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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93화 (93/210)

◈ 093.

“…미라?”

“누가 미라라는 거예요.”

미라는 붕대 사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흔들며 성큼성큼 이진한에게로 다가왔다. 그러곤 이마와 얼굴, 몸 곳곳을 살피는가 싶더니 오른팔로 찰싹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좋아요, 다 괜찮아 보이네. 그러면 빨리 옷 갈아입어요. …장례식 준비 다 했다고 하니까.”

일레이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울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가야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일레이나가 문을 나섰을 때, 이진한은 침대를 빠져나오며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다. 사실 아직 그리 괜찮지 않았다. 능력치는 여전히 20% 선으로 제약되어 있었고, 몸은 움직일 때마다 관절이 삐걱거리며 신음을 내질러왔다.

마음 같아선 다시 침대에 누워 쉬고 싶음이 간절했지만, 창밖의 풍경을 보니 인간 된 도리로서 차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자.”

그렇기에 옷을 갈아입은 뒤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방 밖을 나섰다.

일레이나 역시 그사이에 온몸을 둘둘 말고 있던 붕대를 풀었는지 말끔한 차림새로 돌아와 있었다.

“팔은 조금만 더 기다려줘. 아직 힘이 다 회복되질 않아서.”

“그럴게요.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엘레오노라가 나름 신경 써주고 있거든요.”

일레이나는 텅 빈 왼팔 자락을 펄럭이면서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곧 그들은 저택을 빠져나가 마당 한구석에 자리한 무덤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그곳에 먼저 자리 잡고 있던 엘레오노라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반겨주었다.

“오셨군요. 몸은 좀 어떠세요?”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속은 썩어들어가고 있다. 아마 며칠 정도는 더 요양해야 할 것 같네.”

“자잘한 일들은 이쪽에서 이미 해두었어요. 노스 벨헤드렘 쪽도 신성 왕국이랑 근처 도시의 병력이 와서 수습하는 듯했고요.”

“그런가.”

짧게 고개를 끄덕인 이진한은 시선을 돌려 무덤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헤으응과 호에엥을 바라보았다.

아직 장녀의 죽음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는지 많이 초췌한 모습이었다.

이진한은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이며 숨을 내뱉었지만, 생각처럼 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지 애꿎은 손가락만 문지를 따름이었다.

-현자님.

“…응.”

-언니는 좋은 곳으로 갔을까요?

이진한으로서도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그녀들은 호문클루스,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던가.

이성과 지성을 지닌 것도 정령을 원료로 삼아 그런 것일 터.

하지만 그는 호에엥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곳으로 갔을 거다. 내가 보증하마.”

-…네.

호에엥은 최대한 의연한 모습으로 있으려 했지만, 울컥 감정이 복받쳤는지 부어오른 눈가로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다만, 헤으응은 그저 차분히 무덤에 묻힌 관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희는 항상 이래왔습니다. 제가 태어나 헤으응이란 이름을 물려받았을 때도, 그 이전에 헤으응이란 이름을 지닌 존재가 죽은 뒤였죠. 제가 태어난 직후 제일 맏언니는 호에엥이었습니다. 하지만 적들의 습격에 죽었고, 지금의 호에엥이 그 이름을 물려받았지요.

“그렇다 한들 죽음을 평범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너희들 역시 살아있는 존재니까.”

-…그렇게 인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헤으응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잠시간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이진한은 처참한 풍경이 되어버린 북쪽 숲을 바라보며 말했다.

“원한다면 떠나도 좋아. 고대 신의 잔재는 내가 어떻게든 해주마. 이때까지 이 땅에 묶여 있었으니 이제는 그만두어도 괜찮잖아?”

-사명을 저버린다면, 저희 존재 의의는 무엇일까요.

“생명이 존재하는 것에 사명 따위는 없어. 그저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거다. 하고 싶은 일은 그 과정에서 찾아가면 되는 것이고.”

-그런 겁니까.

자신을 배려하기 위한 말이란 것을 느꼈는지 헤으응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던 호에엥을 껴안았다.

-사실 자매들끼리 그런 이야기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설사 현자님께서 고대 신의 잔재를 없애서 저희를 사명에서 해방해 주신다고 하여도 얼마간은 이곳에 머무르겠지요.

떠나간 언니를 추억하리라, 또 조만간 새로이 등장할 새로운 하와와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릴 것이다.

그 말에 이진한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또한 너희들의 선택이니까.”

“…그러면 할까요?”

그들 간의 대화가 끝나자 엘레오노라가 앞으로 나와 간결하게 기도문을 읊었다.

이진한으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내용이었으나, 왜인지 착잡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은 메피스토와의 싸움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부족했고, 하와와의 죽음은 필연적이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조금 더 잘해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의문이 계속해서 마음속 한구석에 휘몰아쳤다.

‘…쯧.’

이미 벌어진 일에 집착하는 것은 그리 좋은 현상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런 울적한 일은 서둘러 털어내지 못한다면 정신에 골병이 들기 마련. 이미 몇 차례 비슷한 일을 겪은 기억이 있는 이진한은 힘차게 고개를 털어 그것을 떨쳐내었다.

“그러면, 그만 쉬게 해드리죠.”

기도문이 끝나고 엘레오노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각자 삽을 붙잡고 흙을 퍼서 관 위에 덮었다.

곧 작은 봉분이 세워졌고, 헤으응은 그 앞에 비석을 박았다. 그러곤 검 끝으로 그 위를 긁으며 글귀를 새겨나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몇 명이나 되는 언니가 이 땅에 묻혔을까.

이진한은 그것을 입에 담지 않은 채 그 위로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파아앗-!

찬란한 빛이 그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혹여나 그녀의 시신이 잘못되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자신의 주위로 따뜻한 빛무리가 몸을 감싸자, 호에엥은 다시금 훌쩍이기 시작하며 언니인 헤으응의 손을 붙잡았다.

“…….”

엘레오노라 역시 붉어진 눈가로 미르엘을 붙잡고 있는바.

일레이나는 어디에서 따왔는지 모를 꽃 한 송이를 그 위에 올렸다.

“편히 쉬어요.”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언니를 기리며, 동생들이」

***

장례식이 있은 뒤로 이틀 동안 이진한은 바삐 움직이며 수많은 일을 처리했다.

능력치와 몸은 여전히 박살 난 상태였지만, 근육통이 있으면 움직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먼저 개판이 된 숲을 가다듬고 저택을 복원한 되, 그곳을 골조로 새로운 결계를 구축했다.

이전 싸움에서의 얻은 것을 교훈 삼아 재원을 아끼지 않고 투자했고, 최소 두 배는 더 단단한 강도를 지닌 결계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일레이나의 팔 역시 치료해주었다. 잘려나간 팔은 용케 보관하고 있었지만, 이미 마기에 오염되어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다시 재생시켜 새로운 팔을 만들었고, 나름대로 성공적인 모습을 보이며 끝이 났다.

사실 재생의 기적은 자신의 몸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지만, 타인의 몸은 몇 배의 심력을 쏟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만 아니라면 하루는 더 일찍 이곳을 떠날 수 있었을 터.

그래도 용사 클래스에 오른 덕분인지 제법 효율을 살려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

사흘째의 밤.

그는 홀로 창가에 앉아 밤중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판타지 세계관답게 떠올라 있는 두 개의 달은 각각 서로 반대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희미하게 빛나는 초록색 달은 가늘어진 그믐의 형태였고, 밝게 빛나는 붉은 달은 하늘을 얼룩지게 만들며 만월의 찬란함을 흩뿌렸다.

이진한은 잠시 하와와의 얼굴을 떠올렸지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헤어지게 되었기에 벌써 그 얼굴이 희미했다.

그와는 반대로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귓가에 남아 맴돌았으니 참으로 신기할 노릇이었다.

쪼르륵.

텅 빈 글라스 잔으로 붉은 액체가 가득 담긴다. 와인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나, 오늘은 왜인지 그것을 마시고 싶은 날의 밤이었다.

이진한은 와인을 홀짝이며 하염없이 밖을 바라보았다.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숲은 고요하기 짝이 없다. 얼마쯤 그렇게 있었을까, 누군가 창틀로 내려서는 기척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산책하고 있는데 혼자 마시고 있는 게 보여서요.”

“다른 이들은?”

“자고 있죠. 누구처럼 청승 떨고 있진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시간이 몇 신데.”

자신과 마찬가지로 잠자리에 들지 못한 채 산책이나 하고 있던 이가 그리 말하는가.

이진한이 실소를 머금으며 슬쩍 몸을 비키자 일레이나는 사뿐한 몸놀림으로 방안에 들어왔다.

“팔은 어때?”

“괜찮아요. 이질감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심리적인 문제겠죠. 금세 적응할 거예요.”

“그러면 다행이네.”

일행 중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그녀였다. 상대는 팔 하나로 싸게 잘 빠져나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적.

좋은 경험이 되었겠으나, 그것이 긍정적인 요량을 끼칠지는 이진한으로서도 알지 못했다.

“한 잔?”

“그러려고 들어왔어요.”

쪼르륵.

망설임 없이 나온 대답에 이진한은 빈 잔을 들어 와인을 따라주었다. 곧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고, 그는 처음으로 혀끝에 감도는 와인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는 팔 하나로 끝나지 않을지도 몰라.”

갑작스럽게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손안에서 잔을 돌리고 있던 일레이나는 살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보랏빛 눈동자로 자신의 앞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도 맞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너희와 함께 다니는 것이.”

욕심인가, 아니면 외로운 게 싫어서 그런 것인가.

사실 효율을 따지자면 조금 더 건실한 구조로 파티를 구성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진한은 내심 그러기 싫었다.

“말이랑 표정이랑 다른데요?”

“…들켰네.”

순식간에 읽혀버렸다.

그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깨를 으쓱이며 일레이나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뭐, 무슨 취지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지는 알아요.”

이쪽을 배려한 것이리라.

팔 한쪽이 찢기고, 말 그대로 죽기 직전까지 갔다. 어지간한 강심장이라고 해도 죽음의 공포에서 마음이 꺾여버리고 말았을 터.

하지만 일레이나는 자신이 선택한 결정을 쉬이 번복할 정도로 줏대가 없지 않았다.

“그때마다 치료해줄 거죠? 그러면 목숨은 어떻게든 부지해볼게요.”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그리고 이것도 만능이 아니야.”

만약 마기에 오염되거나 골치 아픈 저주에 휘말리기라도 한다면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 채 죽어갈 수도 있었다.

그런 우려 가운데 일레이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이진한의 손등을 움켜쥐었다.

사실 조금 부끄러웠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부드럽게 그의 손을 잡았지만, 살짝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얼굴에 괜히 심통이 나서 다른 손으로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이진한의 머리가 넘어간다. 새로이 재생된 팔이라 힘 조절을 잘못한 듯싶었지만, 일레이나는 속이 뻥 뚫리는 듯한 감각에 웃음을 토해냈다.

“그러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제가 선택해서 한 일이에요. 만약 잘못된다고 해도 조금 원망은 하겠지만, 일방적으로 탓을 할 생각은 없어요. 그리고.”

그녀는 이진한의 뺨을 쿡 찌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시시콜콜한 걱정은 안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꽁해 있는 건 안 어울리니까 하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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