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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94화 (94/210)

◈ 094.

【505:27:24】

사흘째의 날.

이진한은 후유증을 전부 회복했다.

북쪽 숲 결계의 수복, 저택의 건축을 비롯한 자잘한 이들을 전부 마무리 지었고, 마지막엔 일행과 함께 고대 신의 잔재가 봉인된 지하로 내려갔다.

“…그 악마가 다녀갔어도 여긴 여전하네요.”

“그만큼 축적된 힘이 많다는 소리겠지. 내가 봐도 그리 차이는 없어 보이네.”

메피스토는 분명 적지 않은 힘을 잔재에서부터 뽑아내어 흡수했다. 하지만 이진한이 보기에 그곳으로부터 느껴지는 기운의 총량은 이전과 별다른 것이 없었다.

“그럼, 여기서 기다려. 마기가 휘몰아칠지 모르니까 조심하고.”

“네.”

일레이나가 가볍게 손을 흔들자 이진한은 난간에서 뛰어내려 밑으로 내려갔다. 잠시간 복잡한 표정으로 그 뒤를 쫓던 그녀의 시선에 엘레오노라는 의아한 시선으로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해요?”

“…아니요, 그냥.”

일레이나는 조심스럽게 난간을 부여 잡으며 밑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너무 멀게 생각했는지도 몰라요.”

“멀게 생각이요?”

“고대 영웅이라 추앙받아도 저희랑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걸요.”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슬퍼하고 절망한다. 일레이나는 어젯밤 자신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울적한 감정을 떨쳐내지 못하는 이진한의 얼굴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툭.

그녀들이 위에서 대화하고 있던 사이, 이진한은 바닥에 내려섰다.

고대 신의 잔재를 지키고 있던 결계는 메피스토가 봉파자를 이용해 파괴해버린 뒤.

그렇기에 다시금 삼라만상을 일으킬 필요 없이 손쉽게 그 영역으로 발을 내디뎠다.

“전부 흡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그는 마검(魔劍) 그라나다를 꺼내 쥐었다.

본래라면 검은 광택이 흘러내릴 정도로 고급스러움이 감돌았으나, 메피스토와의 싸움에서 소모가 심한 것인지 볼품없어진 모습이었다. 마치 녹이 슨 것처럼 날이 무뎌졌고 군데군데에는 이까지 나가 있었다.

잠시 검 위를 쓰다듬던 이진한은 그것을 휙 하고 내던졌다.

아무런 저항 없이 날아간 마검은 그 위에 툭 떨어지는 듯했지만, 이내 제 밑에 있는 것이 먹음직스러운 음식임을 깨달았는지 검 끝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구우웅─.

아무런 제약도, 제한도 없었다. 일전에 자신의 임의대로 그 과정을 끊었던 것과 달리 자유롭게 풀어두자 마력의 기류가 사방을 울릴 정도의 기세로 게걸스럽게 고대 신의 잔재에서 흘러나온 기운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잘 먹네.”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오는 광경이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진한은 시야 한쪽에 떠오른 메시지에 피식 웃었다.

[바포메트가 흡족함을 전합니다.]

평소 무슨 일이 있어도 잠자코 있던 녀석이 감정을 표해올 정도로 만족스러웠나 보다.

메피스토를 쓰러뜨리는 데 있어 지대한 공적을 세웠으니 이 정도 포상은 내려줘도 문제없을 터.

이윽고 그 포식의 기세가 잦아들었을 때 이진한은 마검을 회수했다.

“나중에 또 잘 부탁한다.”

그라나다는 예전의 광택을 되찾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번쩍거림을 선사하며 주체할 수 없는 힘을 꿈틀거리는 듯했다.

“그러면…….”

마검을 수납한 이진한은 가늘어진 눈으로 덩그러니 놓인 고대 신의 잔재를 바라보았다.

바포메트가 그렇게 많은 기운을 흡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줄어든 것은 5%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주위 마나를 빨아들일 테니 금세 공백이 메워질 것이 분명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어떻게든 해보겠노라고 큰소리를 떵떵 쳤지만, 답이 없는 상황.

잠시 머리를 긁적이면서 그것을 바라보던 이진한은 이내 결론을 내렸다.

“굳이 무리해서 없애야 하나?”

잘만 보관해서 쟁여 놓는다면 괜찮은 에너지원이 되지 않을까. 어디 가서 또 이런 것을 구하기도 힘들 것이다. 지키는 사람도 있고, 결계만 꼼꼼히 펼쳐 놓는다면 설사 습격을 받는다고 하여도 자신이 먼저 도우러 올 수 있을 터.

…사실은 모두 변명에 불가했다. 작금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고 하여도 없애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결계부터.”

대마도사 클래스 초월 마법 「양의 안식처」

고대 신의 잔재에 흘러나온 힘을 이용했기에 이쪽의 소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숲을 감싸는 결계를 구성할 때처럼 술식에 공을 들였고, 한 시간은 더 고생한 끝에 골조를 완성할 수 있었다.

파아앗-!

투명한 장막이 이 공간을 감싼다. 자체 에너지원의 힘도 충분해 손상된 부분은 자력으로 회복시키는 초월 급의 봉인이었다. 동급의 초월 마법 역시 서너 발은 버텨낼 수 있을 터.

적어도 결계가 파괴되기 전까진 도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기다렸지.”

그 외에도 이중삼중 보안을 끝낸 이진한이 다시금 자리를 박차 난간 위로 올라섰다.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듯 전부 기다려주었다.

“나가자. 이 통로도 닫아야 하니까.”

이진한은 기다림에 감사를 표한 뒤 밖으로 향했다.

출구의 끝, 일행이 전부 밖으로 나온 것을 확인한 그는 옆에 서 있던 호에엥을 향해 눈짓했다.

-여기 있어요.

그녀가 내민 것은 고대 신의 잔재에서 나온 기운을 정제해 마나로 만든 구슬이었다. 어지간한 상급 마나석보다 더 많은 기운이 내포되었고, 그 정순함은 드래곤하트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럼, 닫는다?”

고대 신의 잔재는 안전히 봉인해두었다.

이진한인 거기에 더해 하와와가 그랬던 것처럼 그곳으로 내려가는 길 자체를 지워버릴 생각이었다.

파아앗-!

구슬이 빛내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펼쳐진 것은 《영원》의 오리지널 마법인 「삼라만상」이었다.

동시에 대현자의 눈이 극한으로 활성화되었다. 지금부터 펼치려는 마법은 그에게 있어서도 미지의 것. 하와와를 비롯해 선대 마녀들이 남긴 기록에 쓰인 술식을 완벽히 이해했지만, 실전은 이론과 다른 법이다. 그러니 잔재를 봉인할 때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무간(無間)」”

길을 지워버리는 공간의 마법이 발동된다. 어찌나 막대한 힘이 소모되는지 구슬에 축적된 것도 모자라 이진한의 마나까지 뭉텅이로 잡아먹으며 술식이 구축되었다.

‘진짜 무식하네.’

「삼라만상」의 숙련도가 높았더라면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었겠지만, 자신은 생초짜였으니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렴 《영원》의 계보를 계승한 대마도사인 하와와조차 자신의 생명력을 대부분을 원료로 사용해 완성할 수 있었던 마법.

어줍잖은 꼼수를 쓰기에 《영원》의 이름은 너무 높았다.

“…후.”

막 떠오르기 시작했던 태양이 중천으로 옮겨갔을 때가 돼서야 「무간」의 마법이 완성되었다.

먼저 말자하면 비효율의 극치였다. 「양의 안식처」를 사용했던 것을 제쳐두고라도, 이 마법 한 번으로 정신력에 한계가 왔다.

즉, 단 한 번으로 세 번의 초월 마법과 맞먹는 심력이 소모된다는 것일 터.

앞으로는 굳이 사용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이제 이곳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메피스토가 「무간」을 꿰뚫고 넘어갈 수 있었던 건 결계의 매개체가 된 하와와의 심장을 취한 덕분이니까.”

마찬가지로 자신의 심장을 꺼내지 않는 이상 들어가는 입구는 봉인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마왕이나 상위 악마 같은 존재가 중간계에 현현해 직접 나선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겠지만, 그때가 된다면 고대 신의 잔재는 문제 정도도 되지 않을 터였다.

-곧바로 떠나시는 겁니까. 하루 이틀 정도는 더 머무셔도 될 듯한데.

-맞아요. 온천, 온천은 어때요?

여기서 할 일은 끝났다. 그런 표정으로 그가 손을 털자, 머뭇거리던 헤으응과 호에엥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해왔다.

“말했잖아. 할 일이 많다고.”

-그렇지만요…….

이진한이 거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자, 호에엥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림에도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간간이 놀러 올 테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말아요.”

“맞습니다. 베르너 님께서도 그리한다고 말씀하셨으니까요.”

엘레오노라와 미르엘이 나서 그녀를 달랜다. 이진한과 달리 제 머리를 쓰다듬는 그 따뜻한 손길에 마음이 풀린 것인지 표정은 풀렸지만, 눈동자 속에 서린 아쉬움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곧 마차가 준비되었고, 그들은 짐을 꾸리는 것을 끝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그러면 나중에 또 올게요!”

일레이나 역시 어느덧 그녀들과 친해졌는지 안에서 손을 흔든다.

헤으응과 호에엥도 마주어 인사해주었을 때, 말들이 땅을 박차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아, 여기도 이제 끝인가요.”

“그새 정이라도 들었나 봐?”

“그러니까요. 둘 다 몸은 컸어도 동생 같았거든요. 있어본 적이 없어서 더 그런 것 같았어요.”

하지만 떠난 이상 언제까지고 그들에게 얽매여 있을 수는 없다. 몸을 돌려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그녀는 팔짱을 끼며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일단 다음 도시에서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는 것으로 하고, 목적지는 결정하셨나요?”

“흠.”

이진한은 턱을 쓰다듬으며 지도를 바라보았을 때,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엘레오노라가 살짝 걱정되는지 어두운 목소리로 말해왔다.

“…저 아이들은 괜찮을까요. 혹여나 이번엔 신성 왕국 측에서 해코지해오면 어쩌죠?”

노스 벨헤드렘은 신성 왕국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수습을 끝마쳤다. 하지만 망령 군단에 의해 폐허가 된 상태였기에 당연히 텔레포트 게이트도 파괴되어버렸기에 필연적으로 다른 도시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조사하느라 주변을 들쑤실 순 있겠지만, 어지간해선 주위에 둘러진 결계조차 돌파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겠죠?”

“더군다나 신성 왕국은 고대 영웅 측에 우호적이라고 했잖아? 굳이 나서서 피해를 감수하진 않지만, 적대하지도 않겠지. 만에 하나 공격해온다고 해도 그만한 준비는 해놓았으니까.”

결계 쪽에 침입이 생긴다면 알림이 오도록 설정해놓았고, 그와 별개로 헤으응과 호에엥에게도 각자 내게 연락할 수 있는 비상 연락망도 쥐여주었다.

설사 미들턴의 때처럼 그 주위를 감싸는 결계가 생긴다고 하여도 이쪽에 연락해올 수 있을 터.

“그러니까 그쪽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 문제는 다음 목적지를 어디로 정하냐인데…….”

저택에 머물면서도 몇 번이고 이야기를 나눴지만, 딱히 좋은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제국은 어때요?”

“제국? 리베라?”

“네. 수도 폴포아르텔이요. 온갖 사람과 물건이 모이는 곳이니 정보를 얻을 가능성도 크겠죠.”

“흠.”

일레이나의 제안에 이진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뚜렷한 답이 없는 상황에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전전긍긍하는 것보단, 한곳에 진득하니 머무르며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더 좋을 터.

“…그리고, 마탑 쪽의 문제도 슬슬 해결해야 하니까요.”

“이터널 학파라고 했지. 복귀하게?”

“복귀하면 파티에서 나가야 하는데요?”

“아.”

“저 그렇게 지조 없는 성격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그쪽에서도 절 내치지 못하니까 그냥 지금 드래곤 슬레이어의 파티로 함께 돌아다니고 있다, 이 정도만 이야기해놓고 오려고요.”

“같이 가줄까?”

이진한은 씩 미소를 지었다.

듣자 하니 일레이나는 마탑에서 상층부와 충돌하며 여러 수모를 겪었다고 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쳐들어간다면 그들로서도 혼비백산할 터. 검은 현자의 계승자라고만 둘러대도 놀라 자빠지리라.

“…가급 적이면 소란이 일어나는 건 사양하고 싶은데, 그래도 여차할 땐 부탁드릴게요.”

“맡겨 둬.”

설마 처음부터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깽판이라도 치겠는가.

일레이나는 살짝 불안해졌지만, 최소한 그 정도의 상식은 있으리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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