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2.
「네놈! 네놈! 네놈!」
메피스토는 바닥에 몸부림치며 이진한을 향한 저주를 토해냈다.
신성력과 마기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상극의 성질을 지닌다. 즉, 맞닿는 순간에는 마치 불과 물처럼 둘 중 하나가 남을 때까지 격렬한 씨름을 반복했다.
고대 신이 남긴 잔재의 기운을 흡수한 메피스토는 한층 격을 높이며 이전과 사뭇 다른 힘을 내뿜었지만, 용사 클래스에 도달한 이진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악마가 마족보다 더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를 이기려면 최소 중상위급의 악마는 와야 할 터.
이제 막 중위를 벗어난 메피스토로는 어불성설인 이야기였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힘을 지녔는데도 신성력 하나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냐! 네놈이 대체 무엇이길래!」
메피스토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이진한은 무심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숨을 헐떡거리고 있던 그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지마. 결국 네놈이 나보다 약했고, 패배했다. 그뿐인 사실이다.”
「놈!」
메피스토는 마기를 쥐어짜 기다란 창을 만들어 쏘아 보냈다. 물론 이진한은 가볍게 무라마사를 휘두른 것으로 창을 튕겨낸바. 그러곤 차가운 눈으로 추하게 바닥을 뒹굴고 있는 메피스토를 내려다보았다.
“이제부터 시작인데, 그리 발악하면 안 되지. 조금만 아껴둬.”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나는….」
“왜. 거짓과 기만을 버리고 패도를 걷는 왕이 되겠다면서. 벌써 말을 바꾸려고?”
쉬아아악!
시퍼런 섬광이 번뜩인다. 그러자 겨우 신성력을 중화하며 재생하고 있던 상처들이 벌어지며 메피스토의 사지가 잘려 나갔다.
「…컥!」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닥쳐온 고통에 메피스토는 단말마와 같은 신음을 토해냈다.
본디 그 육신은 중간계에 머무르기 위한 제물일 뿐 본체와 연결된 것은 맞지만, 이렇게까지 타격을 줄 수 없었다.
허나 이진한의 신성력은 육신이 아니라 그 정신에 직접 적으로 간섭했고, 메피스토에게 고통을 주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악!」
공동은 곧 그가 지르는 비명만으로 가득 찼다. 전신을 뒤덮었던 마기는 성화에 타들어 가 사라졌고, 종래엔 다시 인간의 육신으로 되돌아 왔을 따름이었다.
“…주, 죽여라.”
메피스토는 핏발이 선 눈으로 이진한을 올려다보았다.
사지가 잘려 발버둥 치지도 못한다. 남은 마기는 이제 한 줌조차 되지 않았고, 이래선 발악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차라리 이대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이 몸과의 연결이 끊어져 본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터.
메피스토는 그것을 원했지만, 이진한은 피식 웃으며 검끝을 기울였다.
“누구 좋으라고.”
푹.
이미 넝마 짝이 되어버린 어깨로 무라마사의 검날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살갗을 헤집는 쇳덩이의 감촉. 하지만 그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그 사이로 스며드는 농밀한 신성력이었다.
악마에게 있어서 육체적인 상처는 그리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부는 그것을 즐기는 일도 있었고, 메피스토 역시 거짓과 기만의 악마였던 만큼 남을 농락하기 위해 그런 취미 역시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신성력은 절대 적응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토록 농밀한 것은 인세에도 드문 수준으로, 강대한 악마일수록 그 반동은 커졌다. 물론 메피스토는 그리 상위 악마가 아니었지만, 고대 신의 잔재에서 흘러나온 힘을 흡수해 일시적으로 격이 상승해 그 대가를 치르는 와중이었다.
칵-!
메피스토는 혀를 깨물었다. 더는 농락당하지 않으려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하는 것이었지만, 이진한은 피식 웃으며 그의 입을 강제로 벌리곤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누구 마음대로 죽으려고 해.”
잘린 혀가 재생한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진한은 메피스토를 극한까지 몰아넣은 뒤 다시 치료하기를 반복했고, 그 횟수가 수십 번이 넘어서야 멈춰 섰다.
“…….”
메피스토는 두 눈을 까뒤집은 채 실신한 상태였다.
육신은 더없이 멀쩡했으나, 정신이 한계 이상의 고통을 받아 피폐해져 있었다. 아무리 악마라 할지라도 그 상한선은 있는바.
끝나지 않은 고문은 거짓과 기만을 읊조리는 악마에게 절망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마음 같아선 며칠 밤낮이고 더 하고 싶은데, 슬슬 일행이 걱정돼서 말이지.”
지금쯤이면 대부분 의식을 회복했거나 그와 가까운 상태일 터.
이진한은 손을 뻗어 메피스토의 머리채를 잡고 그 머리에 신성력을 들이부었다.
“…끄, 으으으아아아.”
피폐해져 있던 정신으로 찬물을 끼얹은 듯한 충격에 메피스토의 두 눈이 돌아왔다.
이진한은 자신에게로 향하는 시선에 씩 웃어주고는 무라마사를 쥐고 그의 가슴팍을 무참히 베어버렸다. 그러자 가슴이 쩍 하고 갈라졌고, 힘차게 맥동하고 있는 심장이 드러났다.
“돌아가서 마왕에게 전해라. 덕분에 진짜 각성했으니 날 죽이려면 너 같은 놈들 한 트럭을 보내도 부족할 거라고.”
푹.
그와 동시에 무라마사의 끝이 메피스토의 심장을 꿰뚫었다. 피는 나오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빛이 터져 나오며 주위를 휩쓸었을 뿐이었다.
“……!”
메피스토의 몸이 고문을 당할 때보다 더욱 격렬하게 들썩였다. 악마든 마족이든 흑마법사든 그들에게 있어서 심장은 중심이 되는 상징이었다. 이 육신에 강림하기 위한 매개의 술식 역시 심장에 있을 터.
이진한은 그곳에 농밀한 신성력을 잔뜩 주입해주는 것으로 마계 깊은 곳에 있을 메피스토의 본신에 큰 타격을 주었다.
“…네, 놈.”
메피스토의 입가가 덜덜 떨렸다. 신성력으로 인해 수없이 치료되고 파괴되길 반복한 그 몸이 한계를 맞이했고, 찰나에 수십 년은 늙은 듯 생기가 사라지며 급격히 수축하기 시작했다.
이진한을 바라보는 눈동자 역시 건조되며 쩍쩍 갈라진다.
메피스토는 그 가운데 잘 움직이지도 않는 혀를 굴리며 말을 내뱉었다.
“바, 반드시 복수할…….”
“이제 너 정도는 한 트럭으로 와도 안 된다니까.”
콱.
이진한의 발이 메피스토의 얼굴을 가볍게 짓밟았다. 그러자 마치 잿더미를 문지른 것처럼 퍼석 무너졌고, 이내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
잠시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이진한은 비틀거리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곤 무라마사를 놓아버린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불굴의 가호 덕분에 상처가 전부 치료되었다곤 하지만, 소모된 기력이나 정신력까지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괴리감에서 오는 간극이 그의 정신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대체 뭐 하자는 거지.”
이진한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고대 신의 잔재를 바라보았다.
관성에 이끌려 여정을 이어왔고, 관성에 이끌려 여기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누가 자신을 어떤 목적으로 이렇게 만들었는가.
하다못해 그것만이라도 속 시원하게 알려주면 좋으련만, 상태창은 빌어먹을 그 시간의 유예만을 알려오는 것이 전부였다.
차라리, 차라리 손을 놓아버린 채 시간의 유예에 몸을 맡겨볼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진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썩을.”
언제까지 감성에만 젖어있을 수 없었다.
메피스토를 쓰러뜨렸음에도 퀘스트 완료가 뜨지 않는 것은 저 밖에 있는 망령 군단, 그리고 노스 벨헤드렘을 뒤덮고 있는 유령 성채를 해결하란 소리일 터.
잠깐 헤아려보니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슬슬 일행도 걱정되기 시작했다. 대충 가늠하기론 의식만 잃었을 뿐 전부 살아는 있었으니 크게 저어되는 건 없었지만, 아무래도 이 추위에 방치되어 있다 보면 위험할 수 이도 있으리라.
그렇기에 이진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
사흘 뒤.
메피스토와의 싸움에서 승리 후 일행을 수습한 이진한은 곧바로 망령 군단의 처리와 유령 성채의 타격에 들어갔다.
메피스토와 싸운 것은 고작해야 열 시간 남짓이었지만, 그사이 적지 않은 마물이 생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용사 클래스에 도달한 이진한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물론 이진한 역시 피폐해진 상태였기에 속전속결로 상황을 마무리 지었고, 이틀에 걸친 난투 끝에 유령 성채를 부수고 살아 움직이는 모든 마물을 죽일 수 있었다.
아쉽게도 그의 할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도시 쪽은 근처에 있는 다른 도시나 신성 왕국 쪽에서 수습한다고 하여도, 북쪽 숲 역시 큰 피해를 본 상태였다.
특히 숲을 둘러싸고 있던 결계는 모조리 깨어진 상태. 특히 바포메트의 현신 이후 일어난 싸움으로 인해 지형 자체가 어그러져 수습할 곳이 많았다.
그렇기에 피로를 무릅쓰고 처음부터 다시 결계를 구축했고, 사흘째가 되는 날이 돼서야 얼추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다른 이들 역시 치료를 명목으로 쉬고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메피스토의 싸움으로 인해 저택 대부분이 소실된바.
그렇기에 그녀들은 그쪽의 수복에 집중했고, 이진한이 돌아왔을 때쯤 제법 그럴듯한 수준까지 되돌릴 수 있었다.
“…일단 좀 쉬자.”
처음 내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메피스토와의 격전 이후 쉬지 않고 그대로 사흘이란 시간 동안 움직인 탓에 육체나 정신이나 할 것 없이 한계에 이르렀다. 특히 바포메트의 강림으로 인한 페널티로 전 능력치가 하락한 상태에서 드잡이질을 벌이느라 필요 이상의 심력이 소모되었다.
침입자의 방비는 얼추 되어 있었다. 설령 급조한 결계가 돌파당한다고 하더라도 백에 가까운 흑요석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기에 쉽사리 뚫리지는 않을 터.
그렇기에 그들은 일단 지난 전투에서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휴식에 들어갔고, 이진한은 약 서른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끄응.”
【565:24:15】
몸살이라도 걸린 듯 삭신이 쑤셔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해도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고, 죽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가뜩이나 안 좋은데 무리까지 해서 그러나.’
머리가 복잡했기에 쉬지 않고 움직인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는지 원래라면 한숨 자고 일어난다면 가뿐히 털어버렸을 페널티조차 아직 살아남아 그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
이진한은 슬쩍 발끝을 밀어 커튼을 열었다.
사실 곧바로 확인해봐야 할 것이 많았다. 퀘스트를 해결한 것으로 쌓인 상태창의 알람이 수십 개며, 성직자 클래스의 초월지경으로 도달한 용사 클래스도 알아보아야 했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저 밖에서 움직이는 인기척들에 주의를 기울였다.
“무덤을 준비하나.”
미르엘과 헤으응이 저택의 마당 구석에 삽으로 땅을 파고 있었다. 그 뒤로 놓인 투명한 유리관에 누워있는 것은 아마도 장녀인 하와와일 터.
엘레오노라와 호에엥은 말없이 그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복도 쪽으로부터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이진한은 슬쩍 문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곧 조심스레 문이 열렸고, 온몸에 붕대를 둘둘 감은 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