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90화 (90/210)

◈ 090.

메피스토는 가늘어진 눈으로 자신을 찢어발길 듯한 살기를 발하는 이진한을 바라보았다.

손끝이 떨리고 호흡이 가쁘다. 땅을 딛고 선 무릎이 후들거리고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 것이 명백히 한계에 다다른 모습이다. 그럼에도 저런 기백을 내뿜을 수 있다니, 또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지.’

애초에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것부터 평범하지 않다. 미들턴에서 만남을 가졌던 마왕 마르바스는 그를 두고 용사라고까지 하지 않았는가.

어느 용사가 악마와 계약을 맺는가 싶었지만, 마왕 정도 되는 존재가 한 말이니 아예 없는 이야기가 아닐 터.

그렇기에 메피스토는 더 이상의 유예를 주지 않았다.

웅─.

검붉은 파멸의 빛이 손끝에 서린다.

이진한의 상태가 엉망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 역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본신의 모습으로 현현한 뒤에는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려 했으나, 오히려 이쪽이 당해버리지 않았는가.

‘상대가 내가 아니었다면 필시 거기서 끝이었겠지.’

거짓과 기만의 악마는 아무리 위기에 몰렸다고 할지라도 도망갈 구멍 하나쯤은 만들어 놓았다.

그렇기에 쓰러진 것을 가장해 기만을 했고, 그 의도는 보기 좋게 먹힌바. 아쉽지만, 더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러니 더는 기만하지 않으마.”

쉬익-!

파멸의 강선이 허공을 꿰뚫는다. 한 발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모를 변수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십수 발은 될 법한 마기가 레이저처럼 쏘아졌다.

“…컥!”

이진한은 맥없이 그것에 꿰뚫렸다. 두 팔이 찢겨 날아가고, 오른쪽 다리가 무릎 아래서부터 없어진다. 복부에는 굵직한 구멍이 뚫렸고, 다시금 시뻘건 피를 뿜어내며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흠.”

메피스토는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혹시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점점 고여가는 피 웅덩이에서 경련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신음을 토해낼 여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운 좋은 줄 알 거라. 어쭙잖은 녀석이었더라면 그대로 목을 뜯어버려도 시원찮건만, 네놈 정도의 재료는 흔치 않으니 말이야.”

메피스토는 조소를 토해내며 가볍게 몸을 돌렸다. 이제 그의 앞을 막아 세우는 이는 없는 상황.

고요해진 대지 가운데 내디디는 발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

메피스토가 고대 신의 잔재가 봉인된 공간으로 떠난 뒤, 이진한은 피를 토해내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말 그대로 걸레짝이 되어버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남아있지 않은 바.

그저 비릿한 피 웅덩이 속에서 점점 몸이 식어가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데…….’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엘릭서, 하다못해 포션이라도 마신다면 잘려 나간 신체를 재생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조금 전에 부닥쳐온 검붉은 파멸은 그에게 내려져 있던 온갖 가호를 전부 부숴버렸다.

더불어 몸에 들러붙은 농밀한 마기는 자가 치유 능력을 억눌렀고, 시시각각으로 그 생명력을 좀먹어가며 얼마 남지 않은 여력조차 빼앗아갔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른 이들은.’

하다못해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하지만 마녀 두 자매는 의식을 빼앗겨 널브러진 상태였고, 미르엘은 저 멀리 날아가 생사조차 불분명한 상황.

일레이나는 이미 옛적에 탈진해 쓰러졌고, 엘레오노라는 메피스토와 호에엥의 싸움에서 터져 나온 마력 폭풍에 얻어맞고 미동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안일했다. 너무 안일했다.

격렬한 싸움이었고, 확실한 일격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당연히 메피스토를 쓰러뜨린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치명적인 방심은 결국 헤으응을 죽게 만들었다.

“…아.”

메마른 쇳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신이 쓰러진 곳의 바로 앞으로 헤으응의 얼굴이 이쪽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심장을 빼앗겨 숨을 거두었을 때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투명한 푸른 눈동자는 일말의 미동조차 없었고, 입가에 흘러나온 핏줄기만이 늘어 붙어 시간의 경과를 알려주었다.

이 세계에 온 뒤로 누군가 죽은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아직 현실이란 것을 몰랐을 때 마경에서 암부를 죽였고, 미들턴에서 수없이 많은 병사와 기사가 몬스터 군단과 치열히 싸우다 죽는 광경을 보아왔다.

이 세계가 현실이란 것을 깨달은 뒤에도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손으로 수없이 많은 적을 죽이지 않았는가.

살아남기 위해선 당연하게 생각하던 일이었다. 어딘가 아직 게임을 하던 감각이 남아 있었는지 주저하지 않았고, 오히려 살짝 즐거움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이토록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말을 섞고, 미소를 짓고,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카락을 찰랑이고, 손가락을 움직이고, 차의 맛을 음미하던. 그 움직임이 모두 멎었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천년 이란 세월 동안 이곳을 지키는 사명만으로 살아온 존재들.

호문클루스라고 불렸지만, 딱히 이질감이 들진 않았다.

오히려 같은 동료였던 《영원》이 만든 피조물이기에 더 정감이 갔던 것 같다. 그래서 동생처럼 보살폈고 이번 싸움에서도 이때까지와 같이 조금의 고난은 있겠지만, 끝에선 전부 웃으며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마 자신들은 머지않아 다른 곳으로 또 여정을 떠났을 터.

그래도 간간이 이곳으로 놀러 와 그녀들과 차를 마시고, 온천을 즐기고, 여러 이야기도 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죽었다.

시야의 반이 암전되고,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과 함께 피가 터져 나와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르는 미래는, 자신의 오만으로 인해 모조리 헛되게 변해버렸다.

‘인정하자.’

이진한은 하나 남은 다리로 피에 젖은 땅을 밀어냈다. 질퍽해진 진흙은 깊게 흔적을 남기며 그의 발을 붙들었지만, 그는 아주 조금이라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하와와에게 도달했다.

‘나는 이 세계를 얕봤다.’

이진한은 입술로 천천히 그녀의 눈을 감겨주곤 하늘을 바라보았다.

피와 진흙에 절은 머리카락이 엉켜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엉망이 된 뺨을 타고 진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상은 몇 번이고 경고해왔다. 이곳은 절대 만만한 곳이 아니라고.

하지만 자신은 이때까지 게임이었을 적의 기억에 취해 있었다. 현실은 용기도 없고 의지조차 박약한 폐인에 불과할 뿐인데 누군가 떠받들어 주니 뭐라도 된 것처럼 주제를 모르고 설쳤다. 그렇게 꼴에 맞지 않는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 대가가 바로 이 꼴이었다.

“…야.”

텅 빈 고요 가운데 짤막하게 토해진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아이템이든, 몸이든, 영혼이든.”

뭐든 다 줄 테니까.

이진한은 자신과 계약한 악마에게 속삭였다.

“제발 저 새끼를…….”

저 새끼의 모가지를 꺾을 수 있는 힘을 달라.

한 줌의 마기라도 상관없다.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대가로 줄 수 있다. 그러니, 그러니 내 말에 대답해라.

살면서 이렇게 간절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진심이 담긴 바람이었다.

하지만 바포메트는 침묵했고, 마기에 오염된 한쪽 눈동자만이 액체가 되어 피 웅덩이로 흘러내렸다.

“…….”

무릎을 꿇은 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던 이진한의 입으로 허무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더는,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치사량을 넘은 출혈을 견딜 수 있던 것도 여기까지.

온몸이 싸늘하게 식으며 죽음의 유예가 머지않았음을 알려왔다.

하나 남은 눈 역시 천근만근 무거웠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는다면 그래도 눈꺼풀이 닫혀 저 깊은 심연으로 의식이 빠져버릴 것 같은 수마가 닥쳐왔다.

그렇게 그 몸이 비틀리며 옆으로 쓰러져 내릴 차, 이진한은 하와와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파우치로 시선이 갔다.

“…포션.”

마나 포션.

이전에 자신이 예비용으로 쓰라고 건네준 것이었다. 세 병 중 두 병은 이미 빈 것이었지만, 마지막 한 병만은 내용물을 찰랑거리며 온전히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끅.”

이진한은 흘러내릴 것만 같은 의식을 부여잡으며 그곳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덜렁거리는 이빨로 포션의 뚜껑을 물어 파우치로부터 빼냈고 그것을 마시려 했다.

하지만 입만으로는 그 뚜껑을 여는 것이 불가능한 일.

그렇기에 그는 포션의 병을 바닥에 떨어뜨려 금이 가게 했다. 남은 것은 그곳을 물어 유리를 깨부수는 것이었다.

파각.

그 노력이 통했는지 포션의 병이 부서지며 내용물이 흘러나왔다. 다만, 유리 조각 역시 그것에 휩쓸렸고, 이진한의 입가와 그 내부를 찢으며 피투성이로 만들어버렸다.

일부는 포션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지만, 목 내부를 긁는 그 끔찍한 감촉에도 이진한은 멈추지 않은 채 그것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넘겨버렸다.

뚝, 뚝…….

찢어지고 유리 조각이 박힌 입가로부터 흘러내린 핏물이 턱 끝을 타고 흘러내린다. 하나 남은 눈에 핏발이 서고 부릅 뜨일 정도로 고통스러웠으나, 덕분에 흐려가던 정신이 맑아졌다.

“끄윽….”

부작용으로 전신의 고통이 여실 없이 느껴지게 되었지만, 이진한은 개의치 않았다. 포션으로 얻은 한 줌의 마나로 체내를 끊임없이 자극했고, 하나 남은 다리로 땅을 밀며 메피스토가 들어간 틈을 향해 느린 속도로 기어갔다.

‘설령….’

설령 이대로 죽는다고 하여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여기서 눈을 감는다면 일말의 희망조차 사라져버릴 터. 그렇게 된다면 자신을 믿고 따라온 이들조차 저버리는 일이 되었다.

그렇기에 이진한은 죽기 직전까지, 아니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게 될 때까지 발버둥 칠 각오를 했다.

「불굴」

「꺾이지 않는 의지를 지닌 이를, 우리는 용사라 부르나니.」

“…뭐?”

돌연 그의 눈앞으로 상태창의 알람이 떠오른 것도 그와 동시였다.

「이 땅 위에 스러지는 모든 비참한 존재를 위하는 운명을 지닌 자여, 일어나 검을 들어라.」

「세상 모든 것이 너를 찬양할지며, 모든 비루한 것이 네 뒤에 서리니, 너는 오로지 그들을 위하여 물러나지 않을 따름이다.」

꽈드득─.

그 순간 전신에 닥쳐오는 아득한 충격에 이진한의 몸이 경련했다.

부러지고 조각난 뼛조각들이 모여든다. 찢겨나가고 뒤틀렸던 근육은 제자리를 되찾았고, 잘려나간 신체 부위가 빠른 속도로 재생되며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커헉….”

더없이 신성한 기운이 전신에 서린다.

이진한은 체내 깊숙한 곳까지 잠식해있던 마기가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역류하는 것을 모조리 토해내었다.

눈과 입으로 피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들이 줄줄이 흘러나온다. 누군가 본다면 지상에 신의 기적이 내려왔다며 찬사를 보냈을 장엄한 광경.

하지만 이진한은 이것이 가호가 아니라 자신을 옭아매는 저주임을 깨달았다.

「쓰러지지 말지어다.」

「두 발은 뭉개져도 굳건할 것이요, 두 다리는 잘려나가도 몸을 지탱할 것이니.」

신체가 전부 완전한 상태로 수복된다. 메마른 마나 대신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한 신성력이 몸을 가득 채웠고, 이진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용사』

불굴(不屈)의 의지를 지닌 자.

불의(不義)를 참지 아니하는 자.

모든 약한 자들의 편에 서는 자.

하늘은 운명을 거스르려 발버둥 치는 자를 크게 들어 쓰시나니.

[성직자 클래스의 경험치가 충족되었습니다.]

[용사 클래스에 도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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