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91화 (91/210)

◈ 091.

본디 성직자 클래스의 초월지경은 두 가지 갈래로 나뉘었다.

첫째로 추기경 클래스의 상위인 교황이 있었다.

이쪽은 신을 받드는 종교를 창시할 수 있으며, 신도의 숫자와 신앙을 기반으로 행사할 수 있는 기적의 규모가 달라졌다. 믿는 신에 따라 선한 종교가 될 수도 아니면 사이비가 될 수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 덩치가 커지기 시작하면 단일 클래스 중에서도 발군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로는 팔라딘 클래스의 상위인 성자가 있었다.

이쪽은 팔라딘과 같이 직접 전투 클래스로 특정 종교에 속하지 않아도 직접 기적을 행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딱히 추종 세력을 만들 필요도 없고 그렇지 않아도 클래스 중 최상위인 방어력과 재생력이 극한을 찍어 성(聖) 바퀴벌레라는 별명까지 있었다.

하지만 「용사」라는 이름은 월드의 고인물인 이진한으로서도 처음 보는 클래스였다. 칭호나 호칭으로는 곧잘 불리곤 했지만, 성직자 클래스의 초월지경으로 나타난 경우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떠한가.

움직일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설령 악마라 할지라도 제 모든 것을 내어줄 생각이 있었다. 그 가운데 아무런 대가 없이 초월지경을 각성하고 상처를 치료했으니 오히려 남는 장사였다.

툭.

이진한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프로스트를 주워들었다.

미르엘이 튕겨 나가며 떨어진 것인지 모래가 잔뜩 달라붙어 있던 검은, 본래의 주인이 손잡이를 쥐자 눈이 시릴 정도의 냉기를 뿜어내며 자신이 아직 건재함을 알려왔다.

짧게 한숨을 토해낸 이진한은 고개를 들어 균열의 너머를 바라보았다.

고대 신의 잔재가 봉인된 지하로 향하는 통로.

메피스토는 그 안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우웅─.

프로스트의 위로 눈 부신 빛이 서린다. 마치 일전 미들턴에서 마왕 마르바스에게 파괴된 성검(聖劍) 듀란달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용사 클래스의 특성일까.

시야 한쪽에 떠오른 상태창의 위로 자세한 설명이 쓰여 있다. 평소였다면 그곳에 얼굴을 박고 한 글자도 놓치지 않은 채 읽어나갔겠지만, 그는 담담히 앞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일행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간의 수행이 있었으니 헛되이 죽지 않았으리라 믿었다.

이진한은 지금 상황에서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치료하는 것보다 메피스토를 쓰러뜨리고 이 모든 상황을 끝내는 것이 더 옳은 판단이라 생각했다.

수욱-.

균열의 안으로 들어가자 한 번 왔었던 익숙한 지하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진한은 고대 신의 잔재 앞에서 환희에 찬 웃음을 터트리며 자욱한 마기를 흡수하고 있는 메피스토를 볼 수 있었다.

“아하하하-! 이 정도의 힘이라니! 여기 있는 그 모든 것을 취한다면 나도 마왕이 될 수 있겠구나!”

마왕(魔王). 마족으로서 그런 불경한 소리를 쉬이 입에 담을 만큼 고대 신의 잔재에 내제된 기운은 막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이진한의 기운을 느꼈는지 고개를 획 돌리며 균열의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또? 정말이지 성가시기 짝이 없구나. 그 질긴 생명력 하나만큼은 인정해주마.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신의 힘을 얻은 내게는.”

피이이잉-!

검붉은 마기가 허공을 꿰뚫는다. 메피스토는 당연히 그것이 이진한의 온몸을 찢어발겼으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

“통하지 않을 뿐이…….”

파아앗─!

돌연 찬란한 빛이 장내를 가득 채우며 휘몰아치는 어둠을 몰아냈다.

메피스토는 그 위에 서린 기운이 자신이 제일 경멸해 마지않는 것임을 깨닫고는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신성력?”

이전 싸움에서도 간간이 심상치 않은 신성력이 흩뿌려진 적은 있었지만, 그리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끽해야 이런저런 추기경이나 팔라딘의 수준으로, 성물(聖物)이나 그러한 종류의 힘을 빌린다면 어렵지 않게 다룰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공동을 가득 채운 이 빛은 메피스토조차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로 농밀한 것으로 어찌 된 영문인지 감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설마 다른 조력자가…….’

북쪽 숲을 둘러싼 수만의 망령 군단을 뚫고 외부에서 조력자라도 왔단 말인가.

드래곤 정도 되는 무력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터.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이미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칭호를 지니고 있어 그 가능성마저도 희박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메피스토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 안으로 들어와 《영원》이 만든 아티팩트인 「봉파자」로 결계를 파괴하고 고대 신의 잔재에서 흡수를 시작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몸에 축적한 것만 해도 이제껏 지녔던 힘보다 더 막대한 기운이었다.

거기에 더 정순했고, 더 밀도가 높았으며, 더 매혹스럽기까지 했으니 마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며 내뱉은 말은 허언이 아니었을 따름이었다.

슈우욱-.

바포메트와의 교전으로 피폐해진 육신이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중간계에서 깃든 이 몸은 그저 인간으로 의태 하기 위함일 뿐인 껍질인바.

고대 신의 잔재에서 받아들인 힘으로 인해 메피스토라는 악마의 ‘격’ 자체가 상승한 것이었다.

“좋구나. 참으로 기쁜 날이야.”

거짓과 기만의 악마.

그 이름을 타고난 것은 메피스토가 약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험난한 마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끊임없이 남을 배신하고, 뒤통수를 치며 누군가를 짓밟아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감히 선언하마. 이 메피스토펠레스는 더는 거짓과 기만을 하지 않으리라고.”

꽈아악.

가볍게 주먹을 움켜쥐자 이전과 차원이 다른 마기가 그 위에 휘몰아쳤다. 여전히 저 사내를 중심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신성력은 성가시기 그지없지만, 더 큰 어둠으로 뒤덮으면 그만인 일.

그렇기에 메피스토는 크게 땅을 내디디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파아아앗-!

인간의 육신이 순식간에 마기로 뒤덮이고 피부가 검은색으로 물들어간다. 머리 위로는 기다란 한 쌍의 뿔이 튀어나와 위엄을 자랑했고, 덩치는 두 배나 커졌으며, 흩날리는 마기는 마치 망토처럼 그의 등 뒤에서 펄럭였다.

그렇다고 다시 한번 본신으로 현현한 것은 아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카라반이나 트루마크 줄루 같은 악마화(惡魔化)의 형태에 가까웠다.

「나는 오늘, 다시 태어난다. 거짓과 기만이 아닌 패도를 걷는 왕으로!」

메피스토는 제힘에 취해 천장과 바닥이 들썩일 정도로 큰 웃음을 흘렸다.

스스로 마왕의 좌에 오를 것을 천명하는 그 모습에 이진한은 피식 웃으며 프로스트의 그립을 다잡았다.

“지랄하네.”

「그 신성력은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쉬아아아악-!

공동안을 아우르는 파공성이 들이닥친다. 순식간에 이진한의 코앞에 이른 메피스토는 히죽 웃으며 가볍게 손을 뻗었다.

콰직-.

한 손으로는 그의 어깨를 잡고, 한 손으로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인간의 피륙은 너무나도 손쉽게 뜯겨 나가 피를 흩뿌렸다. 메피스토는 장난감을 다루듯 뽑아낸 이진한의 왼팔을 흔들며 그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이러면 어찌할 테냐. 그 잘난 신성력으로 공격해올 터냐, 아니면 또다시 바포메트 그 녀석에게 매달려 울부짖을 테냐. 뭐, 어느 쪽이든 나는 상관이 없…….」

“…내가 한말 기억해?”

메피스토의 말을 끊고 이진한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공격을 피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피할 이유도 없었고, 오히려 팔 하나로 상대의 방심을 끌어낸다면 이득이라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

메피스토의 두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분명 자신이 뽑아냈을 터임이 분명한 그의 왼팔이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제자리에 붙어있지 않은가. 환영 마법이라도 썼나 싶었지만, 그러기엔 자신이 쥐고 있는 팔은 허상 같지 않아 보였다.

“분명히 말했다. 곱게 죽을 생각하지 말라고.”

프로스트에서 일어난 눈부신 빛무리가 공동안을 베어 가른다.

메피스토는 뽑아낸 팔을 집어 던지는 것으로 검날을 잡아내려 했지만, 초월지경에 도달한 용사 클래스가 내뿜는 신성력은 이전의 것과 차원이 다른 신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서걱─!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메피스토의 커다란 몸 위로 새하얀 선이 그어진다. 마치 누군가 시커먼 바탕 위에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한 점의 비틀림 없이 이어진 그것은 이내 성화(聖火)를 피워 올리며 마기를 불태웠다.

「끄아악!」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메피스토는 절로 뒷걸음질 치며 신음을 토해내었다. 몸이 사선으로 잘려나간 것은 순식간에 회복한바. 하지만 그 위에 남은 신성력의 잔흔은 찰거머리같이 달라붙어 그의 격을 훼손시켰다.

「감히!」

신성력만 아니었다면 감히 자신에게 범접할 수 없었을 터.

메피스토는 연신 이쪽을 귀찮게 구는 그의 존재를 더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쿵-!

마치 소가 투사를 향해 달려들 듯 거칠게 땅을 박차고는 자신의 커다란 몸으로 그를 짓뭉갤 듯 덮쳐갔다.

맹렬한 기세로 주먹을 휘두르고 손톱으로 찢고 사지를 갈아버린다. 하지만 그 상처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잠깐 눈을 깜빡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한 모습으로 되돌아왔을 뿐이었다.

「이것도 받아 보아라!」

육탄전으로는 안 되겠다는 것을 느꼈는지 메피스토는 땅을 박차고 훌쩍 물러나 거리를 벌린다. 그러곤 하늘 위로 두 팔을 뻗어 자신이 지닌 모든 마기를 뿜어내었다.

파지지직─.

검붉은 파멸의 빛이었다. 이전보다 한층 더 짙어진 그 기운이 스파크를 뿜어내며 공동안으로 폭풍을 불러일으키며 막대한 마기를 흩뿌렸다.

「레퀴엠(Requiem)」

담담히 프로스트를 쥐고 있던 이진한이 고개를 들었다.

「불굴의 가호」 【00:17】

어떤 상처든, 어떤 저주든 순식간에 회복시켜주는 용사 클래스의 가호. 시작할 때 1분 남짓한 시간을 가리켰던 그것이 어느덧 끝을 고하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메피스토가 만들어낸 마기의 응집체가 그를 향해 쇄도해왔다.

마치 검은 태양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탐욕스럽게 잡아먹었고, 점차 덩치를 부풀리며 공동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스윽.

이진한은 가볍게 오른발을 내디뎠다. 상체를 살짝 숙이고 허리를 비트는 것으로 무게 중심을 앞으로 두었고, 프로스트 대신 꺼내든 무라마사를 비스듬히 쥐었다.

파앗-!

대현자의 눈이 순식간에 공간을 분할 한다. 이제까지의 시행착오가 헛되지 않았는지 그 작업은 순식간에 이루어졌고 메피스토를 베어낼 초석의 준비를 끝냈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은 단언 마법이었지만, 신성력과 마법은 서로 정반대의 성질을 띤 탓에 혼용할 수 없었다.

마법으로는 메피스토에게 치명타를 주는 것이 불가능했고, 신성력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면 저 농밀한 마기를 상쇄하지 못했다.

그러니 마법은 버리고, 그 이외에서 용사 클래스와 함께 가장 위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술을 택했다.

악마화한 자신의 목을 베고 승리를 쟁취할 뻔했던,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검호가 발한 최강의 검술.

검성류 오의 귀살(鬼殺)

끼이이이이이이익─.

무라마사가 떨리며 소름 돋을 정도로 기괴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용사, 라는 이름으로 사용할 만한 이름의 검술은 아니었지만, 귀신을 벤다는 점에서는 더없이 걸맞았다.

「고작 검 따위로!」

메피스토는 그것을 보고도 자신의 승리를 자신했다. 검붉은 파멸이 모인 응집체는 자신의 모든 것이 담긴 공격. 설사 상위 악마가 오더라도 막아내지 못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에 레퀴엠의 위로 힘을 실었을 때, 무라마사의 날이 번뜩이며 십자의 섬광을 뿜어내었다.

쉬아아악.

탐욕스럽게 입을 벌린 어둠이 빛을 잡아먹는다. 그 당연한 광경에 메피스토는 짙은 미소를 띠었으나, 이내 전신에 부닥치는 주체할 수 없는 고통에 두 눈을 크게 뜬 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끄아아아아악!」

그의 몸 위로 기다란 성흔(十)이 그어진다. 동시에 새하얀 불꽃이 피워 올라 전신을 집어삼켰으니, 공동안은 메피스토가 토해내는 처절한 절규로 가득 찼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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