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6.
갑작스럽게 성문 앞으로 떨어져 내린 불덩이에 도시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때까지 놀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군대는 재빠르게 무장을 마친 채 싸울 준비를 끝냈고, 신성 왕국의 사제들과 성기사들 역시 성전(聖戰)의 결의를 마쳤다.
성벽 위에는 정체 모를 적에 대한 긴장 어린 분위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을 때, 신성 교단을 뜻한 흰 성복(聖服)을 입은 네 명의 인원이 유유히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고작 흰 성복만 둘러 입은 건데 아무도 제지하지 않네요.”
일레이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큼 신성 왕국의 입김이 세다는 것이겠지.”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텔레포트 게이트의 위치를 가늠했다.
성벽을 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예상대로 성문 앞에 마법을 꽂자 사람들이 그곳을 몰렸고, 그들은 마법으로 몸을 숨긴 채 취약한 부분을 공략했을 뿐.
당연히 마법적 조치도 되어 있었지만, 대마도사의 은신을 감지할 만큼 높은 수준은 아니었다.
“말들은 잘들 도망갔겠죠?”
“애초에 북쪽 태생이라 추위에 강하다니 알아서 잘 크겠지.”
마차를 끌던 말들은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마차는 미들턴부터 사용하던 것으로 이진한이 이런저런 가호와 기능을 덧붙인 특제품이었기에 버리지 않고 아공간에 수납하는 것으로 보관했다.
“저기네. 멀리도 있군.”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자 텔레포트 게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도심 한가운데 있기에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는바.
하지만 성복을 뒤집어쓴 그들이 다가가자, 게이트를 관장하는 마법사는 정중한 태도로 그들을 맞이했다.
“성국의 분들이십니까.”
“모두 넷입니다. 빠르게 게이트를 이용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목적지는 리베라 제국의 수도인 폴포아르텔입니다.”
이진한은 사뭇 정중한 태도로 마법사에게 물었다.
“이쪽은 들어온 이야기가 없는데 혹시 허가증을 가지고 계십니까?”
전시 중이라 텔레포트 게이트는 군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설사 성국이라 할지라도 그 자격에 허가가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물론입니다. 다만, 이쪽은 극비 임무인지라.”
이진한은 옅은 미소와 함께 품에서 양피지 꾸러미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을 받은 마법사는 내용물을 보고 두 눈을 크게 뜨더니 슬쩍 주위를 둘러보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받았습니다. 곧바로 오르시지요.”
“주신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그는 가볍게 성호를 그리며 신성력으로 마법사에게 가호를 내려주었다. 일말의 의심조차 씻어내리는 거룩한 모양새. 일레이나는 평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 태도가 웃긴 것인지 얼굴을 가린 채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 편안한 여정이 되시길.”
웅웅─.
텔레포트 게이트가 빛을 발하며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잠시간 생긴 여유 가운데 엘레오노라는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언제 문서까지 위조하신 거예요?”
“위조? 뭘?”
“방금 마법사에게 건넨 문서 있잖아요. 설마 그 짧은 사이에 거기까지 생각하고 계신 줄은 몰랐어요.”
일레이나나 미르엘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둘다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과연 고대 영웅 정도 되는 이라면 그 정도 철두철미함은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하지만 이진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별거 아니라는 얼굴로 답했다.
“그거 그냥 양피지 꾸러미 안에 금덩이 하나 넣어서 준 거야.”
“…예?”
예상치 못한 대답에 엘레오노라가 살짝 멍한 표정을 지었을 때, 전이가 이루어졌다. 눈 부신 빛이 주위를 감쌌고, 그들을 둘러싼 좌표는 순식간에 수천 킬로미터를 건너뛰었다.
“제국 수도 ‘폴포아르텔’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쪽의 텔레포트 게이트를 관리하는 마법사가 반갑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이진한은 일행 가운데 제일 먼저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그러자 눈 부신 햇살과 함께 발아래로 넓게 펼쳐진 서대륙 최고의 도시가 주는 장엄함이 두 눈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단하네.”
“그렇죠?”
뒤이어 따라 나온 일레이나가 작게 웃으며 사뭇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내밀었다.
“이전에도 몇 번 왔었지만, 항상 느끼는 게 저쪽 제국이랑은 딴판이라는 거예요. 조금 단적으로 말하자면 분위기가 정 반대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전체적으로 더 둥글고 화려하다는 평이 강하지요.”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이전에 몇 번 온 적이 있는 것인지 익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감상엔 이진한 역시 동감이었다. 그가 기억하기로 오스칼 제국은 수도 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조금 뾰족한 느낌의 구조물들이 많았다.
절제된 미술이니 뭐니 하면서 디자인적으로 극찬을 많이 받은바.
하지만 리베라 제국의 수도인 폴포아르텔은 폭발적인 화려함의 극치였다. 눈에 띄는 곳 전부 사소한 곳 하나부터 고급스러움이 흘러내렸고, 오스칼 쪽과는 달리 꽤 공을 들여 디자인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는 추천하는 곳 있어?”
“마음 같아선 마탑에 머물게 해드리고 싶은데, 제가 일단은 제적당한 몸이라서요.”
“상관없어. 그쪽은 네 일이 끝난 이후에 놀러 가지 뭐.”
그들은 곧 텔레포트 게이트를 빠져나와 시가지로 접어들었다.
이쪽 거리만 해도 족히 수백, 수천이 넘는 인파가 돌아다니고 있다. 그렇다 한들 수도 전체로 보자면 티끌에 불과했기에 폴포아르텔이 얼마나 거대한 규모인지 가늠조차 힘들었다.
“숙소는 이곳을 추천해 드려요. 마탑을 찾아오시는 분들도 자주 애용하시는 곳이라 부족한 건 없을 거예요.”
일레이나가 안내한 곳은 폴포라르텔의 서쪽 구역 베아트리체의 길이라 불리는 거리에 있는 한 고급 여관이었다.
「하기스의 편안함」
“…….”
그녀가 자부한 대로 건물의 외관은 다른 곳들보다 한층 더 고급스러움이 감돌았지만, 간판 위에 적힌 이름에 이진한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아니, 편안하기는 엄청 편안할 것 같아서.”
노린 것인지 우연의 일치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여튼 그는 제법 비싼 값을 주고 방 네 개가 딸린 최상층의 스위트 룸의 예약을 마쳤다.
“저는 일단 마탑에 얼굴을 비추고 올게요. 당신들은요?”
“하던 대로 정보를 수집해야죠. 수도인 만큼 더 다양한 정보가 돌아다닐 테니.”
엘레오노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마르딘 영지에서 그만한 소란을 벌였다. 더불어 제국 암부의 수뇌를 비롯한 주축 전력이 이쪽의 손에 쓸려나간바.
제국 입장에선 치욕스러운 일일 테니 무슨 수작을 꾸며와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도 같이 가지. 알아볼 것도 있으니까.”
다음 목적지의 정보와 더불어 새로이 각성한 「용사」라는 것에도 아직 여러 의문점이 많았다.
‘월드’ 내에서 용사라는 이름의 클래스는 없었다. 보통은 큰 공을 세우거나 업적을 달성한 이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했을 뿐, 그가 기억하기에 그 이외의 쓰임새는 존재하지 않았다.
‘성직자 클래스의 초월지경은 분명 교황이랑 성인뿐이었는데.’
「불굴의 가호」
「세릴다의 성가대」
「신성의 증명」….
클래스 스킬 역시 생전 처음 보는 것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중 불굴의 가호만이 메피스토와의 싸움에서 발동되었다. 성인(聖人) 클래스를 흰색 바퀴벌레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한 디바인 필드와 비슷한 스킬로 일정 시간 동안 적에게 입은 피해와 데미지가 순식간에 치료되는, 과연 초월지경이라 할 수 있을 법한 능력치였다.
‘다른 나머지는 눌러봐도 잠잠하네. 발동 조건이 뭔지 감도 안 잡히고.’
대현자의 눈 역시 용사 클래스를 분석하려 해도 아무런 데이터가 없다고 표시되었다. 그러니 혹시 있을지 모를 이쪽 세계의 기록에 의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럼 늦어도 저녁까진 돌아올게요. 아마 저쪽에서 식사하고 올지 모르니까 먼저 드세요.”
“그래, 무슨 일 있으면 부르고.”
일레이나가 마탑으로 떠난 뒤, 이진한을 비롯한 그 셋도 정보 길드인 아레나의 폴포아르텔 지부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이전처럼 변장은 안하셔도 괜찮겠어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해서 오히려 마법으로 바꾼 게 더 어색할걸?”
엘레오노라의 물음에 이진한은 곳곳을 돌아다니는 경비병과 순찰대에게 눈짓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과연 제국이란 위명답게 한명 한명 착용하고 있는 장비가 예사롭지 않다. 더군다나 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지닌 아티팩트라면 마법의 변장 정도는 손쉽게 꿰뚫어 볼 터.
물론 그것만 가지고 무엇을 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쓸데없는 의심을 자처할 필요는 없었다.
“흑발인 사람도 많네.”
“거기에 흑안인 건 베르너 님뿐이지만요.”
엘레오노라가 작게 웃었을 때, 거리를 유심히 지켜보던 미르엘이 손을 뻗었다.
“아레나의 표식입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었군요.”
“이곳도 꽤 규모가 크네.”
데메드리오 왕국 쪽에서와 같이 아레나 길드는 이곳에서도 주점을 겸하고 있었다.
아직 낮임에도 불구하고 안쪽은 제법 북적인다. 이진한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곧바로 카운터로 향했다.
“주문받지.”
“성급한 형씨군. 아직 일행들은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
이진한은 카운터 위로 작은 패를 내밀었다.
일전 길드장 아레나와 만났을 때 받은 것으로 아레나의 중요 손님을 뜻한다는 증표라고 했었다.
“…2층으로 모시겠습니다.”
민머리의 거한은 살짝 크게 뜬 눈으로 그것이 진품임을 확인하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진한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일행에게 눈짓하며 계단 위를 올랐다.
문이 열린 방은 하나밖에 없던 차. 그곳으로 들어가니 곧이어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거한이 뒤따라 들어왔다.
“이 지부의 마스터였나?”
“아레나 길드 폴포아르텔의 지부의 마스터를 맡은 길레아테라 합니다.”
길레아테는 사뭇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이진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것을 받아주고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며 손짓했다.
“원하시는 정보가 있으십니까.”
“최근 한 달, 오스칼 제국의 정세. 황실 위주로 축약해서. 그리고….”
“그리고?”
“용사에 관해.”
이어진 말은 엘레오노라와 미르엘 역시 의외의 것이었기에 의문이 들었으나, 외부인 앞에서 동요를 드러내지 않았다.
길레아테는 용사라는 이름을 듣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전자는 오 분이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후자는 모호하군요. 원하시는 부분이 어딘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역대 용사라 불렸던 이들에 대해서 부탁하지. 중심으로 삼을 것은 그들의 행적, 업적, 능력. 이 세 가지다.”
“명확해졌군요. 그 부분은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걸릴 듯합니다.”
“부탁하지.”
“그러면 일단 오스칼 제국 측의 정보부터 추려오겠습니다.”
길레아테는 자신이 말한 대로 오분도 채 지나지 않아 양피지 꾸러미를 가져왔다. 대략 열 장 정도로 이루어진 묶음으로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은 각각 그것을 받아들고 열심히 읽어나갔다.
“우선 굵직한 이야기 정도만 간추려서 이야기하자면, 엘레오노라 황녀의 처형 건이 있겠군요.”
“…예?”
길레아테의 말에 서류를 읽던 엘레오노라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