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대현자가 되었다-87화 (87/210)

◈ 087.

Lv.???? 「메피스토펠레스」

고개를 끝까지 젖혀도 그 덩치가 시야에 전부 들어오지 않았다.

덩치뿐만이 아니었다. 대현자의 눈은 메피스토가 본신으로 강림한 직후부터 분석을 시작했지만, 애석하게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 강함을 해석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알려왔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이진한은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멋지게 등장한 것까지는 좋았다. 일레이나가 상처를 입은 것을 보고 눈이 뒤집혀 녀석을 몰아세웠고, 이 이후에는 기껏해야 한두 단계 정도 업그레이드되는 페이즈 정도만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이쪽은 악마화의 능력을 얻은 덕분에 이제 같은 초월지경이라 할지라도 어렵지 않게 찍어누를 힘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트루마크도 역시 악마화 이후 난타전으로 들어가자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한계를 맞이하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메피스토인지 메이플스토리인지 하는 악마도 어렵지 않게 쓰러뜨릴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상대의 강함이 가늠조차 되지 않는 것은 상정 외의 상황이었다.

구우우웅─.

메피스토는 천천히 자신의 앞발을 들어올렸다. 이진한으로서는 단지 그것만으로 하늘이 뒤덮이고 시커먼 그림자가 사방을 뒤덮은 듯한 광경이었으나, 막대한 질량이 짓눌러오는 가운데 언제까지고 여유롭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 씹!”

콰아아앙-!

자욱한 먼지가 피어오르며 얼어붙은 숲 일부가 짓밟혔다. 아차 하는 순간에 압사당할 뻔한 그는 그림자 순신을 이용해 겨우 범위 밖으로 빠져나왔고, 땅을 짚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아까 멀찍이 날려 보내서 다행이네. 저택이랑 한꺼번에 짓밟힐 뻔했어.”

메피스토가 다시금 발을 들어 올리자 그 밑으로 수십 명은 들어갈 수 있을 법한 흔적이 생겨났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이진한은 짧게 숨을 토해내며 정신을 다잡고는 다시금 용아청성창과 무라마사를 쥐었다.

‘바포메트도 잡았는데 이 녀석이라고 해서 못 쓰러뜨릴까.’

제아무리 강하다고 할지라도 초월 마법의 연격을 버텨낼 수 있을까. 고대 악마의 방어력마저 깎아냈으니 어쩌면 메피스토라도 타격을 줄 수…….

쉬아아아악-!

검붉은 빛이 메피스토의 눈으로부터 이쪽을 향해 쏘아진다. 그 굵기와 길이는 이전과 차원이 다른 규모로, 지반을 순식간에 녹여버리며 걸리는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켰다.

이진한은 황급히 용아청성창과 무라마사를 놓아버리고 그라나다를 쥐었다. 효율이니 날카로움이니 따질 때가 아니었다. 순수한 힘에서 무참히 밀려버린다면 저 깊이 파인 흔적에 휘말려 존재 자체가 지워져 버릴 신세이지 않은가.

파아앗-!

그와 연결되어있는 바포메트가 대항의식을 느낀 것인지 마검(魔劍)이 격동하며 주체할 수 없는 마기를 내뿜기 시작한다. 마치 폭포수처럼 흘러나오는 그 농밀한 기운에 이진한은 덜덜 떨리는 그라나다를 두 손으로 부여잡으며 씩 미소를 지었다.

“그래, 싸우려면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지!”

상대의 공격에 주춤하며 물러나려던 모습을 집어치우고 두 다리에 힘을 실었다. 그러곤 힘껏 땅을 박차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파멸의 재앙을 향해 몸을 날렸고.

파각─.

“…….”

무참히 박살 나고 말았다.

전신을 아득히 강타하는 막대한 충격에 일순간 의식이 끊긴다. 땅을 몇 번이나 굴렀는지 모른다. 그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신이 난자당한 상태로 땅을 구르다 멈춰 섰을 따름이었다.

“…컥.”

마나가 역류하는 것인지 내부가 진탕되었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발버둥 쳤지만, 안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피가 입을 타고 흘러나왔을 때 손끝에서부터 기력이 빠져나갔다.

“진짜 뒤질 것 같네…….”

날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했다. 하지만 아파 뒤질 것 같음에도 강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진짜로 죽는 듯싶었다.

머릿속에 차오른 쓸데 없는 상념을 피와 함께 토해버린 그는 흔들리는 시야 가운데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메피스토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초월지경.』

『고작해야 인간인, 고작해야 나약한 존재인 너희가 자신들을 구분해놓았을 기준일 따름이다.』

『그것이 우리에게까지 통용되리라 생각하는 것은 어찌나 오만하고 무지한 일인가.』

이진한은 찢어질 듯한 통증이 느껴지는 배를 움켜쥐며 바닥에 엎드린 상태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좋지 않아. 진짜로 좋지 않아.’

한순간이라도 이 위기를 타개할 여유가 필요했다. 머릿속으로 대현자 클래스가 지닌 스킬들이 스쳐 지나간다. 몸이 걸레짝이 되어도 생명력을 담보로 발동할 수 있는 도박수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가 있다. 이렇게 전신이 망가진 상태에서 무리하게 발동한다면 오히려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을 갉아먹는 자충수가 되었다.

쿠우우웅-!

그때 그들이 서 있던 하늘 위가 일렁거리며 마법의 발동을 알려왔다.

메피스토는 같잖다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내뱉었고, 두 눈을 가늘게 뜨는 것만으로 허공을 뒤덮은 술식을 전부 산산이 조각내버렸다.

『상심하지 말도록 하여라. 곧 이 땅 위에 살아 있는 존재는 전부 스러질 것이니.』

“…전부 죽이겠다는 말을 참 고급스럽게도 하네.”

일행이 벌어준 짧은 틈을 타 엘릭서를 마신 이진한은 무릎을 짚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월 마법]”

『소용없다. 너희가 제정한 마법 따위가 내게 통할 듯싶더냐.』

쥐어 짜낸 마나가 술식을 이루었다.

초월 마법까지 방해하는 것은 무리인지 아니면 격의 차이를 알려주기 위하여 방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휘몰아치는 마나가 끝내 하늘 위로 커다란 태양을 만들어냈다.

“[진홍의 보옥]”

대마도사 클래스의 초월 마법 중 가장 숙련도가 높고, 실패 확률이 적은 마법. 압도적인 힘과 초고열로 찍어 누르는 현상인지라 단순하면서도 상위권에 드는 파괴력을 지녔다.

후우욱─.

그와 동시에 메피스토의 입으로 거대한 왜곡이 발생했다. 마치 드래곤이 브레스를 쏘아낼 때의 전조를 보는 듯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막대한 기운을 응집했고, 이내 가늘어진 눈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쉬아아아아아악!

대지를 소멸시키려 깊은 흔적을 만들어내었던 파멸의 빛과는 또 한 차원 다른 규모의 기운이 허공을 꿰뚫었다.

지상을 향해 떨어져 내리던 태양이 더는 그 위용을 발하지 못했다. 메피스토가 쏘아낸 기운과 맞닿은 부분부터 바스러지며 마치 별이 붕괴하는 것처럼 우그라들기 시작했다.

“[진홍의…보옥]”

이진한은 비틀거리면서도 두 번째 초월 마법을 발동했다. 정신력 쪽은 아직 여력이 남은바. 하지만 이때까지의 싸움으로 축적된 피로가 전신을 엄습하며 현기증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두 다리로 굳건히 버텨냈고, 눈가로 피를 흘리면서도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이것도 버틴다면 인정해주마.”

메피스토와 같은 악마인 바포메트의 반신을 박살 낸 초월 마법의 연격이다. 고룡, 에이션트 드래곤 급이 아니라면 정면에서 막기 부담스러운 위력일 터. 하지만 메피스토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쏘아 보내는 브레스의 기운을 더욱 부풀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첫 번째 진홍의 보옥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가운데가 뻥 뚫린 채 도넛과 같은 모양이 되었고, 곧 그 시커먼 마기의 강선은 나선의 형태를 띠며 두 번째 진홍의 보옥에 닥쳐갔다.

“…미치겠네.”

이진한은 제자리에 선 채 지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이 또 다른 현실이란 것은 이미 진작에 깨달았지만, 만약 게임인 ‘월드’의 안이었다면 당장 메피스토에 대해 밸런스 패치 조정을 하라며 따졌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만큼 그 존재는 이레귤러였고 규격 외의 강함을 지닌바.

마법을 사용하려 마나를 끌어올리기만 해도 손끝이 떨려오는 지금 더 이상의 뾰족한 수가 없었다.

『끝이다.』

쉬아아악!

두 번째 진홍의 보옥 역시 중심을 꿰뚫리며 마기의 강선과 공멸(共滅)을 맞이한다.

메피스토는 그러고도 여력이 남았는지 다시금 검붉은 마기를 피워 올리며 저 멀리 떨어진 저택 쪽에 폭격을 가했다.

콰아아앙-!

제대로 서 있기 힘들 정도로 지축이 울린다.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을 바라보며 이진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순서가 바뀌었군. 일행이 먼저 가서 기다리는 상황이니 순순히 포기하는 것이 어떻지?』

“…개소리.”

『더 저항할 수단이라도 남아있다는 것인가. 재미있군. 이 몸이 비록 거짓과 기만의 악마라 할지라도 압도적인 무력으로 남을 능욕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 취향은 어디까지나 거짓으로 기만하는 것이니. 하지만 오늘만큼은 특별히 네 잔재주를 구경해주도록 하지.』

이젠 어쩔 수 없었다.

가진 것을 전부 걸어서 마지막 끝맺음을 보아야 할 때.

악마화든, 광폭화든, 회광반조든,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모아 건곤일척의 승부를 가려야 했다.

“악마화.”

【바포메트의 계약자 - 악마화(惡魔化)】

〔잔여 마기 ─「♠」─ ●●●●●○○○○○〕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바포메트의 마기가 전신을 휘감는다. 이진한은 짧게 한숨을 토해내며 마검을 쥐었다.

‘저 정도의 존재가 아무런 제약 없이 현신했을 리는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왕은 자신의 아주 일부조차 이곳에 현현하는 것을 버거워했다. 비록 그보다 못한 격을 지닌 악마라 할지라도 무언가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터.

시간이 되었든, 힘에 상한선이 걸렸든, 아니면 무언가 다른 것으로 그 인과율을 충당해야 하리라.

물론 그 전부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모종의 수단으로 아무런 제약 없이 현세에 현현했을 수도 있는 일.

하지만 이진한은 마검을 꽉 쥐며 옅게 숨을 내뱉었다.

‘잡다한 것은 머릿속에서 지운다.’

저택을 붕괴시킨 공격에 휘말렸을 일행이 걱정된다. 하지만 당장 메피스토를 쓰러뜨릴, 아니 최소한 물러나게 하지 못한다면 이러한 걱정조차 소용없는 일.

그러니 눈앞의 상대에 온전히 집중했다.

[악마화의 숙련도가 충족되었습니다.]

[악마화(惡魔化) 「강림」이 개방됩니다.]

그러던 차 상태창의 위로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악마화(惡魔化) 「강림」.

트루마크와 싸웠을 때 다음 단계까지의 숙련도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복선이었는 듯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난 이름에 이진한의 두 눈이 커졌다.

『언제까지 그리 멍하니 있을 것이지? 아직 발악을 멈추지 않은 것이 아니었느냐.』

메피스토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이보다 재미있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태도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인정하마. 인간의 몸으로 악마와 정면에서 맞서 싸운다는 건 무리였다.”

용사라고 불려 자신이 뭐라도 된 듯 착각이라도 했던 걸까.

이진한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 말하자, 메피스토는 실소를 머금으며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삶의 끝에서 회개라도 하려는 것인가. 그것을 듣는 대상이 거짓과 기만의 악마라는 것도 참으로 아이러니하군. 신도 참 무정하지.』

“그래도, 인간의 몸으로 무리라면 같은 악마를 불러오면 되지 않을까?”

『…뭐?』

「사바트의 염소여, 그대의 숭배자가 간절히 기원하오니 이곳에 강림하시어 군림하소서.」

읊조리듯 고대 악마의 「강림」을 촉구하는 말을 내뱉은 이진한은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메피스토를 바라보았다.

“나도 이제 모르겠다. 이렇게 만들어버린 네가 나쁜 거니까.”

그와 동시에 자욱한 마기가 지하에서부터 솟구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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