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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88화 (88/210)

◈ 088.

“…괜찮아요?”

엘레오노라는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일레이나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원래 그녀는 미르엘과 함께 성벽에 짓쳐 드는 망령 군단의 상대를 담당했지만, 흑요석의 기사들이 생각 이상의 분전을 해주어 예상보다 수월하게 방어선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던 찰나 저택 쪽에서 감도는 불길한 기운의 응집을 느꼈고, 하다못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성벽의 수호를 미르엘에게 부탁한 채 서둘러 이쪽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직후 갑작스럽게 나타난 거대한 존재가 쏘아 보낸 강선에 의해 저택이 뼈대만 남기고 반파되어버린 상황.

마녀 세 자매는 그리 큰 피해 없이 막아낸 듯했지만, 비교적 상태가 온전치 못했던 일레이나는 정말로 한계가 찾아온 듯싶었다.

“이게 괜찮아 보이는 거면 당신 정신이 나간 게 아닌지 이쪽에서 의심이 들 정돈데요.”

“말할 기력은 남아있군요. 다행이네요.”

툴툴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엘레오노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날 수 있도록 그 몸을 부축해주었다. 그러던 찰나 왼쪽의 빈 어깨를 발견한바.

자신을 바라보던 주홍빛 눈동자가 크게 뜨이자 일레이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별거 아니에요. 어깨 하나면 싸게 치른 거죠.”

“치료, 가능하겠죠?”

“그 사람이 어떻게든 해준다고 했어요. 하나 더 달아줄까 하는 소리는 뭐야 정말. 그게 팔 뜯긴 환자한테 할 농담인가.”

“…베르너 님 답네요.”

베르너뿐만이 아니었다. 일레이나도 어느새 그에게 동화되어 가는지 이전보다 사뭇 터프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어려운 상황인 모양이에요. ‘저게’ 나타난 이후로 고전하고 있기에 이쪽에서 조금 도와주려 했는데…….”

“그 여파로 조금 전의 공격에 휩쓸린 거군요.”

“괜히 벌집을 쑤신 꼴이에요.”

끄응,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킨 그녀는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겼고, 이내 커다란 잔해에 다가가 등을 기대며 털썩 주저 앉았다.

쿠구구궁─.

그와 동시에 다시 대지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일레이나는 밑에서부터 느껴지는 진동에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들었다. 또 무슨 불똥이라도 튀어 오는가.

하지만 돌연 메피스토의 앞으로 솟구친 낯설지 않은 거대한 존재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녀의 두 눈이 커다랗게 커졌다.

『근본조차 없는 하등한 악마 따위가 이곳이 어디라고 기어 나오느냐!』

지상을 자욱이 뒤덮어가는 마기의 발현에 메피스토는 일그러진 얼굴로 힘껏 발을 내려찍었다.

중간계의 현신.

그것은 지고한 존재들조차 막대한 인과율과 제약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대체 무슨 방법을 쓴 것인지 단지 오래 살았을 뿐인 이성도 지성도 없는 버러지 같은 녀석이 이곳에 현신하려는가.

마계를 상징하는 72 마왕의 계보를 이은 악마인 메피스토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쿵.

하지만 기세 좋게 대지를 짓밟았던 그의 발이 어느 순간 멈춰 세워졌다. 곧 기다란 손톱을 지닌 푸른 손이 튀어나와 그것을 움켜잡았고, 이내 순리를 역행하며 밀어내기 시작했다.

『감히!』

메피스토는 기함을 토해내며 제 입으로 검붉은 파멸의 마기를 모았다. 같은 악마라 불린다고 할지라도 그 격에 있어서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서로 중간계에 현현해 제약을 받는 상태이긴 하지만, 그 격차는 쉬이 뒤집을 수 없는 것일 터.

파아아아앗-!

대지를 반으로 가르고 저택을 짓뭉갠 마기의 강선이 나선을 그리며 쏘아진다. 하지만 메피스토의 발을 밀어내며 솟구친 바포메트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지잉-!

시퍼런 눈동자 위로 막대한 마기가 응집된다. 그것은 이내 메피스토가 쏘아낸 파멸의 강선보다 더 얇게 응축되어 한 점으로 허공을 꿰뚫었다.

『……!』

메피스토는 무심코 고개를 젖혔다. 정말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동시에 가늠할 수 없는 밀도를 지닌 기운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고, 그 비늘을 기다랗게 찢으며 깊은 상처를 만들어내었다.

구오오오─.

사바트의 염소.

청안(淸眼)의 악마.

시작이 없는 역사를 지닌 마계에서도 언제부터 존재했었는지 모를 존재.

산양의 뿔과 머리, 그리고 푸른 피부와 더불어 덥수룩한 털로 뒤덮인 두 다리로 일어선 바포메트는 그저 그 자리에서 안광을 빛내며 주춤하는 메피스토를 내려다보았다.

『…….』

피하지 않았다면 꿰뚫렸다. 의심할 여지도 없는 사실에 메피스토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물론 중간계에 현현했다고 할지라도 정말로 그 본체가 강림한 것은 아니었다. 중간계에 나온 것은 격의 일부로, 당연히 그 본체는 여전히 마계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냐.』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리가 없었다.

서로 제물로 삼은 것은 비슷한 경지의 인간인바. 그렇다면 그 몸을 옭아매고 있는 제약은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그럼에도 바포메트의 힘이 더 강력하다면…….

‘애초에 녀석이 나보다 강했다?’

메피스토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저 오랜 시간 존재했을 뿐이 전부인 녀석이 자신보다 강함을 논하다니. 그렇기에 주춤하던 모습을 버리곤 거칠게 땅을 박찼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지축을 울리는 지진과 함께 대지 위로 큰 흔적이 남는다. 이윽고 메피스토는 바포메트의 몸을 덮쳤고,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며 그 어깨를 물어뜯으려 했다.

거짓과 기만 사이로 깃든 독이 체내에 파고들면 순식간에 산화되어 녹아내린다. 막을 방법도 치료할 수단도 없기에 고위 마족조차 그와 싸우는 것을 꺼릴 정도였다.

하지만 바포메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길쭉한 손톱을 지닌 두 손으로 메피스토의 목을 붙잡았고, 그의 발톱이 자신의 어깨를 파고들며 고통을 주었음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꿋꿋이 견뎌내었다.

『어림없다!』

메피스토가 그 코앞에서 입을 벌리자 검붉은 파멸의 빛이 서린다. 이대로 여유를 주지 않은 채 얼굴을 짓뭉개버릴 심산이었다. 아무리 바포메트라 할지라도 이런 지척에서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마기를 쏘아 보냈지만, 이제껏 굼뜨던 바포메트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변했다.

드드드득-!

얼어붙은 대지에 깔린 그 몸이 미끄러지듯 밑으로 빠져나간다. 그러곤 꽉 움켜쥐고 있던 메피스토의 목을 땅 위에 처박으며 쏘아지는 마기를 재주 좋게 피해냈다.

『…놈!』

메피스토 역시 날카로운 발톱으로 바포메트의 어깨를 붙들고 늘어졌다. 어떻게든 놓치지 않기 위해 관절이 뒤틀리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힘을 가했고, 바포메트는 창백한 피부가 사정없이 뜯겨 나가며 구멍 난 대지에 녹색 강이 흐를 정도로 많은 피를 흘려내었다.

화아앗-!

그것으로 끝이었다면 이어지는 상황에서 메피스토가 우위를 점할 수 있었을 터.

돌연 날카로운 이빨이 솟아 있던 바포메트의 입안으로 시퍼런 불길이 휘몰아치며 작열하는 열기를 피워올렸다.

『…이건!』

지척에서 용솟음치는 그 뜨거움에 메피스토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바포메트를 상징하는 것은 염소의 뿔, 그리고.

파아아아앗-!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는 지옥의 불꽃, 마화(魔火)였다.

메피스토는 황급히 그의 살갗을 찢어발기던 발톱을 풀어 헤쳤다. 그러곤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박쥐의 날개를 격렬하게 펄럭거리며 바포메트로부터 떨어지려 했지만, 해일처럼 밀려든 청염(靑炎)이 한 발자국 먼저 그 몸을 휩쓸었다.

『끄아아아악!』

웅장함을 자랑하던 한 쌍의 검은 날개가 불에 타 바스러진다. 영롱한 빛을 흩날리던 사자의 갈기는 노랗게 타들었고, 매끄러운 비늘을 뽐내던 뱀의 머리는 시커멓게 물들었다.

메피스토와 함께 얼어붙은 숲을 휩쓸던 마화의 분노는 그가 대지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를 때가 돼서야 끝이 났다.

구우우웅─.

바포메트의 움직임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고개를 든 그는 여전히 겨울 숲의 밖으로부터 짓쳐 들고 있는 망령 군단을 보고는 다시금 거센 마기를 피워 올렸다.

지이이잉-!

그 눈에 응축된 마기가 레이저처럼 순식간에 쏘아진다. 그것은 기다랗게 이어지며 지평선을 쭉 그어버렸고, 휘말린 망령들은 단말마조차 내뱉지 못한 채 순식간에 소멸해버렸다.

쐐애애애액-!

그 찰나, 고통에 몸부림치던 메피스토가 뱀의 목을 길게 빼낸 다음 순식간에 머리를 날려왔다. 자신이 당한 것에 복수라도 하려는 듯 날카롭게 이빨을 세웠고, 이내 허점이 드러나 있던 어깨를 꽉 물어버렸다.

바포메트는 그 즉시 반응하며 반쯤 타들어 간 뱀의 목을 움켜쥐었지만, 메피스토는 더욱 깊숙이 이빨을 박아 넣고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걸로 네 놈도 끝이다! 멈추지 않는 부식에 휩싸여 녹아내려라!』

푸쉬식-.

체내에 독이 침투하자 이빨 자국으로부터 진한 연기가 새어 나온다. 동시에 창백한 피부가 문드러졌고, 마치 강한 염산이라도 부은 듯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바포메트는 움켜쥔 뱀의 목을 터트리려 했지만, 먼저 그 의도를 파악한 메피스토가 한 발자국 더 빨리 제 몸을 빼내며 거리를 벌렸다.

『으하하하! 악마에게 먹혀버려 의식조차 없는 것이더냐! 참으로 꼴사납기 그지없는 모습이로구나!』

감히 인간의 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 마디 신음조차 내지르지 않았다는 것은 계약한 악마에 동화되어 원래 있던 존재의 의식은 저 깊은 심연에 빠져 사라져버렸다는 것일 터.

“…….”

실제로 바포메트와 메피스토가 서로의 목을 물어뜯으며 싸우고 있음에도 이진한의 의식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애초에 이때까지의 싸움으로 입은 상처가 적지 않은 데에다 장시간 악마화를 유지하며 싸워온 것으로 한계에 도달했던 상황. 바포메트의 현신에 맞춰 그 품에 스며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메피스토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달리 바포메트와 이진한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약해졌다고 할지라도 잡아먹지 않았으며. 그저 자신의 강림이 되는 숙주를 품 안에서 조용히 보호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메피스토의 부식독이 바포메트의 체내를 파고들면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취이익.

마기가 녹아내리며 그 깊은 심처까지 독기가 도달한다. 그리고 종래엔 그 중심에서 의식을 잃은 채 회복 중이던 이진한을 몸을 건드렸고, 강력한 부식독에 의해 살갗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

주체할 수 없는 아픔.

그것은 피로로 인해 심연에 잠겨 있던 그의 정신을 각성시키기에는 차고 넘치는 것이었다.

“…아악! 씨팔, 이게 뭐야!”

이진한은 육성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두 눈을 번쩍 뜨고는 제 왼팔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끝으로부터 살점이 녹아내리고, 뼈마디가 뚝뚝 끊겨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모든 신경이 손끝에 집중되어 있기에 주위의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한바탕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부식독이 묻은 손목을 통째로 베어버렸다.

서걱.

바닥에 떨어진 손목은 이진한을 지키는 가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순식간에 잠식당했다. 이윽고 시큼한 냄새를 내며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고, 잘린 팔에선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대체 이게 무슨 일….”

포션을 뿌리고 신성력으로 잘려 나간 손을 재생시키며 가쁜 숨을 내뱉던 이진한은 곧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주위로는 끝도 없어진 어둠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마치 누군가의 눈으로 보는 듯한 시야가 나타나 있었으니.

“…이건.”

악마화(惡魔化) 「강림」

이진한은 그 뜻을 깨닫고는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과의 계약을 매개로 바포메트가 중간계에 현신한 것이리라.

문제라면, 저 너머로 보이는 상황도 그리 좋지는 못해 보였다는 점이었다.

“어이, 바포메트. 내 목소리 들리지?”

이진한은 자신의 주위로 닥쳐드는 부식독을 신성력으로 정화하며 바포메트에게 말을 걸었다.

“주도권 나한테 넘겨. 그러면 저 빌어먹을 모가지를 비틀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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