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98화 (98/210)

◈ 098.

이터널 학파.

《영원》의 가르침을 받은 마법사들이 그 위대함과 유지를 기리기 위해 세운 학파였다. 마법사 학파 중 손에 꼽을 정도의 규모와 세력을 자랑하며 한 번 밉보인 자는 공식적으로 업계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을 정도였다.

일레이나는 반년도 전 그 이터널 학파의 상층부와 대판 싸운 이후 학파에서 일시적으로 제적당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탑을 나왔다.

“끙.”

일레이나는 마탑 입구로 이어지는 부지에서 서성이며 신음을 뱉었다.

근본적인 잘못은 상층부의 것이었지만, 자신 역시 잘못이 없진 않았다.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탑 내의 규율과 질서를 무시하고 들이박지 않았는가.

악법도 법이라 했으니 객관적으로 보자면 제대로 된 절차를 밟지 않고 항의를 표했으니 일시적으로 제적 처리를 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지?’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서성거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이제 꿀릴 것은 없지 않은가.

고대 영웅 중 한 명인 검은 현자라는 것은 둘째치고, 베르너는 세간에 드래곤 슬레이어로서 위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유명한 이의 동료가 되었고, 이때까지 함께 해온 일들만 보아도 업적이라 칭송받기 마땅한 일.

하지만 나올 때 난리 친 기억이 그녀의 발목을 옭아맸다.

“어? 일레이나 님?”

“…일레이나? 애머시스트님이라고?”

그러던 차 바로 옆을 지나던 한 소녀가 일레이나를 알아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일행으로 보이는 소년은 멈칫거리며 고개를 돌렸고, 함께 발걸음을 멈춰 섰다.

“캐서린, 오랜만이야.”

“돌아오셨군요!”

일레이나가 가볍게 인사하자 캐서린은 주황빛 단발을 살랑이며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안겼다.

“정말, 그렇게 떠나셔서 얼마나 슬펐는지 아세요?”

“미안해.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

캐서린은 일레이나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 수습 마법사 중 한 명으로, 마탑 내에서 친분이 있는 몇 안 되는 이였다.

그런 탓인지 자매처럼 허물없는 거리감으로 지내왔지만, 상층부와의 일이 그렇게 된 탓에 제대로 된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떠나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아, 여기는 동기인 하울이에요.”

“하, 하울이라 합니다! 애머시스트님의 명성은 이전부터 귀가 찢어질 정도로 들어왔습니다!”

“…하하, 고마워.”

군기가 잔뜩 들어간 태도로 크게 외치는 하울의 모습에 주위를 지나던 사람들이 수근거렸다.

일레이나는 이터널 학파에서도 애머시스트라는 이명을 받았을 정도로 유명한바.

그러니 그 신분이 알려진다면 주목받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잠깐 자리를 옮길까? 그간 쌓인 이야기도 있으니.”

슬슬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지자 일레이나는 마탑 앞에 있는 카페를 눈짓했다. 마침 아는 얼굴을 만났으니 마탑 내부의 소식도 들을 수 있으리라. 그러자 캐서린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하울을 바라보았다.

“들었지?”

“응, 바로 가서 자리를 맡아 놓을게!”

“아니, 너는 그대로 마탑으로 돌아가. 오랜만의 해후인데 외부인이 끼어들 셈이야?”

“…아니, 나도 마탑 소속인데.”

“어허.”

캐서린이 쌍심지를 켜자 하울의 어깨가 축 늘어진다. 곧 그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고, 일레이나는 살짝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캐서린을 향했다.

“예정이 있는 것 같은데 미안해.”

“일레이나 님이 돌아오셨는데 별건가요!”

“이제 겨우 반년인걸.”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나 그다지 안 보고 싶었던 모양이네.”

“설마요! 불초 제자! 오매불망 스승님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캐서린은 절도 있는 자세로 경례하며 자신의 마음을 나타냈다.

일레이나는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토해냈다.

이어지는 이야깃거리는 끊임이 없었다. 이 반년간 마탑에서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던바.

일레이나는 캐서린의 말에 경청했고, 끝내 한숨을 내쉬었다.

‘위쪽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구나.’

변화라고 해도 모두 효율적으로 밑의 인력을 다루기 위함일 뿐이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이 있을 때보다 더 퇴보한 듯한 느낌에 기분이 착잡해졌다.

“아, 저 연초부터 연구하던 과제가 얼추 끝났어요. 그렇지 않아도 검사받고 싶어서 언제쯤 돌아오실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오셔서 다행이네요.”

“벌써? 적어도 연말까지는 걸릴 줄 알았는데.”

일레이나는 장하다는 듯 캐서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차피 수습 마법사 과제의 확인 정도야 몇 시간 걸리지 않는다. 마탑의 복귀 신고를 마치고 살펴본다면 저녁 이전에 일을 전부 마치고 숙소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일레이나 님. 그런데 소문이 사실인가요?”

“소문?”

“그, 드래곤 슬레이어의…….”

“유클리드.”

“…….”

캐서린의 말 도중 등 뒤에서 자신을 불러오는 목소리에 일레이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살짝 낮은 중저음, 간드러진 익숙한 목소리는 마탑 내부에서도 뭇 여성 마법사의 선망을 받는 것.

하지만 일레이나는 옛날부터 그것이 그토록 느끼할 수가 없었다.

“…오랜만이네, 칼리파.”

일레이나는 앉은 채로 몸을 돌리며 뒤로 다가온 남자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윤기가 흐르는 녹색 머리카락, 살짝 날카로운 눈매, 희고 고운 피부와 날카롭게 날 선 콧대는 절로 감탄이 나올 법한 외모였다.

“돌아온 것인가? 일시 제적은 아직 풀리지 않았을 텐데.”

“내가 언제 위쪽 말에 신경 썼나. 잠깐 들린 거야. 인사차.”

“소문을 듣자 하니 드래곤 슬레이어의 파티에 들어갔다고? 너는 실전에 그리 능숙한 마도사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늘.”

“보자마자 시비야? 그리고, 실전에 능숙하지 않은 건 누군데. 마법은 둘째치고 나보다 체력이 떨어져서 원정 뛰면 매번 허덕이던 놈이.”

“…드래곤 슬레이어도 네 그 오만방자한 성격은 고치질 못했군. 스승님께서도 실망하실 것이다.”

칼리파 반 다이크.

리베라 제국에서 마법 명가로 유명한 다이크 가문의 로드로 일레이나와 같이 마탑주의 제자로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다만, 칼리파는 뼛속부터 귀족이었다. 그렇기에 평민 출신이지만, 재능 하나로 자신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리까지 올라온 일레이나를 극히 싫어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매번 눈을 마주칠 때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가.

처음엔 화가 났지만, 일레이나는 칼리파가 그냥 저런 인간인 것으로 생각하며 흘려버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올라가지, 스승님께서 부르신다.”

“내가 온 걸 알고 계신다고?”

“마탑에 계셔도 대륙 전체를 관장하실 수 있는 분이다. 대마도사의 이름을 네 수준으로 재단하려 하지 말아라.”

“…뭐, 그렇기는 하겠네.”

일레이나는 이진한을 떠올리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지식으로는 그 편린 조차 이해할 수 없는 마법들을 아이 장난감 다루듯 손쉽게 펑펑 써대는 남자가 아니던가.

자신의 스승인 마탑주 역시 대마도사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마법 하나만 따지고 보면 비슷한 경지일 터.

“캐서린.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네! 연구실에서 기다릴게요!”

일레이나는 곧 칼리파를 따라 마탑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그 입구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미운 녀석이라고 해도 안내역이 있으니 그리운 집에 돌아온 것처럼 곳곳에 반가움이 들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온 것이지? 혹시 파티에서 쫓겨나기라도 했나?”

“…너무 노골적으로 그러길 바라는 거 아니야?”

일레이나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칼리파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단지 네가 학파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았으면 할 따름이다. 그리고 드래곤 슬레이어라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허풍이 통하리라 생각하는가.”

“그래, 그렇게 생각하든가.”

일레이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끊었다.

그녀도 마경에서 이진한이 벨라시온이라 하는 블랙 드래곤과 싸워 이기는 것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이어지는 과정들은 모두 자신의 몸으로 겪으며 함께하지 않았던가. 그 난이도가 감히 드래곤을 쓰러뜨리는 것에 못지않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참고로 스승님께선 네게 연락을 취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 시기가 미들턴에서 소란이 일어났던 시기라 불발되었지.”

“뭐, 그런 난리였으니까.

“듣기로는 마왕을 섬기는 교단의 소행이라던데.”

“꽤 자세히 알고 있네? 나 걱정했나 봐?”

“누가!”

놀리는 듯한 그 말에 노성이 토해져 나왔다.

일레이나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 우뚝 멈춰 선 칼리파를 바라보자, 그는 시뻘게진 얼굴로 두 눈을 부릅떠 왔다.

“누가 너 따위를 걱정했다는 것이냐.”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그냥 농담이지. 너 설마 나 좋아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거라면 버리고 가겠다.”

“네네.”

일레이나는 왜 저러냐는 듯한 시선으로 성의 없는 대답을 내뱉었고, 칼리파는 잔뜩 성이 난 듯 거칠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탑에는 마력으로 움직이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위로 둘이 탑승하자 엘리베이터는 쉬지 않고 올라갔고, 얼마간의 상승 끝에 최상층에 다다랐다.

“스승님. 유클리드를 데려왔습니다.”

어디 왕궁의 궁전 같은 화려함이 주위를 뒤덮고 있었다.

칼리파가 커다란 대문 앞에 서서 그리 고하자, 양옆으로 열리기 시작하며 내부의 풍경을 드러냈다.

‘여긴 여전하네.’

일레이나는 가늘어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태초의 레어」

이터널 학파의 정점.

마탑의 탑주, 진리를 꿰뚫는 자.

갖가지 이름을 지닌 대마도사가 기거하는 곳으로 출입이 허락되는 이는 극소수일 뿐이었다.

일레이나는 처음 탑주의 제자로 발탁되었을 때 그보다 기쁜 일은 없었다. 수련은 혹독했고, 해야 할 것도 많았으나 《영원》의 계보를 잇는 위대한 대마도사가 되겠다는 일념하에 버텼다.

‘어리석었지.’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마탑과 학파를 뛰어넘어 온 대륙을 휘감으며 업계를 아우르는 적폐는 바로 이곳부터 시작되었노라고.

“가지.”

“…응.”

레어 안으로 들어가자 순식간에 공간이 뒤바뀌며 칙칙한 마탑의 내부가 아닌 끝없이 펼쳐진 널따란 초원이 그들을 반겼다.

극한에 이른 환상은 현실과 구분할 수 없다. 그 기본적인 이론을 아주 충실하게 이룩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오랜만이로구나.”

그 가운데서 느긋하게 앉아 다과를 즐기던 노인이 일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성성한 백발에 이마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그럼에도 노인답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그 전신에서 느껴지는 강한 기백 때문일까.

일레이나는 압도된 채로 천천히 걸어갔다.

“오랜만이에요, 스승님. 그간 잘 지내셨죠?”

“못 된 제자 한 명이 말썽 피우는 바람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칼리파 또 무슨 말썽을 피운 거야? 그러니 잘 좀 하라니까.”

“내 이야기가 아니질 않느냐.”

칼리파는 존경해 마지않는 스승의 앞이라 그런 것인지 이를 악물면서도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이터널 학파의 장이자, 마탑의 주인, 대마도사 호베르투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런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여전히 서로 잡아먹지 못하여 안달이느냐.”

“저는 잘못한 거 없어요. 칼리파가 맨날 평민이라고 구박해서 그렇지.”

“내가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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