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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95화 (95/210)

◈ 095.

디르텔은 마르딘 영지에 포함된 열댓 개의 도시 중 가장 말석에 위치했다.

규모도 그리 크지 않고 딱히 특산품은 없었지만, 그 앞으로 넓게 펼쳐진 오르바 호수의 전경은 제국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절경으로 유명한 곳.

즉,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유동 인구가 많아 조용히 숨어들기에 적격인 장소였다.

그렇기에 신성 왕국 소속 이단심문의 비밀 결사인 유리아가 그곳을 행선지로 택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감사를.”

한적한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그녀는 입가를 닦으며 짤막하게 감사의 기도를 마쳤다.

미들턴에 있을 때보다 살짝 길어진 푸른 머리카락이 살랑인다. 슬쩍 그것을 매만진 그녀는 슬슬 잘라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했다.

“식사는 만족스러우셨습니까.”

“맛있게 먹었습니다. 주인장에게 감사를.”

또 한 번의 감사와 함께 계산을 마친 유리아가 식당을 나오자 정오에 이른 햇살이 그녀의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이 또한 주신의 은혜. 살포시 성호를 그은 유리아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조사하고 싶은데, 분위기가 영 뒤숭숭하니 아쉽네.”

그녀는 이진한의 뒤를 쫓아 이곳 마르딘 영지까지에 당도했다.

그가 이곳에 온 연유는 알 수 없었으나, 큰 소란이 있었던 것까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무려 오스칼 제국의 검호(劍虎)까지 엮인 큰 싸움.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소문조차 퍼지지 않은 듯 이 전역은 잠잠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통제를 했다는 것인데.’

혼자의 힘으로는 조사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싸움의 승패도 알지 못했고, 드래곤 슬레이어의 행적조차 뚝 끊겨 버렸으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

그러던 차 유리아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거리의 끄트머리서부터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신을 쫓아오는 이들이 있음을 눈치챈 것이었다.

그녀는 곧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머지않아 자신의 앞길을 막아서는 괴한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슥.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지만, 팔라딘인 그녀에게 이 정도 적이야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가볍게 숨을 토해내며 검을 뽑아 들 찰나, 괴한들이 물러나며 누군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도미니온. 성국의 사냥개가 이곳은 어떤 일이지?”

“…….”

정체를 간파당했다.

그 사실에 유리아는 태연한 기색을 가장하며 상대를 살폈다. 적어도 다짜고짜 공격해오지 않았다는 것은 적어도 대화를 나눌 최소한의 의지가 있다는 것일 터.

짤막한 침묵 가운데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던 그녀는 이내 자신을 둘러싼 이들의 후보군을 좁힐 수 있었다.

“…제국의 그림자인가. 어째서 당신들이 여기에?”

“하하, 이단들을 상대해서 그런가. 눈치 하나는 발군이로군.”

괴한은 로브를 벗었다.

창백한 피부에 잿빛 머리카락. 왼쪽 눈동자를 세로로 가로지르는 흉터가 인상적인 외모의 남자였다.

‘제국 암부.’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사실에 유리아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오스칼 제국의 암부. 황실의 명령으로 그들의 더러운 뒷일을 책임지는 조직으로, 그 명성은 도미니온인 그녀 역시 귀에 박히도록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쪽의 질문에 답해주시겠나.”

“순례의 여행차 왔을 뿐이다.”

“라는 것을 믿으라는 건 아니겠지?”

날카로운 살기가 골목을 둘러싼다. 피부 위로 쏟아지는 찌르는 듯한 기세에 유리아는 천천히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성국과 척지겠다고?”

“성국 따위로?”

“자신감이 크군. 제국 내에도 성국의 신도들이 몇 명이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그걸 허용한 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신도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면 자비로운 황제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도록 하여라.”

한치의 밀림 없는 공방이었다.

숫자는 상대가 훨씬 많았지만, 유리아는 딱히 두렵지 않았다. 팔라딘인 자신이라면 어렵지 않게 이 자리의 모두를 쓰러뜨리고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을 터.

하지만 제국과 척지게 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성국이라 할지라도 동대륙의 패자인 오스칼 제국과 대립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

도미니온으로 독실한 신앙을 지닌 그녀에게 있어서도 성국이 힘들어지는 것은 사양이었다.

“…정말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저 한 남자의 뒤를 쫓아 이곳에 왔을 뿐이야.”

유리아는 항복이라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답했다.

암부의 남자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뒤쪽의 수하를 향해 손짓해 무언가를 받았다.

“이 남자인가?”

“…맞네.”

두 사람의 인상착의가 그려진 수배지였다.

보기 드문 검은색 머리카락에 그보다 더 보기 드문 흑안까지.

그 옆으로는 페르포치아 왕국에서 사칭했던 금발 머리 형태의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이유는?”

“이유까지 알아야 하나?”

“계속해서 말꼬리를 물겠다면…….”

“정말 성급하기 짝이 없네. 좋아, 다 말할게.”

한숨을 푹 내쉰 유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성국은 이 남자가 어느 마왕의 교단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유추했다. 실제로 그가 가는 곳마다 여러 전란이 일어났지. 페르포치아 왕국의 미들턴이나 수도인 그르노블에선 유력한 정황까지 발견할 수 있었으니.”

“즉, 사로잡기 위해?”

“오만한 생각이로군. 지금까지 보인 행적만으로 보아 그 능력은 평범한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었다. 악마. 그래, 마계에서 소환된 악마가 그 몸에 깃든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군.”

그 정도로 터무니없다는 이야기였다.

유리아는 긴장을 감추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베르너라는 남자가 용사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은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대륙 곳곳에 마왕을 섬기는 교단 세력이 만연한 상황.

그러니 최대한 그 사실을 숨겨야 함이 옳았다.

“흠.”

“…그러면 이번엔 이쪽의 질문에 답해주겠나? 그 남자는 이곳에서 검호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고 하던데.”

암부는 침묵했다.

설마 이제껏 이쪽의 심기를 실컷 건드려왔으면서 고작 그 말 한마디로 공격해오는가.

유리아가 슬쩍 몸을 낮췄을 때, 남자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검호는 죽었다, 그의 손에.”

“…뭐?”

“베르너라고 했지. 그 드래곤 슬레이어의 일행으로 있는 것은 본국의 배반자인 엘레오노라 황녀와 그 수호 기사인 유클리드 경이다.”

쏟아지는 정보들에 유리아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이 샅샅이 조사해도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이다. 암부 내에도 극비로 취급되는 정보일 터.

그것을 자신에게 말해주는 저의가 무엇인가.

“…잠깐. 엘레오노라 황녀? 그녀는 얼마 전에 잡혀서 처형당해 죽었다고 들었는데.”

“요식 행위지. 제국은 그녀의 추적을 포기했다. 그것 하나에만 집중하기엔 할 일이 많아서 말이야.”

“흠.”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비사.

유리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것을 이쪽에 맡긴다?”

“나는 그저 알려주었을 뿐이다. 제국에 있어서 엘레오노라 황녀는 이미 처형당해 죽은 존재. 그 사칭이야 어디든 있을 수 있으니 상관하지 않는다.”

남자는 그것을 끝으로 손을 휘젓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남은 암부의 인원들 역시 전부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을 때, 유리아는 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엘레오노라 황녀라니. 제국 내에서 그녀의 마지막 행적은 근원의 마탑이었다. 마경 벨데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셋이 함께라고 했으니 최소한 그 직전부터 함께했다는 것일 텐데.”

설마.

근원의 마탑, 블랙 워커…?

머릿속을 스치는 실낱같을 가능성이 그녀는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갔다.

***

【575:18:25】

노스 벨헤드렘과 제일 가까운 도시까지는 이틀의 시간이 걸렸다.

일 년으로 따지자면 이제 겨우 여름이 끝났을 터이지만, 북쪽 지방이라 그런 것인지 새하얀 눈이 잔뜩 쌓여 어딜 가나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다.

다른 점이라면 이웃 도시 미아고는 노스 벨헤드렘에서 일어난 소란 때문에 아직 그 분위기가 상당히 나쁘다는 것이었다.

저쪽의 수습이 끝나지 않은 것인지 신성 왕국의 인원들이 도시 한 구역을 차지한 채 빼곡히 자리했고, 근처 영지에서 보내온 지원군도 성벽을 지키며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했다.

“함부로 다가갔다간 공격받을 것 같은데.”

이진한은 마차 난간에 기대 성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본래라면 설화석이나 다른 부가적인 것들을 얻기 위한 행상으로 빼곡해야 할 성문 입구는 철저한 경계 속에 둘러싸여 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다가갔다간 필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할 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성으로 들어가기 어려워 보였다.

“어쩌죠? 이 다음 도시까지도 사흘은 더 걸릴 텐데.”

“거기도 들어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군요.”

일레이나와 엘리오노라 역시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차라리 상황이 전부 수습될 때까지 숲에서 기다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다시 돌아가자고?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미르엘의 제안에 이진한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의 유예가 500시간을 돌파해 사뭇 여유가 생겼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늦장을 부릴 정도는 아니었다.

‘한 몇천 시간 정도 생긴다면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정면으로 닥쳐 들어가면 괜한 의심을 살 가능성이 있었다.

주변 도시 연합군 정도야 가볍게 쌈 싸 먹을 수 있지만, 지금 시점에서 신성 왕국과 척지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

더군다나 용사 클래스까지 각성한 이상 앞으로 저들과의 공조는 필수 불가결 적인 일로 보였다.

“몰래 성벽이라도 넘을까?”

“저렇게 두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요?”

“한쪽에 불덩이 떨궈 놓으면 시선이 쏠려서 반대쪽은 빌 것 같은데.”

“…….”

일레이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시선으로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상식적으로 할 이야기인가. 좀 말려달라는 뜻으로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을 바라보자 그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은 것 같네요. 저렇게 날이 바짝 서 있을 정도니 즉각 쏟아져 나오겠죠.”

“그다음은 텔레포트 게이트의 이용이 문제겠군요. 전시 중이라 군사적으로만 사용이 허가될 터이니.”

하지만 오히려 그 의견에 동조하며 성에 진입한 이후의 일까지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 모습에 살짝 충격을 받은 일레이나는 허탈한 한숨을 토해냈다.

“이 파티에 정상인은 저밖에 없는 건가요?”

“외부에서 보기에 너도 정상은 아니야. 어깨가 뜯겨 나가고서도 악에 받힌 태도로 싸우던 그때 모습을 떠올려봐.”

“그건….”

이진한의 말에 일레이나는 주춤하며 말문이 막혔다.

사실 지금 생각해도 그때는 분노와 고통으로 머리가 얼룩져 눈이 뒤집힌 감이 없잖아 있었다. 교양과 상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신의 내면에 그런 터프한 모습이 잠들어 있었다는 것에 스스로 놀랄 정도였으니.

“그럼 대충 결정된 것 같으니.”

이진한이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자 성벽 앞으로 심상치 않은 마력의 흐름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성벽 위에선 그것을 눈치챘고, 곳곳에서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며 적의 습격을 알렸다.

“콰앙-.”

그가 손을 휘두름과 동시에 시뻘건 화마의 비가 성벽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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