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9.
“…….”
이진한은 바포메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악마화의 강림으로 인해 서로 간의 연결은 그 어느 때보다 강화된 상태. 언어는 다를지라도 그 의지를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답변이 오리라 생각했지만, 얼마 후에도 바포메트는 침묵을 고수했다.
‘…이러면 나가린데.’
기껏 얻은 기회였다. 바포메트의 공격 역시 메피스토에게 확실하게 먹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간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이 확실할 터.
문제라면 바포메트의 움직임이 너무 투박하다는 것이었다.
닥쳐오는 공격은 막거나 피해내고, 상대의 빈틈이 보이면 앞뒤 가리지 않고 공격을 꽂아 넣는다. 마치 기계를 보는 듯한 너무나도 정석적이고 정직한 반응이었다. 물론 그것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이었지만, 거짓과 기만의 악마를 상대하기엔 한참이나 부족했을 따름이었다.
『살아온 세월과 달리 싸움 실력은 형편없군!』
메피스토 역시 어렵지 않게 그 패턴을 파악했는지 능숙한 몸놀림으로 바포메트를 농락했다. 이제껏 제법 팽팽하게 이루어지던 균형이 순식간에 깨어져 나갔고, 부식독이 전신에 퍼진 바포메트는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주도권 넘겨! 이대로 저놈한테 질 거야?!”
이진한은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차라리 이 안에서 빠져나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찌된 영문인지 끝없이 펼쳐진 검은 사막을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겨우 회복되어가는 마나 회로를 활성화하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일단 어디라도 초월 마법을 갈기면 무슨 반응이라도 있을 터.
그와 동시에 이진한의 의식이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
한층 너머로 바라보던 풍경이 자신의 것이 된다. 높게 떠오른 시야. 전신을 뒤덮은 이질적인 감각. 그리고 자욱하게 피어오른 마기까지 모두 통제 자신의 통제 아래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젠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해진 것이냐.』
메피스토는 조소를 흘리며 이쪽에 결정타를 가하기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진한은 제자리에 서서 바포메트의 육신으로 손을 주억거렸고, 빠르게 그 몸을 움직이는 데에 필요한 감각을 익혀나갔다.
‘…이, 건. 두 번은 못 하겠는데.’
뇌에 들어오는 정보량이 어마어마했다.
단순히 덩치가 커진 것이 끝이 아닌 듯 미간이 뜨거워지며 코피가 터져 나오는 듯한 어지러움이 뇌리에 닥쳤다. 대마도사의 처리 능력으로도 부족할 정도면 어찌나 강대한 힘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 덕분에 이진한은 바포메트의 힘을 일부나마 이해할 수 있었고, 이때까지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싸운 것인지 확연하게 깨달았다.
구우우우─.
제일 먼저 그가 한 것은 고개를 하늘로 젖힌 것이었다. 더불어 입을 크게 벌렸고, 속에서부터 제 존재를 상징하는 마검을 꺼내 올렸다.
마검(魔劍) 그라나다(Granada), 그것이 본래 주인의 입에 토해져 나오며 그 손에 쥐어졌다.
『…또 기묘한 술수를.』
메피스토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몸을 낮췄다. 이제 어지간한 수작은 통하지 않는다는 듯 흉흉한 기세를 뽐내며 발을 굴렀고, 이내 얼어붙은 대지를 박차며 빛살처럼 달려왔다.
그 가운데 이진한은 그라나다를 양손으로 쥐어 올렸다. 그러자 중구난방으로 뿜어지던 바포메트의 마기가 그라나다의 위로 응축되었고, 말 그대로 하늘을 베어 가르며 쇄도하던 메피스토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고작 마검 따위로!』
메피스토의 이빨이 다시 번뜩인다. 이번엔 그 목에 직접 독을 주입해 숨통을 끊어놓을 요량인바.
다리 하나 정도는 내주어도 바로 재생하면 그만이었기에 과감히 안쪽으로 파고들었고.
서걱-!
지평선 너머로까지 쇄도한 검은 일 선이 그 몸을 무참히 베어갈랐다.
『……!』
가까스로 머리가 잘려 나가는 것은 피했지만, 달려오던 기세와 맞물려 기다랗게 잘려 나간다. 비단 제물로 바치려 했던 앞발뿐만 아니라 몸의 절반이 휘말렸고, 종래엔 바포메트를 지나쳐 반신만 남은 채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쉬아악!
물론 메피스토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머리부터 바닥에 처박힐 찰나, 다시금 길게 목을 빼냈고 정말로 뱀이 움직이는 것처럼 대지를 가르며 바포메트의 목을 물어뜯어왔다.
그것을 눈치챈 이진한이 황급히 몸을 돌리며 대응하려 했지만, 애초에 자신의 몸이 아닌 상황에서 그렇게 빨리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콰악-!
부식독이 중추를 파고든다. 전신을 울리는 저릿한 고통에 그는 비틀거리며 주저앉았지만, 이내 마검을 쥔 손에 힘을 불어넣으며 억지로 땅을 박찼다.
‘어차피 내 몸도 아닌데!’
한 차례 힘을 소모한 그라나다가 다시금 시커먼 빛을 발한다. 그것이 최후의 발악임을 깨달은 메피스토가 더욱 독기를 뿜어내었으나, 이진한은 더없이 날카로운 기세로 몸을 돌리며 제 목을 깨문 메피스토의 목을 베어버렸다.
서걱-!
그 파열음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귓가에 사무쳤다. 온 힘을 다해 그 목을 물고 있던 메피스토의 두 눈이 경악으로 크게 물들었고, 이진한은 손을 뻗어 그것을 떼어내며 말했다.
‘엿이나 먹어라.’
여력을 쥐어짜내 마구잡이로 휘둘러진 마검이 그 머리를 수십 갈래로 도륙한다. 그것도 모자라 이진한은 거의 넘어지듯 땅을 박찼고, 머리를 잃은 메피스토의 몸뚱이에 마검을 꽂아 넣으며 다시는 회생하지 못하도록 처참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종래엔 마화(魔火)까지 내뱉어 한점의 살점조차 남기지 않고 태워버리는 것을 끝으로 마검을 땅에 꽂아 넣으며 하늘을 향해 포효를 내질렀다.
[잔여 마기가 모두 소모되었습니다.]
[악마화(惡魔化) 「강림」이 해제됩니다.]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대폭 하락합니다.]
[일부 클래스가 비활성화됩니다.]
…[악마화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수도 없이 많은 알람이 떠오른다. 바포메트 역시 한계인 듯 현현을 유지하지 못했고, 연기가 바람에 흩어지듯 마기로 변해 이진한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아. 죽겠다.”
다시 원래 인간의 몸으로 돌아온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자욱한 구름이 깨끗하게 반으로 잘려 나간 하늘을 바라보았다.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대폭 하락했다는 것은 허언이 아닌 듯, 상태창을 확인해보니 원래의 3할도 채 되지 못하는 수치가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미르엘과 싸운다고 할지라도 고전을 면치 못할 터.
그래도 이제껏 맞서 싸웠던 적 중 가장 강한 적을 쓰러뜨렸다는 쾌감이 전신에 팽배해 있어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베르너 님-!”
저 멀리서부터 이쪽을 향해 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엘레오노라를 비롯해 다른 이들 역시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바닥에 내려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
“…꼴이 말이 아니네요. 사지가 멀쩡히 붙어 있는 게 신기할 정도에요.”
지친 표정의 일레이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 모습에 이진한은 씩 웃으며 그녀에게 이죽거렸다.
“난 그래도 팔은 안 날려 먹었는데.”
“…진짜 개악질. 내가 미쳤다고 이런 사람을 따라다녀서.”
일레이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그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이진한은 그때까지 웃음을 흘리고 있었지만, 옆구리부터 닥쳐오는 통증에 진심으로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웅크렸다.
“야, 야, 잠깐만. 나 지금 진짜 죽을 것 같거든?”
“…오호.”
일레이나가 두 눈을 빛낸다. 앞으로 더 없을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하나 남은 손을 주억거려왔고, 그 가슴에 정권이라도 찔러버릴 심산으로 보였다.
-그래도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정말로 어떻게 되는지 알았어요.
“…그래, 좋게 끝나서 다행이네.”
앞으로의 여정 가운데 항상 해피 엔딩만 있는 것은 아니리라.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승리의 여운을 만끽하는…….
푹-!
-…….
하와와의 어깨가 들썩인다. 웃는 낯으로 이진한과 이야기를 하던 그녀는 이내 멍한 표정을 지으며 밑을 내려다보았다.
-…무, 슨?
일정한 간격으로 펄떡거리며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심장이 누군가의 손에 붙들려 그녀의 가슴을 꿰뚫고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꽤 고생을 시켰어. 처음부터 이럴 것을.”
이진한과 같은 인간의 형태로 변한 메피스토는 서늘한 안광을 내뿜으며 말했다.
그 가운데 있던 모두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해 경계심이 가라앉아있던 차.
제일 먼저 그 상황을 파악한 것은 바로 옆에 있던 호에엥이었다.
-어, 언니!!!!!!!!!
-네놈!!!
호에엥이 절규를 내지름과 동시에 헤으응이 검을 휘두르며 번뜩이는 검광을 뿜어낸다. 하지만 메피스토는 가볍게 발길질을 하는 것으로 그녀의 몸을 차버렸고, 하와와의 가슴에서 심장을 빼 들었다.
“해석은 이미 끝났다. 초월이니 뭐니 해도 어차피 인간의 마법. 《영원》이 살아돌아와 직접 펼치지 않는 이상 그것을 꿰뚫어보는 것은 어렵지 않지.”
쉬아아아악-!
온갖 기하학적인 술식이 주변에 내려앉는다. 그와 동시에 결계를 옭아매고 있던 잠금장치가 풀려나갔고, 그의 앞쪽으로 고대 신의 잔재가 자리한 지하의 공간이 열렸다.
쐐애애액-!
미르엘이 여력을 아끼지 않으며 몸을 날렸다. 농밀한 빙결의 권능이 극한으로 활성화하며 잘 벼린 칼날을 만들어낸다. 어지간한 망령이라도 그것을 받아내기 어려웠겠지만, 메피스토는 가볍게 움켜쥔 주먹을 휘두른 것으로 그녀의 공격을 무위로 만들고, 수십 미터는 날아가 땅에 처박힐 정도의 카운터를 날렸다.
“미르엘!!”
미르엘이 저 멀리 나가떨어지자, 엘레오노라가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녀 역시 안전한 것은 아닌바.
더 이상의 반항은 허락지 않겠다는 듯 그 목을 향해 손을 뻗어왔다.
우웅-!
이진한이 건네준 반지가 강력한 결계를 만들어내며 그 접근을 거부한다. 메피스토는 같잖다는 듯 웃음을 토해내며 가볍게 그것을 갈랐으나, 정신을 차린 호에엥이 귀기 어린 기세로 날린 얼음의 창에 몸을 꿰뚫렸다.
“…귀찮게.”
메피스토는 손에 쥔 하와와의 심장을 뭉개버리고 제 주위로 농밀한 마기를 피워 올렸다. 하지만 이성을 잃은 호에엥의 힘도 만만치 않은바. 서로가 그렇게 격돌하고 있을 때, 여전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인 이진한의 시선은 바닥으로 쓰러져 내린 하와와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베…르너…님.
“야, 잠깐 말하지 마. 나 진짜 조금만 더 회복하면 신성력으로 치료할 수 있어. 심장은 처음이지만, 그래도 대충은 구현할 수 있을 테니…….”
-…동생들…부탁…….
그 말을 끝으로 푸른 눈동자에 깃들어 있던 생명의 빛이 꺼진다. 마치 인형과 같은 모습이었다. 만들어진 생명체인 호문클루스는 인간보다 더 질긴 생명력을 자랑했지만, 그 중추의 핵인 심장이 파괴된다면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월드’에는 소생 마법이 없었다.
“…하와와.”
이진한은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이때까지 옅은 미소와 함께 자신을 바라봐오던 그 얼굴은 더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저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만들어진 생명체 주제에 무엇이 그리 필사적인지. 네놈들의 뇌리에 새겨진 그 같잖은 사명은 단순히 입력된 정보인 것에 불과하거늘.”
메피스토는 그 순간 호에엥의 모든 마법을 격파하고, 손을 뻗어 그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가한다면 이 덧없이 만들어진 생명체는 금방 숨을 거둘 터.
-이, 이, 나쁜 놈!
호에엥은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짧은 두 팔다리를 휘둘러 메피스토를 때렸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유효타가 되지 않는바.
그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무려 《영원》의 피조물이니 가치는 있겠지. 하나 정도는 살려서 실험 재료로 써먹어야겠어.”
그러곤 몸을 돌려 고대 신의 잔재가 봉인된 곳으로 통하는 문을 향할 찰나.
“…….”
메피스토의 발걸음은 우뚝 멈춰 섰다.
“…아직도 죽지 않았다고? 그 정도의 악마에게 삼켜지고도 자아를 유지할 수 있을 수가…….”
“야.”
이진한은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키며 메피스토를 바라보았다.
다리엔 감각이 없고, 손끝은 덜덜 떨린다. 솔직히 말해서 시야도 희뿌연 것이 사물의 식별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
“너는 곱게 죽을 생각하지 말아라.”
하지만 전신의 근육이 메말라 꽉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 가운데서도, 이진한은 선명한 살기를 피워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