득력 있는 소리잖아요? 그 나이에 그만한 경지를 지닌 강자라니. 믿을 수밖에 없죠.”
“검은 현자의 계승자라니….”
칼리파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며 중얼거렸지만, 호베르투는 제법 일리가 있다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이때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다른 영웅의 계승자라 인정받은 이들이 여럿 있지 않으냐. 검은 현자는 그들에 비해 빈도도 높고 사칭도 많을 뿐이지, 그만한 능력자라면 설득력이 높구나.”
“맞아요. 제가 사람 보는 눈이 그리 좋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그럴 남자로 보이진 않았어요.”
“…….”
칼리파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당장이라도 무어라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할 말이 없는 듯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의 관계는 어떠하냐. 페르포치아 왕국 쪽에서는 연인을 가장했다던데. 떠돌이 마법사 윌리엄스라고?”
“…그건 좀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그랬어요. 그 남자의 이름은 베르너고요.”
“베르너라. 하여튼 친밀한 사이라고 생각해도 되렸다?”
“저, 아직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요?”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베르너 그 남자를 따라다니는 것 이외에도 《영원》에 관한 논문과 공부, 그리고 개인 연구도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호베르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란다. 네가 그 남자를 꿰어내기 위한 미끼로 제격인지 알고 싶었거든.”
“…예? 뭘 꿰어낸다고요?”
일레이나는 그 말이 이해가 가질 않아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하지만 호베르투는 여전히 인자한 얼굴로 어느새 불러들인 스태프의 끝을 바닥에 가볍게 찍었을 따름이었다.
촤르륵─.
룬어가 새겨진 필름이 허공에서부터 나타나 그녀의 몸을 휘감는다. 아차 하는 사이 전신을 속박당했고,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스승님?”
일레이나는 사정없이 떨리는 눈동자로 제 스승을 바라보았다.
「태초의 레어」의 질서는 그의 주도에 따라 이루어진다. 하물며 격이 낮은 마법사는 감히 이 안에서 마법을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바.
그런 가운데 어째서 자신을 속박한다는 것인가.
“널 해할 생각은 없으니 조금만 참도록 하여라.”
“스승님?!”
칼리파 역시 갑작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호베르투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인자한 얼굴로 제자를 바라보았다.
“칼리파. 너는 드래곤 슬레이어 쪽을 주시하거라. 혹여나 그가 마탑에 찾아온다면 이곳으로 안내할 수 있도록 하고. 자세한 건 사역마를 보내 알려주겠다.”
“…….”
칼리파는 입을 몇 번이나 벙긋거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스승부터 바닥에 몸부림치는 일레이나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며 손끝을 덜덜 떨었다.
마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처럼 겁에 질린 태도. 호베르투는 그런 그의 어깨를 꽉 붙잡으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너는 착한 제자가 아니더냐. 스승의 말에 따라야겠지?”
“…아, 알겠습니다.”
칼리파는 고개를 끄덕이곤 부리나케 자리를 벗어났다. 곧 그가 최상층을 벗어났을 때, 호베르투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저 아이가 너처럼 심지가 굳세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라리 귀족이 아니었더라면 조금 더 자유로이 제 재능을 펼칠 수 있었을 텐데 도리어 그 이름에 묶여 있는 꼴이라니.”
얼핏 들으면 걱정해주고 있는 듯한 어조였지만, 실상은 자신의 인형으로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해 한심스럽게 보는 표정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이러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일레이나는 온몸이 속박당해 있음에도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고개를 들어 호베르투를 바라보았다.
잠깐 사이 필사적으로 그가 베르너를 적대하는 이유를 찾으려 했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드래곤 슬레이어 정도 되는 존재라면 관계를 트기 위해 기꺼이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하지 않는가.
“음, 왔는가.”
호베르투의 말에 일레이나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설마 벌써 베르너 그 남자가 이곳의 상황을 파악하고 당도한 것인가.
하지만 대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찬란한 갑주를 착용하고 있던 커다란 풍채의 한 남자였다.
“헨더슨 경.”
“연락을 주셔서 곧바로 달려왔습니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군요.”
“적어도 하루 정도는 기다리겠지. 그리 인내심이 없는 남자는 아닌 듯 보이니까.”
헨더슨 앤드류.
제국 황실의 기사단 중 하나인 ‘휘몰아치는 불꽃’의 부단장으로, 고작 삼십 대 중반의 나이로 초월지경을 목전에 두고 있다 알려진 실력자였다.
오스칼 제국에선 몇 년도 더 전 검성의 제자로, 이진한에게 죽은 검호와 좋은 승부를 보이기까지 했으니 그 강함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째서 헨더슨 경까지.”
“흠. 애머시스트양인가. 아쉽게 되었어. 위쪽에선 자네를 황실 마도사로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패악한 무리와 파티를 이루다니.”
“패악한 무리?”
“이런. 언제까지 발뺌할 참인가. 아니라면…….”
헨더슨은 황금빛이 도는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악마 숭배자에게 물이라도 든 것인가.”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확인해본 결과 침식당한 흔적은 없으니.”
호베르투의 말에 헨더슨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말로 세뇌를 당했을 수도 있잖습니까. 사실 그 경우가 더 귀찮을 따름이지요.”
“무릇 마도사란 정신력이 강한 존재이네. 거짓에 현혹되어 넘어갔으니 그것을 바로잡아주면 되는 문제이지.”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일레이나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악마 숭배자라니. 터무니없는 오해입니다. 대체 그게….”
“더는 말하지 말도록 하여라. 이미 성국(聖國)에 확인을 끝마쳤다. 네 처우는 그 악마 숭배자를 처리한 후에 결정할 것이니 그때까지 침묵을 지켜야 판결에 불리함이 없을 것이다.”
“…….”
일레이나는 이를 악물었다.
악마 숭배자라니. 그 남자가?
‘…설마.’
설마 바포메트와 계약하고 그 힘으로 싸움에 임해서 그리 착각하는 것일까?
정말로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하나하나 설명하기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하는바.
그러기에는 검은 현자라는 이름의 무게가 가볍지 않았다.
“…아, 진짜 미치겠네.”
일레이나는 몸이 속박된 채로 초원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눈물이 절로 나올 것 같다. 더욱이 이 사태를 불러일으킨 것이 제국 수도에 오자고 제안한 자신 때문이라는 것에 더 죄책감이 생겼다.
“그래, 그렇게 얌전히 있거라. 나도 아끼는 제자를 잃고 싶지는 않으니.”
호베르투의 무심한 목소리만이 바람에 실려 흩어질 따름이었다.
***
대현자의 눈은 순식간에 해석을 마쳤다.
마탑 앞에 펼쳐진 결계는 마도사 급 정도 되는 이가 짠 술식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자신의 출입을 막는 것일까.
“일레이나가 돌아오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겠지.”
결계를 파훼하는 것은 쉬웠다.
이미 그 골조는 파악했으니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 중심이 되는 마력 회로만 건들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진한은 굳이 그렇게 얌전하게 일을 해결하기 싫었다.
“아, 잠시만 물러나요. 다칠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무고한 이들이 휘말리지 않게 하려고 뒤쪽에서 걸어오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그들을 제지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 이후 뻗은 손을 움켜쥐었고, 가볍게 숨을 뱉어내며 힘껏 허리와 어깨를 비틀었다.
콰아아아앙-!
주먹이, 결계 위를 강타한다.
그의 출입을 막기 위해 활성화되어 있던 그 투명한 벽이 충격을 이기지 못한 채 박살이 나버렸고 마치 유리가 깨어지듯 그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져 내렸다.
“꺄아악-!”
“뭐, 뭐야!”
“테러, 테러다!”
그 갑작스러운 소란에 주위에 있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친다. 더러는 경비에게 연락하기 위해 뛰쳐나갔지만, 이진한은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유유히 안쪽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탁.
그런 그의 앞으로 기다렸다는 듯 등장한 한 남자가 있었다.
연녹색 머리카락, 귀태가 나는 외모.
필시 마탑의 마법사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특이점이라면 그 눈에 진한 다크써클이 끼어있다는 것이었으나, 그리 중요한 점은 아니기에 가뿐히 무시했다.
“드래곤 슬레이어, 베르너 님 맞으십니까.”
“방금 결계, 네가 친 거지?”
“…예, 맞습니다. 저는 이터널 학파의 소속인 칼리파 더 반다이크라 합니다. 탑주님의 명령을 받아 당신을 모셔가기 위해….”
“탑주? 일레이나를 억류한 게 탑주라고?”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일레이나는 이터널 학파의 장이자 마탑의 탑주가 자신의 스승이라 했다.
그런 가운데 스승이 자신의 제자를 억류했다. 지금의 상황과 그것을 연결 지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를 불러내려고?’
“위쪽으로 모시겠….”
퍽-!
담담한 태도로 그에게 말을 하던 칼리파의 안면이 뭉개졌다.
생전 처음 느끼는 강대한 고통.
칼리파는 바닥에 자빠져 기침을 토하며 제 얼굴을 매만졌다.
“피, 피…. 이게 대체 무슨…!”
쿵-!
이게 무슨 짓이냐.
그렇게 따질 찰나, 바로 직전에 받았던 충격이 다시 한번 더 안면으로 내리꽂혔다. 칼리파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피와 함께 부러진 이빨을 뱉어내는 것이었다.
콱.
그 녹색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듯 한 손으로 붙잡은 이진한은 서늘한 표정으로 칼리파를 내려다보았다.
“뒤지기 싫으면 닥치고 있어.”
그러곤 그의 머리를 질질 끌며 마탑 안으로 들어갔으니, 주위에 있던 마법사들은 그 살벌한 모양새에 감히 반항할 생각조차 품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