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7.
“제국 암부가 자신의 세력과 함께 제국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려던 그들의 신형을 확보했습니다. 수호 기사인 미르엘은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 엘레오노라 황녀는 수도로 이송 뒤에 광장에서 반역의 죄를 물어 남은 잔당과 함께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식을 거행했지요.”
“즈, 즉결 처형….”
“처, 처형식….”
미르엘과 엘레오노라는 멍한 표정으로 그 말을 읊조리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들은 여기 멀쩡히 있는데 처형이 웬 말이라는 것인가. 황급히 서류를 뒤져보자 정말로 그곳에는 세세히 적힌 기록들이 처형 당시의 때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의 머리카락이…….”
길레아테의 두 눈이 가늘어진다. 그것에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긴장했지만, 이어지는 말에 벙찐 표정을 지었다.
“진짜라고 생각할 만큼 자연스럽게 되었군요. 저는 머리가 없어서 애초에 생각은 없었지만, 요즘 유행이 흘러가는 건 모르겠습니다.”
“…유행이라뇨?”
이어지는 말 하나하나 모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엘레오노라가 조심스레 묻자 그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저었다.
“하하, 아닌 척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엘레오노라 황녀와 수호 기사 미르엘의 스타일을 따라 하는 건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어쩐지.”
이진한은 어처구니가 없는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이곳으로 오기까지 상당한 빈도로 그들의 색을 닮은 주홍빛과 백금의 머리카락을 지닌 이들과 마주쳤었다.
워낙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이리라 평균적으로 많은 것이리라 생각했지만, 지금 떠올려 보면 분명 그 숫자는 이질적이었다.
“유행이라니.”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살짝 우울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길레아테는 용사 관련 정보 수집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죽은 사람을 만들어 놓겠다는 건가요. 뭐, 그것까진 이해가 가지 않는데 저와 미르엘의 머리카락 색이 유행하다니.”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간에서는 역도로 몰려 처형당한 것인데 그 차림새가 유행하다니.”
“…여기 쓰여 있네.”
이진한은 탁자 위에 널브러진 서류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오스칼 제국 발 기이한 유행에 관한 고찰」
엘레오노라 황녀와 수호 기사 미르엘.
제국의 역도로 처형당한 그들이 어째서 젊은이들의 유행이 되었는가.
그 발단은 익명의 소설가가 낸 짤막한 작품에서 기인했다.
권력에 욕심이 멀어 황제를 독살하려 했던 악녀와 어릴 적부터 충심과는 또 다른 마음으로 그녀를 섬겼던 기사의 애틋한 관계.
소설이었지만, 실제 서사를 담았기에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고, 풍부한 감정선을 끌어내는 필력은 짙은 호소력으로 금기를 범한 악녀와 섬기는 주인을 사모하는 기사 간에 이루어지는 금단의 사랑을 담아내었다.
반권 남짓한 이 짧은 소설은 제국 내에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일주일 사이에 수많은 나라로 수출.
동, 서 대륙을 가리지 않고 인기를 끈 탓에 막중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물론 오스칼 제국에서는 금서(禁書)로 지정되어…….
“음.”
더 읽을 필요가 있을까.
이진한은 미묘한 감상과 함께 고개를 들었고, 시뻘게진 얼굴로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는 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어찌 파렴치한.”
“제, 제 충성심이 금단의 사랑으로….”
엘레오노라는 졸지에 기사를 탐한 주인이 된 것에, 미르엘은 자신의 충성심이 금단의 사랑으로 뒤바뀐 것에 상당한 충격을 먹은 듯했다.
“뭐, 충격은 받았겠지만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니야.”
“…어디가 나쁜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죠. 저는 희대의 악녀도 모자라 이제 자신을 섬기는 기사의 몸을 탐한 타락한 여인이 되었는데요.”
엘레오노라는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였다.
미르엘은 이미 혼이 나가버린 듯 소파에 기댄 체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되도 않는 이야기가 쓰인 서류를 펄럭거렸다.
“오명은 어찌 되었든 공식적으로 너희는 처형당한 거잖아? 이게 뭘 뜻하겠어?”
“어, 제국의 분노?”
“죽었다는 거지.”
“…당연한 것 아닌가요? 처형당했는데.”
“제국이 왜 굳이 이런 짓을 했을까. 정말로 죽이고 싶은 거라면 이런 쇼를 할 필요가 없는데.”
그 물음에 엘레오노라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가설이긴 하지만, 이쪽을 쫓지 않겠다는 걸 돌려 말하는 거겠지. 그러면서 자신들과 적대하지 말자고 손을 내미는 건가?”
“그런 것 치고는 파장이 심상치 않지만 말이에요.”
“설마 그것까지 의도하진 않았겠지. 그들에겐 득 될 것이 없으니. 실제로 서적도 금지했고.”
이진한은 미간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제국에 있어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그리 중요한 인사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제거하려 했던 것은 황실 뒤에 마족이 있다는 비밀을 깨달았기 때문일 터.
제국 내에 있을 때는 큰 힘 들이지 않고 쫓을 수 있겠으나, 자신이 합류하면서 이야기는 크게 달라졌다.
“원래라면 네가 마르딘 공작에게 합류하는 순간 끝나는 이야기였겠지. 공작에게 오스칼 황실이 마족과 결탁했다고 말했지만, 결국 믿어주지 않았잖아?”
“그랬었죠. 베르너 님이 아니었더라면 이 기록이 사실이었겠죠.”
“하지만 지금 내가 너희들 곁에 있다. 제국 암부도 괴멸 수준으로 쓸려버렸고, 검성의 제자인 검호도 날 꺾지 못해 쓰러졌지. 그러니 그 이상의 전력을 투입하지 않는 이상 날 어찌 못한다는 걸 깨달은 거지.”
“…그래서 저를 처형하는 것으로 제 발언이 줄 영향력을 없앴다?”
“드디어 머리가 돌아가네.”
그래도 한동안 지켜봐야겠지만, 이제 여기까지 온 이상 오스칼 제국에서의 위협은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터.
“그나마 다행이군요. 치욕적이긴 해도 엘레오노라 님께서 안전해지실 수 있다면.”
“미르엘….”
어느덧 정신을 차린 미르엘이 굳건한 표정으로 말해왔다. 엘레오노라는 기꺼이 오명을 감수하겠다는 그녀의 의지에 감동하였는지 두 손을 붙잡은 채 다시금 눈물을 글썽이고 있던바.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이진한의 시선은 슬쩍 「오스칼 제국 발 기이한 유행에 관한 고찰」의 내용이 쓰인 서류 위로 향했다.
‘…진짠가?’
물론 그 의문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
길라아테는 곧 용사에 관한 정보들까지 전부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오스칼 제국의 정세에 관한 것과는 반대로 수백 장에 달할 정도의 방대한 양인바.
이 자리에서 확인할 만한 양이 아니었기에 이진한은 모조리 인벤토리에 보관한 뒤 아레나 길드를 나왔다.
이제 겨우 정오가 지난 시각이었다. 근처에서 점심을 해결한 그들은 내친김에 수도 관광에 나섰고 몇 시간 동안 알차게 돌아다녔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조금 이른 저녁까지 해결한 뒤 숙소로 돌아오자 엘레오노라는 살짝 지친 표정으로 소파에 몸을 뉘었다.
“종일 돌아다녀서 그런지 피곤하네요. 오늘 밤은 푹 잘 수 있겠어요.”
“일레이나는 아직인가? 마탑 쪽 일이 하루이틀로 끝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며칠은 푹 쉬면서 이렇게 보내자.”
“그렇습니까.”
미르엘은 프로스트의 새 검집을 쓰다듬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프로스트는 기본적으로 냉 속성을 띠었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검집으로는 보관이 어려워 난항을 겪었으나, 과연 폴포아르텔은 서대륙 최고의 도시라는 수준 답게 그에 걸맞은 검집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덕분에 돈은 꽤 썼으나, 한 점의 후회도 없는 지출이었다.
“그럼 다들 쉬어. 나도 할 일이 있으니.”
“용사에 관한 이야긴가요. 저도 나중에 읽어봐도 되나요?”
“다 읽고 알려줄게.”
이진한은 느긋이 목욕한 이후 도시의 전경이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아레나에서 받아온 용사에 관한 기록을 읽었다.
“용사, 마왕이 강림하거나 마계가 중간계를 침공할 때마다 여신의 선택을 받은 이를 일컫는다. 그는 보통…….”
아주 기본적인 이론부터 시작해 각 시대별로 나타난 용사들의 행적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그 중간중간 소실된 것들이 없잖아 있었지만, 딱히 중요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기에 훌훌 넘겨버렸다.
“…음.”
그렇게 수십 단락 중 하나를 전부 독파한 이진한은 눈가를 매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하늘 위에 걸린 달이 어느덧 저편으로 기울어가기 시작한 깊은 밤. 테라스의 문가로 기웃거리던 인기척을 느낀 것이었다.
“베르너 님? 방해한 건 아니죠?”
“어. 괜찮아. 막 하나 다 읽은 참이었어.”
엘레오노라의 등장에 너도 이곳에서 쉬러 온 것이냐 물으려 할 찰나, 그녀의 표정이 살짝 좋지 않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게 아직 일레이나가 돌아오지 않아서요.”
“…아직도?”
이쪽이 서류를 읽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알아서 어련히 쉬러 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밤이 이토록 깊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혹시 사람을 보냈었나 밑에 물어봐줄래?”
“그렇지 않아도 확인하고 오는 참이에요. 마탑에서 온 전령은 없었어요.”
피치 못할 사정으로 늦어진다면 알려오지 않을 만큼 센스 없는 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의 상황이 자의가 아닐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었다.
“…….”
이진한은 서류를 내려놓고 밖을 바라보았다.
밤의 도시는 낮보다는 덜 했으나 여전히 찬란한 빛을 흘리고 있다. 그는 잠시간 고민하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엘레오노라를 향해 말했다.
“일단 괜히 소란 피울 이유는 없으니까 내일 날이 밝으면 확인해보자.”
“그런가요. 베르너 님도 좋은 밤 되세요.”
엘레오노라는 여전히 걱정되는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제 방으로 물러났다.
이진한 역시 마음에 걸리는 것은 마찬가지.
하지만 자신이 속한 이터널 학파의 마탑에서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싶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밤은 저물었고, 일레이나는 다음날 정오가 지나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듣자 하니 마지막에 마탑을 나올 때 윗사람들이랑 싸우고 온 것 같은데.”
“일레이나도 아마 돌아가면 한 번 더 푸닥거리할 것 같다고 이야기하긴 했습니다.”
“음.”
점심 식사 이후, 이진한은 고민에 잠겼다.
괜히 불쑥 찾아갔다가 소란이라도 일어난다면 일레이나에게 피해를 줄 것 같아서 참으려 했지만, 여기까지 왔으면 많이 참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일단 나 혼자 보고 올게. 너희까지 같이 갔다가 무슨 소란이라도 나면 골치 아파지니.”
“그럼 저희는 근처에 있을게요.”
“어. 무슨 일이 일어나면 바로 도망갈 준비 하고.”
이진한은 곧 준비를 끝내고 숙소를 나섰다.
살짝 걱정은 되었지만,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그렇기에 애써 심란함을 떨치며 도시 가운데 높이 솟아 있는 마탑으로 향했고, 그 부지 안으로 발을 내디뎠…….
턱.
“…어쭈?”
마탑 입구 쪽의 부지는 개방된 공간이었기에 수많은 사람이 드나들고 있다.
하지만 이진한이 그곳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에게만 마치 보이지 않는 장벽이 생겨난 듯 진입을 막고 있었다.
“……?”
이진한이 입구에서 멀뚱히 서 있자 뒤에서 걸어가던 사람이 그를 흘깃 바라보며 태연한 모습으로 안쪽을 향해 들어갔다.
동시에 그 역시 다시 발을 내디뎠지만, 입구를 막고 있는 장벽은 여전히 그곳에 존재한 채였다.
다른 사람은 통과시키며 명백히 자신의 출입만을 거부하는 결계.
이진한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위로 손을 짚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가급 적이면 소란을 피우지 않겠다고 일레이나와 약속했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